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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불국사 기행 / 현진건

부흐고비 2020. 1. 6. 16:40

불국사 기행 / 현진건


7월 12일, 아침 첫 차로 경주를 떠나 불국사로 향했다. 떠날 임시에 봉황대(鳳凰臺)에 올랐건만, 잔뜩 찌푸린 일기에 짙은 안개는 나의 눈까지 흐리고 말았다. 시포(屍布)를 널어놓은 듯한 희미한 강줄기, 몽롱한(흐릿한) 무덤의 봉우리, 쓰러질 듯한 초가집 추녀가 눈물겹다. 어젯밤에 나를 부여잡고 울던 옛 서울은 오늘 아침에도 눈물을 거두지 않은 듯. 그렇지 않아도 구슬픈 내 가슴(객수)이어든 심란한 이 정경에 어찌 견디랴? 지금 떠나면 1년, 10년, 혹은 20년 후에나 다시 만날지 말지! 기약 없는 이 작별을 앞두고 눈물에 젖은 임의 얼굴! 내 옷소매가 촉촉이 젖음은 안개가 녹아내린 탓만은 아니리라.

장난감 기차는 반시간이 못 되어 불국사역까지 실어다 주고, 역에서 등대(等待)(기다고 있음)했던 자동차는 십릿길을 단숨에 껑청껑청 뛰어서 불국사에 대었다. 뒤로 토함산(吐含山)을 등지고 왼편으로 울창한 송림을 끌며 앞으로 광활한 평야를 내다보는 절의 위치부터 풍수쟁이 아닌 나의 눈에도 벌써 범상치 아니했다. 더구나 돌 층층대를 쳐다볼 때에 그 굉장한 규모와 섬세한 솜씨에 눈이 어렸다.

초창 당시엔 낭떠러지로 있던 곳을 돌로 쌓아올리고, 그리고 이 돌 층층대를 지었음이리라. 동쪽과 서쪽으로 갈리어 위아래로 각각 둘씩이니 전부는 네 개인데, 한 개의 층층대가 대개 열일곱 여덟 계단이요, 길이는 오십칠팔 척(尺)으로 양 가에 놓인 것과 가운데에 뻗친 놈은 돌 한 개로 되었으니, 얼마나 끔찍한 인력을 들인 것인가를 짐작할 것이요, 오늘날 돌로 지은 대건축물에도 이렇듯이 대패로 민 듯한 돌은 못 보았다하면, 얼마나 그 때 사람이 돌을 곱게 다루었는가를 깨달을 것이다.

돌 층층대의 이름은, 동쪽 아래의 것은 청운교(靑雲橋), 위의 것은 백운교(白雲橋)요, 서쪽 아래의 것은 연화교(蓮花橋), 위의 것은 칠보교(七寶橋)라 한다. 층층대라 하였지만, 아래와 위가 연락되는 곳마다 요새말로 네모난 발코니가 되고 그 밑은 아치가 되었는데, 인도자의 설명을 들으면 옛날에는 오늘날의 잔디밭 자리에 깊은 연못을 팠고, 아치 밑은 맑은 물이 흐르며 그림배(畵船)(예전 기생이 배 떠나는 정경을 표현하는, 선유락 춤을 출 때 사용하던 배)가 드나들었다 하니, 돌 층층대를 다리라 한 옛 이름의 유래를 터득할 것이다. 층층대 상하에는 손잡이 돌이 우뚝우뚝 서고 쇠사슬인지 은사슬인지 둘러 꿴 흔적이 아직도 남았다. 귀인이 이 절을 찾을 때엔 저 편 못가에 내려 그림배를 타고 들어와 다시 보교(步喬)(정자모양의 지붕을 한 가마)를 타고 이 돌 층층대를 지나 절 안으로 들어가기도 하였단다. 너른 못에 연꽃이 말발한데 다리 밑으로 돌아드는 맑은 흐름엔 으리으리한 누각(樓閣)과 석불의 그림자가 용의 모양을 그리고 그 위로 소리 없이 떠나가는 그림배! 나는 당년의 광경을 머릿속에 그리며 스스로 황홀하였다. 활동사진에서 본 물의 도시 베니스의 달빛 긴 바닷가에 그림배를 저어 가는 청춘 남녀의 광경을 선하게 나타난다.

