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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섹스의 물리학 / 마광수

부흐고비 2010. 8. 19. 07:59

 

섹스의 물리학......마광수


음(陰)과 양(陽)을 만물의 구성원리와 운행원리로 본 음양오행설의 입장으로 볼 때, 남자는 양이요 여자는 음이다. 양의 대표적 상징물로 하늘. 남성. 밝음을 들 수 있고, 음의 대표적인 상징물로 땅 .여성 . 어둠을 들 수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남녀간의 사랑은 우주를 지탱해가는 가장 기본적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음양이론을 기본적 세계관으로 삼아 생활해 왔던 동양인들에게 있어서는, 그래서 성의 억압의 역사가 별로 발견되지 않는다. 서양의 중세기 암흑시대에는 갖가지 성적 억압과 편견이 난무했었는데, 그 까닭은 서양인들이 음.양 상대성의 이론을 아직 체질화시키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음양이론에 따른다면, 인간의 가장 기본적 욕구인 식욕조차도 성적 결합에 의하여 충족되어진다. 소가 암.수의 결합을 하지 않는다면 송아지를 낳지 않을 것이고, 벼가 자웅교배를 하지 않는다면 쌀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욕이 식욕보다 더 중요하고, 성욕으로 대표되는 음양의 화합력이 만물을 지탱해나간다고 볼 수 있다.

음양이론과 함께 오행설(五行說)도 중요한데, 오행이론에 따른다면 양의 대표적 상징물이 불(火)이고 음의 대표적인 상징물이 물(水)이다. 남녀의 사랑, 특히 성적 결합을 생각해 볼 때, 남자는 불, 여자는 물이므로 남녀의 결합은 '물과 불의 만남'으로 풀이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과 불의 성질을 분석해 봄으로써 사랑의 메커니즘을 추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은 남자가 먼저 불을 당긴다. 꽃이 나비를 따를 수 없듯이, 물이 불을 끌어당길 수는 없다. 불, 즉 남성이 먼저 강력한 저돌성으로 물, 즉 여성을 공략하는 것이다. 여성은 대체로 성감(性感)의 자각 과정이 느리다. 물은 가만히 머물러 있고 싶어 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여자(물)가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끓어오르려면 불을 필요로 한다. 장작불로 물을 끓여 주어야만 물은 비로소 서서히 뜨거워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남자는 스스로의 에너지를 가지고 불같은 정열로 물을 데운다. 그런데 물이 끓을 때까지는 좋은데 그 뒤가 문제다. 불은 스스로의 에너지를 다 소모해 버려서 완전히 지쳐버리고 만다. 장작을 태우고 나니 재만 남아 버리는 식이다.

그러면 물은 어떤가. 물은 끓는 것도 더디지만 식는 것 역시 더디다. 불이 완전히 꺼져버린 뒤에도 물은 계속 뜨거운 상태를 오랫동안 유지한다. 여기에 남녀간의 사랑의 원초적 비극성이 있다. 또한 물과 불은 원래 상극이다[水克火]. 물을 만나면 불은 꺼져 버린다. 물로 불을 끌 수는 있지만 불로 물을 막을 수는 없다. 그러니까 불은 스스로의 정욕을 못 이겨 처음엔 기세 좋게 물을 향해 돌진해 가지만, 그것은 결국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셈이다.

짐승이나 곤충 중에는 암놈과 숫놈이 정사를 마치고 나면 숫놈이 곧 죽어버리거나, 심지어는 암놈이 숫놈을 잡아먹어버리는 경우(사마귀의 경우)가 있는데, 이는 바로 '수극화(水克火)의 원리 때문이다. 이 세상은 겉으로 보기에는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여자가 남성을 지배하고 있는 셈이다. 남성은 처음에 미칠 듯이 잘난 척하며 불같은 정열로 여성에게 돌진하지만, 일단 사정(射精)을 해 버리고 나면, 즉 장작을 다 소모해 버리고 나면 그저 축 늘어져 버리고 피곤해질 뿐이다. 그러나 여자는 일단 한번 데워진 물이기 때문에 더욱더 성욕이 불타오른다. 그리고는 지쳐버린 불같은 남성을 경멸의 눈으로 바라본다.

또 나이로 보더라도 남성은 20대에 성욕이 불같이 강하지만 여성은 40대에 가서야 성욕이 강해지는 것도 같은 이치 때문이다. 그러므로 동갑끼리 결혼을 한다는 것은, 정(情)을 뺀 성애의 면에서만 볼 때는 비극적인 결말을 작정한 것이나 다름없다. 여성은 소위 '늦바람'이 나기 쉽고, 정력이 쇠잔해져 버린 남편을 깔볼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불이 처음엔 잘 타오르지만 한번 꺼져버리면 그만 이라는 속성은, 남성이 여성보다 싫증과 권태를 잘 내는 것으로도 설명될 수 있다. 남성은 '정복욕'이 강하여 산꼭대기를 향해 줄기차게 돌진해 올라간다. 그러나 일단 정상을 정복해 버리고 나면(즉 사정을 하고 나면) 다시 산을 내려오는 수밖에 없다. 에베레스트 정상에 낑낑대고 올라가 봤자 거기서 수십 년 사는 등산가가 어디 있나? 그 저 깃대나 한대 꽂고 내려올 뿐이지.

