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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단추 / 전미란

부흐고비 2019. 12. 15. 09:51

단추 / 전미란


뻥 뚫린 철로를 따라 한기가 몰려온다. 도시의 겨울은 아무리 두껍게 옷을 입어도 으슬으슬 한기가 스며든다. 옷을 여미려고 습관적으로 외투 단추를 더듬는다.

“어떡해…”
어디서 떨어져 나간 것일까. 단추가 매달려 있던 빈자리를 더듬는데 기다리고 있을 그녀의 얼굴이 떠오른다.

다겸이라는 이름을 가진 지적이고 빈틈없어 보이는 그녀는 피부가 희고 눈동자가 검다. 이름처럼 다 겸한 듯 보이는 그녀의 얼굴은 늘 입안에 사탕을 빨고 있는 듯한 뺨이 인상적이다.

어느 날 그녀가,
“난 수면제를 먹어야 잠이 와요.”

뒤척였던 고통의 밤을 길게 말했다. 나는 수면과다증에 시달리고 있었으므로 그녀의 말에 무감각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날들이 질병처럼 길게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무기력증에 빠진 나는 틈만 나면 잠을 잤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눈을 뜨고 있을 그녀와 한낮에도 멍하니 누워있는 나의 시간은 같은 물결 위를 표류하고 있는 것일까.

낯선 도시의 거리에는 퓨전요리 집과 소품가게들이 깔끔하게 줄지어 서 있었다. ‘돌아온 싱글’ 영주가 먼저 도착해서 다겸과 함께 마중 나와 있었다. 세 여자는 ‘자아통합’이라는 주제의 세미나에서 처음 만났었다. 강의를 듣고 난 후 집단으로 나눔을 가졌고, 그 때부터 내면의 상처들을 나누어 가지는 사이가 되었다.

다겸의 거실은 삼면이 유리로 둘러싸여 있었고, 천장 위로 허공이 열려 있었다. 투명 돔에 갇힌 기분이 든다. 소실점이 없는 바깥 풍경 때문인지 바닥없는 허방에 떠 있는 것 같다. 나는 거실 사물들의 조화를 가늠하고 판단하는 감정관 같은 시선으로 방 안을 살핀다. 어쩌면 그녀를 좀 더 깊이 알 수 있는 실마리를 찾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잡동사니가 전혀 없는 이 집은 항상 차가운 빈방처럼 느껴진다.

잠깐의 탐색이 지나고, 그녀가 단추 떨어진 내 외투를 받아 들더니 드레스 룸으로 간다. 같이 따라 들어간 영주와 나를 향해 그녀가 옷을 걸다 말고,
“이거 야하지?”

습자지 같이 찢어질 듯 얇은 란제리를 보여 준다. 들어 비치는 검은 레이스 천에 깔린 붉고 화려한 장미꽃무늬가 저돌적이기까지 하다. 어쩌면 그녀의 은밀한 곳에서 피워 올린 열정이 저런 무늬일까. 푸른 이파리 하나 없는 붉은 꽃숭어리들이 뜨겁다. 그 뜨거움에 데일 것 같다는 생각을 잠시 괄호 속에 묶어둔다.

“그 정도면 야한건가요?”
되묻는 내 대답은 안착할 곳을 찾지 못하고 부메랑이 되고 만다. 남편의 품을 갈망하는 그녀는 출근하는 남편에게 플라토닉사랑은 언제 끝낼 거냐고 슬쩍 운을 떼어 보기도 한다고 하였다. 아내의 욕구는 집안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 두어야 고상하고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그녀의 남편. 어둔 밤 잠 못 이루는 꽃으로 깨어있는 그녀는 남편과 사이에 채워지지 않는 사랑의 간격으로 괴로워했다.

그녀가 깊은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뜬금없이,
“흙 장미 같아.”
라고 말한다.
“장미요?”
나는 의아하다는 듯이 웃기만 한다.
“꽃잎이 벨벳처럼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검붉은 장미…….”
그러면서 이어지는 말,
“가시를 숨기고 있는……”
“……”

그녀와 사이에 이어지지 않는 대화 사이가 바람처럼 부풀어 오른다. 내가 언제 꽃이었던 적이 있기나 했던가. 스무 살 무렵부터 절대적으로 순결해야 된다는 강박관념에 갇혀 살아 온 나는 나비 날개처럼 부서지기 쉬운 순결을 꽁꽁 동여매었다. 보수적인 시골마을, 어머니는 마치 정해 놓은 배필이라도 있는 것처럼 행실을 단속했다. 우셋거리가 될까봐 벼락처럼 떨어지던 어머니의 꾸지람. 바람만 스쳐도 몸 물이 돌던 시절을 무사히 건너기 위해 몸에 꼭 지녀야 했던 부적이 순결이었다.

