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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파랑 / 송마나

부흐고비 2019. 12. 15. 09:42

파랑 / 송마나
The 수필, 2019 빛나는 수필가 60인 선정작


파란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고요함과 가벼움마저 씻어낸 하늘은 무한히 푸르렀다. 저 무염無染한 푸름을 우주적 푸름이라고 할까. 금방이라도 시퍼런 강물이 하늘에서 흘러넘칠 것 같았다. 강물에서는 비파 소리가 들렸다. 줄 없는 비파 소리는 존재의 생멸마저도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게 하였다. 하늘은 이미 두 눈 안에 담긴 풍경이 아니었다. 나의 몸은 하늘의 한 조각이었다.

히말라야 설산들이 파란 하늘에 끝없이 늘어섰다. 이때 하늘은 세상의 절대 배경이다. 그 무수한 봉우리들 사이로 에베레스트가 우뚝 솟아 있을 터. 나의 눈길은 그곳의 베이스캠프를 찾아 헤맸다. 에베레스트산은 아무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티베트 팅그리스 검문소는 세계에서 몰려온 산악인들을 걸러내고 있었다. 줄지어 늘어선 랜드로버 자동차 30여 대를 타고 온 사람 가운데 동양 여자는 나 혼자였다. 고독했다. 산에 오를 때마다 늘 고독했다. 높은 산에 오를수록 정상은 하늘을 더욱 파랗게 물들였기 때문이다. 지구에서 가장 높다는 에베레스트산은 얼마나 파란색으로 하늘과 맞닿아 있을까?

검문을 기다리는 동안 산등성이로 올라갔다. 하늘에서 종소리가 울렸다. 종소리는 산소가 희박한 산마루를 오르는 내 심장의 고동 소리였는지도 모른다. 종소리가 닿는 곳마다 꽃이 피었다. 푸른 꽃이 피었다. 소설 《푸른 꽃》1의 주인공 하인리히의 마음을 앗아간 것은 키가 큰 푸른색 꽃이었으나, 내 귀를 사로잡은 것은 손톱보다 작은 푸른 꽃의 웃음소리였다. 그 웃음소리는 바람 따라 흩어졌고 바람이 스치는 곳마다 푸른 꽃들이 피어났다. 광활한 고원은 푸른 종소리가 가득했다. 그 종소리를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그래, 어린 시절에는 푸른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들판 위에서 뛰어놀았지. 인간은 누구나 마음 깊은 곳에 그리운 소리를 간직하고 있다. 나는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어머니의 목소리에 매혹되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 목소리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초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이었을까. 식구들과 가마미 해수욕장에 도착했으나 그날은 밤이 늦어 바다를 보지 못하고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살며시 눈을 떴다. 열린 문 너머로 처음 보는 바다가 눈부시게 펼쳐져 있었다. 푸른빛이 어둠에 갇힌 나를 구출하기 위해 방문의 네모 틀이 부서지도록 강렬하게 달려들었다. 내 숨결이 빨라졌다. 푸른 바다로 뛰어들었다.

사람들은 도넛처럼 생긴 튜브를 안고 둥둥 떠다녔다. 나도 그들처럼 튜브를 껴안고 물장구를 쳐댔다. 어머니는 맨몸으로 멀리 헤엄쳐 나아갔다. 사람들은 어머니의 수영 실력에 놀라며 환호했다. 튜브를 의지한 사람들은 해안선에 인접한 바다에서만 맴돌아야 한다. 해안선을 따라 평행으로 너울거릴 뿐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곳을 벗어나 푸른색이 솟아오르는 바다와 하늘이 맞닿은 무無의 선을 향하여 곧장 헤엄쳐갔다. 어머니는 튜브를 버려야만 푸른 바다를 마음껏 헤엄칠 수 있다고 속삭였지만 나는 그 소리를 귀담아 듣지 않았다.

'파랑', 이 소리의 울림은 얼마나 가볍고 경쾌한가. 투명하여 속이 훤히 보일 것 같다. 어떤 저항이나 경계도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꿈과 사랑, 낭만과 알 수 없는 그리움이 떠오른다. 달빛 쏟아지는 고요한 해변으로 떠나고 싶어진다. 그곳에서 블루 칵테일을 마시며 블루스 리듬에 흠뻑 젖어들고 싶다. 파랑이란 이름만 들어도 나는 어느새 파랑새가 되어 하늘을 날아오른다.

하늘은 스스로 푸르게 깊어간다. 푸른색을 퍼내고 퍼내어도 그 무궁한 빛을 잃지 않는다. 먹구름이 뒤덮어도 하늘빛은 마냥 청정하다. 마음껏 마시는 공기, 두 팔로 휘저어도 걸림이 없는 공간, 마음이 하늘 너머로 내달려도 막히지 않는 허공, 이 모든 하늘은 보이거나 만져지지 않고 냄새도 없다.

하늘의 푸른빛은 이미 색깔이 아니다. 항상 그대로 무위無爲일 뿐, 야릇한 욕망이 아닌 초월적 혜안이 담겨 있는 듯하다. 인간이 대지와 함께 풍요로워지고 기쁨이 넘치면 하늘빛은 절로 푸르러지리라.

파란색은 모든 색깔 중에서 가장 높이 올라선 색이다. 나는 그 파란빛을 찾아 산을 오르고 올랐다. 급기야 에베레스트 산허리까지 올라왔지만 정상은 아득하기만 했다. 등에 진 배낭이 무거웠다. 필요하다고 여긴 것들로 채워진 배낭 무게가 더는 오를 수 없게 했다. 배낭을 벗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이 푸르러질수록 어머니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튜브를 버려야만 푸른 바다를 마음껏 헤엄칠 수 있다."고.

  1. 《푸른 꽃》은 독일 낭만파 시인 노발리스(1772~1801)가 쓴 미완성의 소설. 중세의 전설적인 기사 하인리히 폰 오프터딩겐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주인공 하인리히가 꿈에 본 푸른 꽃을 찾아 헤매는 여정을 그렸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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