여성들은 남자가 산에 올라갈 때, 즉 불을 활활 지피기 시작할 때의 열정에 속아, 그 사람에게 몸을 맡기면 평생을 사랑해 줄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남자는 정복욕을 채우고 나면 내가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싹 돌아누워 버린다. 싫증이 났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건 핑계고, 사실은 힘이 다 소모되어 기진맥진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 부터 사랑의 비법을 가르치는 동양의 많은 책들에서는 '접이불루(接而不漏)'의 방법을 남성들에게 권장하였다. 불로 여자를 데우기는 데우되 완전히 100도까지 되도록 끓이진 말고, 즉 사정하지는 말고, 그저 40~50도 정도로만 데워서 서로서로가 즐기라는 것이다. 요샛말로 한다면 '헤비 페팅(heavy petting)'은 자주 하되 '삽입과 사정'에 의한 성교는 되도록이면 하지 말라는 뜻이다. 일단 100도까지 올라간 여자는 남자가 도저히 컨트롤할 수 없기 때문이다. 40~50도 정도라면 여자도 빨리 식기 쉽고 남자도 에너지를 과잉으로 소모하지 않게 되니, 건강에 좋을 것은 뻔한 이치다.

또 사랑의 행위란 꼭 100도까지 올라가서 빨리 끝내는 것보다는, 서서히 미열을 가지고서 서로를 애무하는, 즉 갖가지 성희(性戱) 위주의 섹스가 훨씬 더 재미있고 운치가 있는 게 사실이다. 흔히 이런 성희들 가운에 좀 비관습적(非貫習的)인 게 있으면 그것은 '변태'라고 하여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데, 변태란 사실 비생식적(非生殖的) 섹스, 즉 삽입과 사정에 의한 섹스 이외의 것을 모두 가리키는 말이므로, 꼭 병적인 증상을 가리키는 말은 아닌 것이다. '변태적 섹스'를 '개성적 섹스'로 이해하게 될 때, 우리들의 사랑은 더욱 아름다워질 수 있다.

물과 불이 상극이면서도 굳이 합쳐지려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물론 음양의 결합이 바로 우리의 삶의 궁극적 목표, 즉 '종족 보존'이기 때문이리라. 음양의 결합의 결과는 '자식'이다. 그래서 자식을 돌보라고 여자는 남자보다 더 오래 살아남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남성이므로 남성 편에 서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음양의 결합은 곧 '죽음'이라고. 그러므로 남성들은 물을 가지고 놀긴 놀되 우리의 생명을 해칠 만큼의 열정을 기울일 필요는 없다.

또 여성 쪽에서 보더라도 남자가 빨리 죽어버린다면 무슨 보람이 있겠는가? 서서히 남성을 '이용하여' 성애를 즐기기 위해서라도, 여성들은 남자의 정력이나 사정의 횟수로만 남성의 가치를 평가하지 말고, 남성이 갖고 있는 '서서히 불 땔 줄 아는 기술' 즉, 성적 상상력과 애무의 테크닉의 정도에 따라 남성의 가치를 평가해야 한다. 사랑의 욕화(慾火)에 따른 정복욕에 신음하며 안달하는 남성들은 한시바삐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 마찬가지로 성적 오르가즘에만 집착하는 여성들 역시 꿈을 깨야 한다.

사랑은 이렇듯 음.양 두 상극의 만남으로 비롯되는 격렬한 투쟁의 장(場)이다. 따라서 우리가 아름다운 사랑, 아름다운 성애를 이루기 위해서는 여성 정복욕에 의한 소유욕으로서의 사랑이나, 남자에게 완전히 정복당함으로써 얻어지는 이기적 매조키즘으로써의 사랑으로부터 탈피할 필요가 있다.

짝사랑이 더 감미롭고, 이별의 순간이 더 애틋한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해주는 것은, 그것이 다 미완(未完)의 사랑이기 때문이고 서서히 데워지는 미열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남녀간의 투쟁으로서의 사랑이 되어서는 안 된다. 따먹고 따먹히는 사랑이어서는 안 된다. 또 '결혼'을 종착점으로 하는 소유와 결박으로서의 사랑이어서도 안 된다. 사랑은 '서로 즐기는 사랑'이 되어야하고 서로의 관능을 자극하여 각자의 '생명의 약동'에 활기를 불어넣는 것이어야만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먼저 사랑의 뿌리가 정신이 아닌 '육체'에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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