넘치도록 황홀하고 아름다운 장밋빛 세계를 지키는 길은 결국 감당하기 어려운 가시를 품는 일이라는 것을 깊이 새겼다. 자칫하다가는 세상의 인습이라는 날카로운 가시들이 다 내게로 향할 것만 같은 두려움에 떨었다. 안에서는 끈질긴 욕망이 솟구치고 바깥에서는 강한 흡인력이 내게 손을 뻗어 올 때마다 통속적인 사건에 휘둘리고 싶지 않아 착실히 접힌 꽃잎 속에 숨어 욕구를 누르고 금기시 했다.

두려움 속에 마치 다른 갈래에서 흘러들어온 것 같은 은밀한 욕망의 물줄기가 차오르곤 했지만 터부시했고, 불순하고 저급한 감정으로 치부했다. 이런저런 금기로 그을린 검붉은 나의 장미는 채 피어나지 못했다.

숨은 가시라는 말이 꽤 부정적으로 들렸지만 내게 꽃이라 이름 붙여준 그녀의 관심이 싫지는 않았다. 하지만 속으로 당신은 아직 나를 표면적으로 파악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 나에 대해서 말해주거나 규정해주면 그 이미지에 꼼짝없이 갇힐 때가 있었고, 설명으로는 불가능한 나는 상대에게 꼼짝없이 그런 사람일 뿐일 때가 많았다.

영주는 석류 껍질을 벗기고 있었다. 알맹이를 상처 나지 않게 빼내느라 애쓰고 있는 모습이 왠지 애잔해 보인다. 그녀는 쉽게 열 수 없는 꽉 다문 자신의 입을 벌려 보려고 애쓰고 있는 듯 보인다. 이혼의 아픔을 삼켜버린 그녀는 말이 없는 편이다. 안으로 삭여낸 속살 같은 석류의 붉은 물이 밖으로 흘러나온다.

“석류물이 손에 묻으면 꼭 핏물 같아.”

그렇게 말 하면서도 영주는 손을 씻어가며 속살을 파낸다. 영주는 지금 자신의 속살의 욕망을 그렇게 파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오래된 결별의 통증을 파내 버리고 있는 것일까.

“완벽한 남자를 원해요?”

내가 물었다. 그녀는 덧없는 사랑의 이력을 추가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래서 또다시 결혼하지 않기를 선택하고 있는 그녀. 꿈꾸는 남자는 현실에서 만날 수 없는 것일까. 아니면 자신을 사랑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열매주머니 속에 엉겨있던 석류의 붉은 속살들이 알알이 윤을 내는 개체가 되어 서로 모서리를 맞대며 접시에 담겨진다. 깊고 시린 단맛의 석류 알. 선연한 붉은색. 태풍과 천둥, 그리고 뜨거운 땡볕이 없이는 저절로 붉어지지도 영글지도 않았으리라.

우리들은 그 붉은 빛깔 앞에서 그 동안 차마 꺼내지 못했던 붉은 빛깔의 욕망들을 토해낸다. 결혼과 이혼이라는 삶의 밑그림 위에서 맞서기도 하고 때로는 치이기도 하면서 겪어야 했던 세 여자의 이야기는 끝이 없다. 석류 알맹이처럼 겉으로 보이는 붉은 빛깔의 마음들은 서로 비슷하지만 눌린 감정의 모서리는 다르다.

다겸의 드레스 룸에서 외투를 받아 걸친다. 눈동자가 빠져나간 퀭한 눈 같은 단추 구멍이 나를 빤히 올려다본다. 지금쯤 길거리 어디에선가 누군가의 발길에 채이고 있을 잃어버린 욕망의 눈빛. 얼마나 오랜 세월 조바심치다 지쳐 떨어져 나간 것일까. 그 미미한 것의 사라짐. 너무 사소한 것이어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길수록 오히려 마음에 자국으로 남는 까닭은 무엇일까. 작은 고리 속에 끼워진 단추 같은 부속품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들 세 여자의 자화상이기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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