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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 수성동의 여름 풍경
수성동(水聲洞)은 물이 많아 물소리라는 뜻의 수성으로 이름이 붙었는데 곧 인왕산 입구다. 경오년(1810) 여름 큰 비가 수십 일이나 내려 개울물이 불어 평지에도 물이 세 자 깊이나 되었다. 내가 아침에 일어나 맨발로 나막신을 신고 우의를 입고서 술 한 병을 들고 몇 명의 동지들과 수성동으로 들어갔다. 돌다리 가에 이르니 아래 위쪽의 풍경을 바라보느라 다른 데 정신을 팔 겨를이 없었다. 개울이 빼어나고 폭포가 장대하여 예전에 보던 것과 완전히 다른 것처럼 느껴졌다.
대개 인왕산의 물은 옆으로 흐르기도 하고 거꾸로 흐르기도 하며 꺾어졌다 다시 흐르기도 한다. 벼랑에 명주 한 폭을 걸어놓은 듯한 곳도 있고 수많은 구슬을 뿜어내는 듯한 곳도 있다. 가파른 절벽 위에서 나는 듯 떨어지기도 하고 푸른 솔숲 사이를 씻어내듯 흐르기도 한다. 백 개의 골짜기와 천 개의 개울이 하나도 똑같은 형상을 한 곳이 없다. 이 모든 물이 수성동에 이르게 된 다음에야 하나의 큰 물길을 이룬다. 산을 찢을 듯, 골짜기를 뒤집을 듯, 벼랑을 치고 바위를 굴리면서 흐르니 마치 만 마리 말들이 다투어 뛰어오르는 듯하고 우레가 폭발하는 듯하다. 그 기세는 막을 수가 없고 그 깊이는 헤아릴 수가 없으며, 그 가운데는 눈비가 퍼붓는 듯, 자욱하고 넘실거린다. 때때로 날리는 포말이 옷을 적시면 서늘한 기운이 뼛속까지 들어와 혼이 맑아지고 정신이 시원해지며 마음이 편안하고 뜻이 통쾌해진다. 호탕하여 조물주와 더불어 이 세상 바깥으로 노니는 듯하다. 마침내 술에 만취하여 즐거움이 극에 달하였다. 이에 갓을 벗어 머리를 풀어헤치고 길게 노래하노라.
인왕산 위에 비가 쏴하고 내리면
인왕산 아래에 물이 콸콸 흐른다네.
이 물이 있는 곳 바로 나의 고향이라
머뭇머뭇 차마 떠나지 못한다네.
내 풍경과 함께 때를 씻고 나서
노래 부르고 돌아보면서 일어나니
하늘은 홀연 맑게 개고
해는 하마 서산에 걸렸네.
박윤묵(朴允默,1771~1849),〈수성동에 노닐고서(遊水聲洞記)〉《존재집(存齋集)》
☞ 수성동_겸재 정선(1751년경)_간송미술관 소장
해설 - 이종묵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박윤묵은 버젓한 양반은 아니었지만 스스로의 뛰어난 능력으로 정조의 지우를 받아 규장각에서 근무하였다. 위항의 시인으로 이름이 높았거니와, 천수경(千壽慶), 왕태(王太), 장혼(張混), 김낙서(金洛瑞) 등과 어울려 시사(詩社)를 결성하고, 천수경의 송석원(松石園), 장혼의 이이엄(而已广), 왕태의 옥경산방(玉磬山房), 김낙서의 일섭원(日涉園) 등에 모여 시회를 즐겼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두루 글로 남겨 후세에까지 길이 알려지게 한 공이 있다. 인왕산 자락에 있던 시회를 열던 집은 지금 모두 사라졌지만, 박윤묵의 글이 있어 그 풍류가 아직까지 전하고 있다.
사람이 사는 집이야 세월이 지나면 무너지고 없어지는 것이 당연하지만 인왕산의 수성동은 더욱 그 행방이 묘연하다. 박윤묵이 수성동을 노닌 것은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200년 전인데, 200년만에 수성동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한경지략(漢京識略)》에 따르면 수성동은 인왕산 기슭에 있는데 골짜기가 으슥하여 물과 바위가 빼어나며 특히 여름날 달밤에 노닐기 좋았다고 한다. 김창흡(金昌翕) 형제와 그 후학들이 수성동에서 자주 노닐었는데 그 시를 보면 자하터널 인근인 듯하지만,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박윤묵은 장맛비가 그친 무더운 여름날 벗들과 수성동을 찾았다. 그리 멀지 않은 곳이기에 맨발에 나막신을 신고 우의만 걸친 채, 술병 하나만 차고 바로 연락되어 함께 갈 수 있는 몇 명의 벗들과 인왕산을 올랐다. 오랜 장맛비에 벼랑마다 개울물이 폭포가 되어 떨어지니, 뼛속까지 시원하다. 이럴 때 한 잔 마시지 않고 어쩌랴. 평소 술을 좋아하였지만 아침에 한 잔, 점심에 한 잔, 저녁에 한 잔 마시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던 박윤묵이라도 이러한 통쾌한 풍경에는 양껏 술잔을 들이켰으리라.
도성에서 가까운 납량의 공간 수성동은 박윤묵의 글과 함께 간송미술관에 있는 겸재 정선의 그림으로 그 옛 풍광을 만날 수 있다. 거대한 바위 사이로 급한 개울이 흐르고 돌다리가 놓여 있는데 선비들은 풍경을 즐기고 있다. 박윤묵이 말하고 있는 그대로가 이 그림에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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