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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신 어머니의 필적
내가 나이가 막 예닐곱 살 되었을 때 여러 누이들과 함께 선비(先妣)를 모시고 있었다. 책 한 권을 가지고 먹으로 장난을 하여 더럽히고 손상한 것이 매우 심하였다. 선비께서 책을 빼앗아 장난을 하지 못하게 하고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는 《한씨삼대록(韓氏三代錄)》이란다. 내가 아이 적에 글씨를 연습하던 예전 것이지. 그 이야기가 황당하고 필체 또한 유치하여 그다지 아까울 것은 없지만, 사이사이에 죽은 중제(仲弟) 금산군(錦山君)의 글씨가 있단다. 예전 자취는 함부로 해서는 아니 된단다.”
이때 나와 여러 누이들은 선비 무릎 아래 빙 둘러 엎드려 겁을 먹은 채 오직 꾸지람을 면하면 다행이라고 여겼을 뿐 그 말이 그렇게 슬픈 것임을 알지 못하였다. 또 그 책이 진귀하다는 사실도 알지 못하였다. 아, 눈 깜짝할 사이에 문득 20년 전 일이 되어 버렸고 세상사도 너무 많이 바뀌었다. 아, 애통함이여.
기미년(1739) 여름 아내 오씨가 갑자기 오래된 책 묶음 하나를 어린 아이를 시켜 나에게 보내면서 이렇게 당부하였다. “선조의 묵적(墨蹟)입니다. 당신은 어찌 훗날 오래 전해질 방도를 마련하지 않으시는가요?” 이 때 내가 막 부모님의 상을 마쳤으므로 휑하니 마음을 둘 곳이 없었다. 넘어질 듯 급하게 일어나 이를 받아 반도 읽기 전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아아, 안부를 묻는 짧은 편지는 대부분 우리 집 어르신께서 직접 써서 주고받은 것이 없고, 그중 헤진 책 한 권은 곧 이른바 《한씨삼대록》이다. 아쉽게도 쥐가 뜯고 좀이 먹어 태반은 찢어져 다시 예전 모습이 없어졌지만, 직접 쓴 먹자국은 뚜렷하여 지난날의 자취를 아직도 분명히 볼 수 있었다. 아, 이 어찌 차마 읽을 수 있겠는가? 또 차마 어찌 하루라도 머뭇거리면서 더 훼손되기를 기다릴 수 있겠는가?
마침내 잘려 나간 것을 보태고 빠진 것을 보충하며 장황을 고치고 그 표지에 제목을 써서 선조의 유묵이라는 뜻에서 ‘선묵(先墨)’이라 하였다. 그리고 그 아래 전말을 간략하게 기록하였다. 스스로 불민함을 책망하고 어린 아이들에게 고하여 혹시라도 내가 한 짓처럼 멋대로 손상하거나 더럽히지 않도록 한다. 기미년 7월 모일 불초자 진응이 피눈물을 닦으면서 쓴다.
진응이 불효하고 무도하여 죄가 깊은데도 죽지 못하여 모친을 잃은지 지금까지 26개월이 되었다. 빈소를 이미 철거하고 심상(心喪) 역시 거의 끝이 났다.1 하늘과 땅에 부르짖어도 미칠 수 없기에 마침내 평소 보고 들은 바를 진술하여 가장(家狀)을 지었다. 또 흩어져 있는 유묵을 두루 수습하여 상자 하나에 넣어 보관하면서, 아침저녁 받들어 살펴서 자구와 글씨 사이에서 어렴풋이나마 그 남기신 전범(典範)을 상상할 수 있기를 바랐다. 아, 이것을 가지고서 그 그리움을 위로할 수 있을까? 그저 슬픈 마음만 더할 뿐이라, 터져 나오는 울음소리와 줄줄 흐르는 눈물을 참는다. 차라리 일찍 죽어 아래로 지하에서나마 좇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로부터 이틀 뒤 다시 쓴다.
권진응(權震應),〈선비가 손수 쓰신 한씨삼대록 뒤에 쓰다(書先妣手筆韓氏三代錄後)〉,《산수헌유고(山水軒遺稿)》
《규방미담》의 첫 장_미국 캘리포니아대학(버클리) 소장
[해설] - 이종묵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산수헌(山水軒) 권진응(權震應)은 권상하(權尙夏)의 증손이다. 권진응의 모친은 은진 송씨로 명유 쌍청당(雙淸堂) 송유(宋瑜)의 후손이며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의 따님이다. 권진응을 가졌을 때 부친 동춘당이 여러 자제를 거느리고 희색을 띠며 들어오는 태몽을 꾸었기에 어릴 때 이름을 춘동(春同)이라 하였다. 권진응은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벼슬길을 좋아하지 않아 고향인 청풍(淸風)에 머물러 강학에 전념한 학자다.
엄한 성리학자이지만 어머니에 대한 감정은 여느 사람과 다를 바 없었다. 어머니 송씨는 《내훈》과 《열녀전》을 읽어 사리를 알았거니와 영민하여 주위에서 남자로 태어나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고 한다. 그런 재주로 젊은 시절 친정의 아우 묵옹(默翁) 송요좌(宋堯佐)와 함께 《한씨삼대록》이라는 소설을 필사하였다. 아마도 집안 어른 중에 어떤 이가 이러한 일을 부탁하였던 듯하다.
권진응은 어린 시절 글씨를 배운다 하여 먹과 붓을 가지고 놀 때 그 여동생과 함께 이 《한씨삼대록》에 낙서를 하였다. 어머니 송씨는 이를 보고 놀라 빼앗자, 권진응은 꾸지람을 들을까 겁을 낼 뿐 《한씨삼대록》이 어떤 사연이 있는 책인지를 알지 못하였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탈상을 한 후 아내 오씨(吳氏)가 그 책을 가져왔다. 아내는 오두인(吳斗寅)의 손녀이며 오이주(吳履周)의 딸이니 그 역시 명문가의 후손이다. 아내는 남편이 잊고 있던 이 책을 남편에게 건넸고 이에 권진응은 책을 보수하여 소중하게 간직하게 되었다. 그러한 사연을 이 글에 담았다.
조선시대 명문가의 여성들도 규방에서 한글로 된 소설을 읽었다. 권진응의 이 글은 17세기 이전 장편한글소설이 창작되어 규방에서 유통되었음을 알게 하는 소중한 자료로 우리 소설의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는 널리 알려져 있다. 소설사에서 귀중한 글이지만, 돌아가신 어머니가 쓴 책을 든 아들의 눈물이 더욱 가슴을 끈다. 아들의 갸륵한 정성에 《한씨삼대록》이 오늘날까지 세상에 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 심상(心喪)은 심제(心制)라고도 하는데 상복(喪服)은 입지 않지만 화려한 의복과 주육(酒肉)을 금하는 일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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