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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불씨 / 제은숙

부흐고비 2020. 1. 4. 01:44

불씨 / 제은숙
2020년 제1회 전남매일 신춘문예 골드문학상 당선작


장작이 탄다. 불이 붙기 시작하면 확확 타오른다. 마른 나무가 몸을 뒤채며 터지고 끊어진다. 치솟을 땐 다가 갈 수도 없게 뜨거웠던 것이 잦아들면 은은한 열기와 함께 옆자리를 내어준다. 숯불은 불길을 제 속에 불러들여 스스로 발광한다. 온전히 붉은 것이 아니라 노랗거나 빨간 빛이 쉴 새 없이 꿈틀거린다. 심장이 뛰듯 두근대기도 한다. 이글거리는 불꽃을 보고 있으면 어디 먼 곳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다. 불기운이 주는 나른함 때문이리라.

어느 가을 우리 가족은 캠핑을 시작했다. 한 계절이 지나가는 동안 줄기차게 짐을 꾸렸다. 소꿉놀이하는 듯한 기분도 좋았지만 밤이 이슥하도록 화롯불 옆에 앉아 담소를 나누는 즐거움이 그만이었다. 아울러 불향이 밴 고기까지 먹으니 캠핑의 진수를 맛 본 것 같았다. 내가 불을 지핀 날이 있다. 대중없이 던져 넣었더니 불길은 날름거리며 서너 시간 만에 장작 한 꾸러미를 삼켜 버렸다. 나무가 그렇게 빨리 타는 줄 알지 못했다. 내가 어릴 적 어머니는 그 많은 땔감을 어떻게 구했을까.

나를 낳고 일주일 되던 날에도 어머니는 나무하러 갔다고 한다. 고등어잡이 배를 탔던 아버지는 집에 없었다. 나는 가끔 아이를 키우는 내 일상에 어머니를 비추어 본다. 외롭게 해산하던 날의 쓸쓸한 마당과 집안일 농사일에 하루가 빠듯했던 나날들이 겹쳐진다. 주어진 일이 형벌인 듯 당신의 의지로는 끝낼 수 없었던 삶이었다. 하지만 땔감을 구하던 모습은 떠올리지 못한다. 지금의 생활과 동떨어져 아득하고 그 시절엔 누구나 그렇게 살았던 것이라고 흘려버린다. 어머니의 삶을 이해하기엔 내 속을 흐르는 강이 너무 얕다고 자책한다.

불길을 따라 옛집 부엌에 들어선다. 겨울 저녁, 비가 내리고 있다. 눅눅해진 솔가리를 잡히는 대로 아궁이에 집어넣고 후우후우 불며 불을 살리고 있는 어머니. 연기에 기침을 해댄다. 궂은일에 가꾸지 못한 손등은 갈라져 있다. 비 오는 날은 더 빨리 추워지는 법이어서 마음이 바쁘다. 급하게 차려낸 늦은 밥상에 어린 삼남매와 어머니가 둘러앉는다. 찬밥 한 덩이에 목이 멘다. 저녁이 내려앉은 얼굴은 아침의 어머니보다 더 늙어 보인다. 어머니는 일찍 잠자리에 든다. 그것은 잠이라기보다 차라리 하루가 사그라지는 의식에 가깝다. 내일이면 다시 불씨를 살려야 한다.

언제나 땔감은 어머니 몫이었다. 삭정이나 팔뚝 굵기의 나무를 모아서 이고 왔다. 굵은 것은 못하니 산에 자주 가야 했다. 해 온 나무는 마당에 풀어놓고 손도끼로 자른다. 이 또한 어머니 일이다. 바싹 마른 솔가리는 갈퀴로 긁어 지게에 져 날랐다. 싹싹 긁는 소리가 재미있어 나도 해 본 적이 있다. 갈퀴를 만져보지 못하는 날에는 고사리손으로 한 움큼 쥐다가 솔잎 끝에 찔리기도 했다. 솔가리는 불쏘시개로 썼는데 화르르 타고는 금세 사라졌다. 나무하는 것은 고되지만 멈출 수 없는 일이었다. 아버지가 다녀가신 날에야 어머니는 땔감 걱정을 잠시 접어둔다.