이 돌 층층대를 거치어 문루(門樓)를 지나서니, 유명한 다보탑(多寶塔)과 석가탑(釋迦塔)이 눈앞에 나타난다. 이 두 탑은 물론 돌로 된 것이다. 그렇다! 그것은 만져 보아도 돌이요, 두들겨 돌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석가탑은 오히려 그만둘지라도 다보탑이 돌로 되었다는 것은 아무리 하여도 눈을 의심치 않을 수 없었다. 연한 나무가 아니요, 물씬물씬한(물렁물렁한) 밀가루 반죽이 아니고, 육중하고 단단한 돌을 가지고 저다지도 곱고 어여쁘고 의젓하고 아름답고 빼어나고 공교롭게 잔손질을 할 수 있으랴. 만일, 그 탑을 만든 원료가 정말 돌이라면, 신라 사람은 돌을 돌같이 쓰지 않고 마치 콩고물이나 팥고물처럼 마음대로 뜻대로 손가락 끝에 휘젓고 주무르고 하는 신통력을 가졌던 것이다. 귀신조차 놀래고 울리는 재주란 것은 이런 솜씨를 두고 이름이리라.

탑의 네 면엔 자그마한 어여쁜 층층대가 있고, 그 층층대를 올라서니 가운데는 위층을 떠받치는 중심 기둥이 있고, 네 귀에도 병풍을 겹쳐 놓은 듯한 돌기둥이 또한 섰는데, 그 기둥과 두 층대의 석반(石盤)을 받은 어름에는 나무로도 오히려 깎아 내기가 어려울 만한 소로(小爐)(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에 끼우는 네모난 돌 받침대)가 튼튼하게 아름답게 손바닥을 벌리었다. 지붕 위에 이중의 네모난 돌난간이 둘러 쟁반 같은 이층 지붕을 받들었고, 그 위엔 8모난 돌난간과 세상에도 진기한 꽃잎 모양을 수놓은 듯한 돌쟁반이 탑의 8모 난간을 받들었다. 석공이 기절했던 것을 물론이거니와, 이런 기상천외의 의장(意匠)(겉모양을 아름답게 하기 위하여 장식하는 고안)은 또 어디서 온 것인고! 바람과 비에 시달린 지 천여 년을 지낸 오늘날에도 조금도 기울어지지 않고, 이지러지지 않고, 옛 모양이 변하지 않았으니, 당대의 건축술 또한 놀랄 것이 아니냐!

들으매 이 탑의 네 귀에는 돌사자가 있었는데, 두 마리는 동경 모 요리점의 손에 들어갔다 하나, 숨기고 내어놓지 않아 사실 진상을 알 길이 없고, 한 마리는 지금 영국 런던에 있는데 다시 찾아오려면 5백만 원을 주어야 내어 놓겠다 한다던가? 소중한 물건을 소중한 줄도 모르고 함부로 굴리며, 어느 틈에 도둑을 맞았는지도 모르니, 이런 기막힐 일이 또 있느냐? 이 탑을 이룩하고 그 사자를 새긴 이의 영(靈)이 만일 있다 하면 지하에서 목을 놓아 울 것이다.

석가탑은 다보탑 서쪽에 있는데, 다보탑의 혼란한 잔손질과는 딴판으로, 수법이 매우 간결하나마 또한 정중한 자태를 잃지 않았다. 다보탑을 능라와 주옥으로 꾸밀 대로 꾸민 성장 미인(盛裝美人)(진한 화장을 한 미인)에 견준다면, 석가탑은 수수하게 차린 담장 미인(淡粧美人)(소박한 화장을 한 미인)이라 할까? 높이 27척, 층은 역시 3층으로 한 층마다 수려한 돌병풍을 두르고, 병풍 네 귀에 병풍과 한데 어울러 놓은 기둥이 있는데, 설명자의 말을 들으면 이 탑은 한 층마다 돌 하나로 되었다 하니, 그 웅장하고 거창한 규모에 놀랄 만하다.

