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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색色에 대한 오해 / 전미란

부흐고비 2019. 12. 15. 09:49

색色에 대한 오해 / 전미란


어떤 이의 더운 가슴이 토해낸 걸까. 화단에 피어있는 목단꽃나무 한 그루. 사람의 손이 타지 않는 후미진 곳에서 붉은 겹꽃잎 떨기들이 겨우니 겨워서 겹다. 꽃에게 가까이 다가가 이마를 대고 들여다본다. 바로 그 때, “붉은 것을 가까이 하면 안 된다, 조심해라!” 또 다시 서늘한 말씀이 들려온다.

기억의 반닫이 문짝이 덜컥 소리를 내며 아래로 젖혀진다. 아주 가끔 그 문짝을 여닫을 때마다 어릴 때 기억 속에서 굵게 금 간 오지독 같은 생채기를 발견한다. 어느 날 급히 방으로 뛰어들어 앞닫이 장을 뒤지시는 어머니,
“니 삐런 옷이 워딨다냐?”
“왜요?”
“부정 탕만 멋 헐라고……, 빨가문 못써!”

어머니의 기색은 엄중하셨다. 입 뻥긋도 할 수 없었다. 빨강색의 내 옷가지들이 다 불살라져 버렸다는 것을 나중에 작은언니에게서 들었다. 높이 솟은 대나무 끝에 오색 깃발이 나부끼던 당골네서 엄마는 무슨 얘기를 들었던 것일까. 혹, 내 안에 속기? 영영 빠지지 않는 붉은 기?

엄마는 감나무 가지 하나를 자르더라도 점집으로 달려가곤 했다. 내가 들을 대답이 정해져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뜻을 묻지 못한 ‘빨가문 못써!’는 금기의 ‘몹쓸 것!’으로 각인되었다. 사춘기 때 한창 피어나는 것이 부끄러웠고, 벙그는 꽃에 대한 호기심도 그러했다. 붉음은 계집아이를 잠 못 이루게 하고 집을 나가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금단의 색깔이었다.

여자가 되어 가면서 누군가의 가슴에 가닿고 싶은 그리움도 묘한 들썽거림도 빨강이 시킨다고 생각했다. 자칫 물들기 쉬운, 손 돼서는 안 되는 빛깔. 어떤 대상에게 한 번 그 불길이 옮겨 붙으면 온 인생을 불살라 버리고 말 것 같은 색…….

나는 일찍이 허락되지 않은 뻘건색을 뽑아 버려야만 했다. 엄마로부터 그렇게 상속된 붉음은 지워버릴 수 없는 강박의 다른 이름이었다. 버려야 했던 것이 있었기에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일까 많이 생각했다. 그 후, 흔한 봉숭아물도 손톱에 들이지 않았고 붉은 옷은 단한 번도 사지도 입지도 않았다. 불경스러운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지금도 꺼리는 색이다.

그러면서도 몸에 걸치고 싶은 색, 가까이 하고 싶은 색, 까닭 없이 달려들어 온몸을 끼얹는 색. 금기와 유혹과 열망을 품고 있는 색에 대한 오해는 깊어만 갔다.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마음속 상자. 접시 물도 조심하고, 망신살에, 도화살에, 구설수까지 차곡차곡 개어서 넣어 두었던 상자. 무엇이 들어있는지 짐작하면서도 뜯어 볼 수 없었던 금기의 상자를 그리스 신화 프시케처럼 끝내 열어보고야 말았다.

그러나 나는 프시케처럼 영원한 잠에 빠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로 깊은 수렁 같은 ‘삐런’색에 대한 오해는 결혼이라는 사건으로 정리 되었다.

어머니의 절대적인 금기 ‘삐런 액막이 옷’은 몸에 걸치면 안 되는 재앙의 색깔이 아니었다. ‘빨가문 못써!’는 세상 어디에나 널려있는 남성중심, 그들만의 욕망의 족쇄였을 뿐. 아찔한 뜨거움과 희열 속에서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아이가 태어난, 아름다운 생명의 색이었다.

덫이기도 하고 빛나는 생명이기도한 너무나도 인간적인, ‘삐런’ 색깔 앞에 뒤늦은 화해의 손길을 내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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