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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흙을 밟고 싶다 / 문정희

부흐고비 2019. 12. 21. 12:05

흙을 밟고 싶다 / 문정희


동네 꼬마들이 흙장난을 하고 있다. 그것도 흙냄새가 향기로운 아파트 정원에 앉아서.

"출입금지"라는 팻말에도 아랑곳없이 흙 위에 풀석 주저앉아 노는 모습이 좋은 놀이터라도 발견한 듯 신이 나 있는 표정이다. 화단 내에 들어가지 말 것을 주의를 주어야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동심으로 돌아가 모르는 척 그들 노는 모습을 망연자실 지켜보고 있다. 아파트 내에서 그나마 흙냄새 나는 곳이 있다는 게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곱슬머리 남자 아이가 운동화를 벗더니 신발 가득 흙을 담기 시작했다. 짐 실을 트럭을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이에 뒤질세라 그중 가장 나이가 어려 보이는 여자아이는 무엇을 하려는지 흙을 산더미처럼 쌓기 시작한다. 흙을 갖고 온갖 놀이를 구상하는 모습이 어찌나 진지해 보이는지, 군데군데 나무와 화초가 심어진 정원이 그들의 천국인 양 평온하기가 이를 데 없다.

헌데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아이를 찾던 곱슬머리 소년의 엄마가 헐레벌떡 달려오더니 다짜고짜 아이를 야단치기 시작했다. 발그스레 홍조 띤 아이의 뺨까지 때리며 화를 내는 게 정말 저 아이를 낳은 친엄마일까 의심할 정도였다. 놀이터를 놔두고 왜 하필 더러운 흙을 만지며 노느냐는 것이다. 트럭을 만들려고 흙을 담아 놓은 운동화를 보자 아이 엄마의 얼굴은 더 일그러졌다. 새 신발에 흙을 묻혀 놓아 짜증스럽다는 표정이다.

"내버려 두세요, 흙놀이도 자연을 알게 하는 산공부인데"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아이의 옷에 흙 묻히는 걸 싫어하는데 불난집에 부채질하는 격이 될 것 같아서였다. ​흙을 가득 실은 운동화 트럭을 운전해보지도 못한 채 엄마 손에 이끌려가는 아이의 모습이 안타까웠다. 흙내음을 맡으며 모처럼 도시의 딱딱함으로부터 해방된 것 같은 기분을 그 아이들은 느꼈을 터였다.

기성세대의 고집이 아이들의 감성을 짓누른다 생각하니 왠지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아파트에 놀이터가 한두 군데 있기는 하지만 모두 모래여서 부드럽고 촉촉한 흙의 감촉에는 비할 바가 못된다. 온통 시멘트 바닥에다 빼곡빼곡 붙어있는 빌딩 숲에서 어찌 생명의 경이로움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으랴. 신기한 장난감도 오래 가지고 놀면 흥미를 잃기 마련인데, 온갖 놀이기구가 풍성해도 풀 한포기 자라지 않은 아파트 놀이터에 실증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나도 어렸을 적 흙놀이를 즐겼었다.

학교 이동이 잦았던 아버지께서 외지로 발령이 나자 어머니는 나를 사랑채에 사시는 증조할머니와 기거토록 하였다. 비행기나 차를 타는 일에 정도 이상으로 공포증을 갖고 있었던 나는 아버지 부임지로 함께 떠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지나가는 오토바이만 보아도 무슨 괴물을 보듯 무서워서 도망치곤 했을 만큼, 문명의 이기에 적응을 못했기에 할머니와 지내는 게 편케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교육열이 대단하셨던 증조할머니도 어머니 못지않게 자상한 성품이어서 부모님께서도 안심이 되셨던 것 같다.

신기한 놀이시설도, 특별한 장난감도 없었지만 나는 할머니와 지내는 게 신이 났다. 촉촉한 흙냄새가 나는 마당에 앉아 손으로 흙을 주물며 놀아도 야단치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흙이 질펀한 마당은 언제나 내 놀이터였다. 길에서 민들레를 뽑아다 흙을 일구어 심기도 하고, 신발에 흙을 담아 할머니 채마밭 고랑에 뿌리기도 하였다. 주위가 어둑해질 때까지 흙장난에 지칠 줄 모르는 나를 보고도 증조할머니는 웬일인지 화를 내지 않으셨다. 흙강아지가 되도록 실컷 놀라고 하실 뿐이었다.

생명을 키워내는 흙의 신비로움과 풍요를 온몸으로 느끼게 해주고 싶어서일까. 흙을 만지다 나뭇가지에 찔려 피가 흘러도 할머니는 그다지 놀라지 않으셨다. 할머니 손은 약손이라며 흙한줌 손으로 집어 상처 난 부위에 훌훌 뿌리는 것으로 치료를 대신하곤 했다. 사람은 흙으로 빚어졌으니 상처도 흙을 바르면 낫는다는 것이었다. 할머니의 흙치료가 비위생적으로 보여 앙타를 부리곤 했지만 할머니의 행동이 흙의 영험을 확신하고 계시는 것 같아 거부할 수도 없었다. 집안에 평안을 기원하는 제의 일종인 토신제를 지낼 때도 할머니는 흙 한줌을 그릇에 담아 뒷뜰에 뿌리곤 했었다.

아무런 조건도 없이 오랜 세월을 베풀어 주기만 한 땅, 조상이 물려준 토지에 집을 짓고 편안히 사는 게 모두 땅의 은덕이라 생각하신 듯 싶었다. 발을 딛고 다니는 땅이야말로 살 속에 깃든 영혼이고 모든 생명의 고향이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요즈음 땅을 밟고 산다는 게 하나의 사치처럼 되어가는 느낌이다. ​

하늘과 가까운 고층 아파트에 살다보니 흙을 가까이할 기회가 적어진 것이다. 가끔 이러다가는 하늘의 공간에서 땅으로 내려와 살기도 쉬운 일만은 아닌 것이다. 손바닥만 한 마당이라도 있는 주택으로 주거지를 옮기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면서도 결국 아파트의 편리함에 젖어 다시 주저앉게 되고 만다. 그래서인지 근래 들어선 마음까지도 시멘트벽을 닮아가고 있는 것 같다. 오 년 동안 한 아파트 통로에 사는 아주머니와는 엘리베이터에서 만났어도 가벼운 목례를 하는 것 정도가 고작이고 서로 왕래해 본 일이 없다. 가까운 이웃이 없다면 훈훈한 정도 느끼지 못 할 텐데 철저하게 혼자 사는 생활에 익숙해져 가고 있다.

지구의 절반 이상이 흐르는 물로 덮여 있음에도 수구라 하지 않고 지구라 칭한 것도 흙이 생명의 모태이기 때문이 아닐까. 땅과 멀어질수록 병원을 가까이 한다는 말이 있듯이 무디어진 심성을 깨우치는 건 자연과 가까이 하는 일이지 않나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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