어머니는 나무하러 갈 때 나를 데리고 다녔다. 내가 따라 다니기를 좋아하기도 했지만 어머니가 가자고 했던 적이 많다. 저녁답에 서둘러 한 짐 이고 올 때는 컴컴해지는 산이 무서웠다. 어슴푸레한 나무 그림자에 놀라 운 적도 있다. 어머니도 무서워했는지는 모르겠다. 일찍 결혼한 어머니는 내가 한참 클 때까지 이십대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마냥 어리고 예쁠 나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부재를 메우느라 한 번도 그 나이로 살지 못했다. 그 생각을 하니 울컥 가슴 안이 뜨거워진다.

바닷바람이 무시로 불어오는 언덕 위에 살았다. 낮은 슬레이트 지붕과 돌담이 둘러쳐진 위태로운 집이었다. 바람이 거세 잠이 오지 않는 날에는 파도에 쓸리는 몽돌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창호지를 바른 방문은 허술했으며 외풍이 심해 코가 시렸다. 그런데도 방바닥은 뜨끈했고 늘 따뜻한 물에 씻었다. 시금치를 데친 물에 세수하고 군불 넣을 때 끓인 물로 차례차례 목욕을 했다. 불길은 밤새 방고래를 지나갔고 부엌은 냇내로 훈기가 돌았다.

아궁이는 겨우내 타올랐다. 어머니는 밥을 짓고 남은 숯불에 생선을 구워 상에 올렸다. 객지에 있는 아버지의 고봉밥은 아랫목에 묻어 두었다. 부엌 한편에는 자식들 입에 들어갈 끼니만큼 땔감이 쌓인다. 밤새 방을 덥힐 온기도 쟁여 놓는다. 어머니는 하루하루 되살아나는 불씨였고 우리 삼남매의 입은 아궁이였다. 계속 채우고 지피지 않으면 식어버리는 어둠이었다. 그것을 덥히는 일은 힘들고 때로는 무서웠겠으나 어머니는 기어코 불꽃을 피워냈다.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일이 어머니 삶의 전부였던 까닭이다.

저녁 아궁이를 떠올리면 어린 시절의 맛이 따라온다. 밥을 지을 때 부뚜막에 앉아서 먹는 콩이나 누룽지는 고소했다. 아버지의 자반고등어도 숯불에 구워 먹으면 달았다. 어쩌다 아버지를 만나는 꿈은 인동 꽃향기처럼 달콤했다. 밤에는 순수한 군불만이 남는다. 어머니는 새벽에도 불씨를 다스려 어린 자식들의 잠을 빈틈없이 다독였다. 어머니가 지핀 불은 자식을 향한 사랑이 되고 남편에 대한 그리움이 되어 피어났다. 그것은 내 유년에서 가장 아름다운 불꽃이었다.

숯불이 마지막 말을 하는 듯 느리게 깜빡인다. 두근거림이 잦아들면 생을 다할 것이다. 몸을 푼 지 얼마 안 되어 산에 올랐을 어머니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진다. 어머니도 어려서 모든 것이 서툴고 힘겨웠음을 마흔이 넘어서야 깨닫는다. 철없었던 나의 이십대와 누군가의 목숨을 짊어진 어머니의 그때를 생각한다. 겨울이면 피가 났던 어머니의 손등과 따뜻했던 아랫목, 그보다 더 뜨거운 사랑을 가슴에 새긴다.

오래 전 어머니의 아궁이는 사그라졌지만 내 안에는 아직도 온기가 남아 있다. 넘겨받은 그 불씨를 감싸 안는다. 나는 지금 누구의 아랫목에 불꽃을 피우려 하는가.


[수상소감]​ - "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종일 흐리다 기어이 비가 내리던 날 당선 소식을 들었습니다. 잘못 들은 것은 아닌지 전화기를 몇 번이나 들여다보았습니다. 순간 가슴이 벅차오르다가도 멍해지기를 반복했습니다. 주위를 둘러싼 시간과 공간이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좋은 소식을 기대하며 작품을 보냈으나 덜컥 당선되고 보니 부담감에 걱정이 앞섭니다. 영광의 순간을 받아들이기까지 꽤 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수필을 배우면서 어머니 품에 안긴 것 같은 푸근함을 느꼈습니다. 삶에 지치고 조급했던 저에게 수필은 여유를 가지라고, 모든 삶에 의미가 있다고 다독여주었습니다. 다시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손놓아 버린 시간을 자책하고 있을 때 수필은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습니다. 더 작은 것과 때로는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겨울비가 내렸으니 숲 바닥이 조금 부풀어 오를 것입니다. 지난 가을 내려앉은 망개잎과 으름나무 열매껍질이 부숙될 시간입니다. 구멍이 생긴 자리에 곰팡이가 피고 푹 삭아서 한 덩어리로 뒤섞일 것입니다. 이전의 흔적은 모두 문드러져 흙과 함께 숨쉬는 법을 익히게 될 것입니다. 바닥에 내려앉은 것들이 그보다 낮은 것들을 먹여 살리고 땅속 깊이 스며들면 이른 봄 메마른 산 끝자락에 연분홍 진달래꽃 한 송이가 피어날 것입니다. 저에게 봄은 아직 멀리 있습니다. 봄을 기다리는 동안 제 삶도 곰삭기를 고대해 봅니다. 언 땅을 뚫고 나올 연한 목숨의 뿌리에 닿고 싶습니다.

어디서도 당당할 수 있도록 키워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립니다. 사랑하는 아이들과 첫 독자가 되어주는 남편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부족한 글에도 칭찬을 아끼지 않으시고 따끔한 충고도 더해주시는 수필반 선생님과 영광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끝으로 허점이 많은 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께도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항상 정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1978년 거제 출생 △경남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심사평]​ - “삶의 이야기에 빗댄 비유법 돋보여”


응모자 중에서 ‘아, 이것이 문학수필이구나!’ 말할 수 있는 작품이 나올 수 있을까. 설레는 마음으로 한 작품 한 작품 살폈다. 수필 장르의 정체성을 파악하고 쓴 작품이 나타나, 당선작을 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대부분의 수필가들은 수필은 ‘사실대로 진솔하게 쓰는 글’이라고 믿고 있다. 현대문학 이론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사실만을 기록한 것은 문학이 아닌 것을 깨닫게 된다. 문학은 생각과 느낌을 상상의 힘을 빌려 언어로 표현한 예술인 까닭이다. 문학이 상상의 힘을 빌린다는 말은 ‘허구화’와 같은 뜻으로 이해해도 좋다. 상상과 허구는 손바닥의 앞뒤처럼 한 몸이기 때문이다.

현대수필은 문학수필이어야 한다. 찰스 램적 수필을 쓰자는 말이다. 그 대표적 작법은 ‘삶의 이야기에 빗대는 비유적 작법’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본심에 올라온 네 분의 작품 중에 제은숙 님의 ‘불씨’가 단연 돋보였다. 이 분의 작품 중에는 ‘경계’도 있었으나 주제를 잘 살려낸 ‘불씨’를 제1회 당선작으로 뽑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축하를 드리며 앞으로 그 불씨를 잘 살려 수필산문의 창작적 변화에 불을 댕길 것을 기대한다.

문학수필(문학에세이)의 시대를 여는데 신춘문예 골드 문학상으로 앞장선 전남매일에 감사드리며, 당선자에게는 건필을 빈다.
/오덕렬 수필가
‘산문의 시’ 시인·평론가. 한국 산문의시 문인협회장 이사장. ‘전라방언 문학 용례사전’ 13년째 편찬 중. 광고(光高)문학관·광고(光高)문학상백일장 운영위원장. ‘방송문학상’ 수필 당선(1983), ‘한국수필’ 수필 천료(1990). ‘창작에세이’ 평론 당선(2014), ‘창작에세이’ 신인상 당선(2015). 수필집 ‘항꾸네 갑시다’(아르코창작기금 수상작품집) 외. 수필선집 ‘무등산 복수초’ 외. 평론집 ‘수필의 현대문학 이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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