제35대 경덕왕(景德王) 시절, 당시 재상 김대성(金大城)은 왕의 명을 받들어 토함산 아래에 불국사를 이룩할세, 나라의 힘을 기울이고 천하의 명공(名工)을 모아들였는데, 그 명공 가운데는 멀리 당나라로부터 불러 내 온 젊은 석수 한 명이 있었다. 이 절의 중심으로 말하면 두 개의 석탑으로, 이 두 탑의 역사(役事)가 가장 거창하고 까다로웠던 것은 물론이다. 젊은 당나라 석수는 그 두 탑 중의 하나인 석가탑을 맡아 짓기로 되었다. 예술의 감격에 뛰는 젊은 가슴의 피는, 수륙 수천 리 고국에 남기어 두고 온 사랑하는 아내도 잊어버리고, 오직 맡은 석가탑을 완성하기에 끓고 말았다. 침식도 잊고, 세월 가는 것도 잊어버리고, 그는 온 마음을 오직 이 역사(役事)에 바치었다.

덧없는 세월은 어느덧 몇 해가 흘러가고 흘러왔다. 수만 리 타국에 남편을 보내고 외로이 공규(空閨)(남편 없는 텅빈 방)를 지키던 그의 아내 아사녀(阿斯女)는 동으로 흐르는 구름에 안타까운 회포를 붙이다 못 하여 필경 남편을 찾아 신라로 건너오게 되었다. 머나먼 길에 피곤한 다리를 끌고 불국사 문 앞까지 찾아왔으나, 큰 공역(工役)을 마치기도 전이요, 더러운 여인의 몸으로 신성한 절 문 안에 들어서지 못한다 하여 차디찬 거절을 당하고 말았다. 절 문을 지키던 사람도 거절을 하기는 하였으되, 그 정상에 동정하였음이리라. 아사녀에게 이르기를, "여기서 얼마 아니 가면 큰 못이 있는데, 그 맑은 물속에는 시방 짓는 절의 그림자가 뚜렷이 비칠지니, 그대 남편이 맡아 짓는 석가탑의 그림자도 응당 거기 비치리라. 그림자를 보아 역사가 끝나거든 다시 찾아오라." 하였다.

아사녀는 그 말대로 그 못가에 가서 전심전력으로 비치는 절 모양을 들여다보며 하루바삐, 아니 한시바삐 석가탑의 그림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었다. 달빛에 흐르는 구름 조각에도 그는 몇 번이나 석가탑의 그림자로 속았으랴.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일 년 이태, 지루하고도 조마조마한 찰나 찰나를 지내는 동안 절 모양이 뚜렷이 비치고, 다보탑이 비치고, 가고 오는 사람의 그림자도 비치건마는, 오직 자기 남편이 맡은 석가탑의 그림자는 찾으려야 찾을 길이 없었다. 사랑하는 아내가 멀리멀리 찾아왔다는 소식을 뒤늦게야 들은 당나라 석수는, 밤을 낮에 이어 마침내 역사를 마치고 창황히(매우 급하게) 못가로 뛰어왔건마는, 아내의 양자(樣姿)(모습, 자태)는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일, 아무리 못 속을 들여다보아도 석가탑의 그림자는 끝끝내 나타나지 않는 데 실망한 그의 아내는 남편의 이름을 부르며 그만 못 가운데에 몸을 던진 까닭이다. 그는 망연히 물속을 바라보며 몇 번이나 아내의 이름을 불렀으랴. 그러나 찰랑찰랑하는 물소리만 귓가를 스칠 뿐,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거나 이슬이 내리는 새벽, 달빛 솟는 저녁에도 그는 못가를 돌고 또 돌며 사랑하는 아내를 그리며 찾았다. 오늘도 못가를 돌 때에 그는 문득 못 옆 물가에 사람의 그림자가 아련히 나타났다.

"아, 저기 있구나!"

하며 그는 이 그림자를 향해 뛰어들었다. 그러나 벌린 그의 팔 안에 안긴 것은 아내가 아니요, 사람이 아니요, 사람만한 바위덩이다. 그는 바위를 잡은 찰나에 문득 제 눈앞에 나타난 아내의 모양을 길이길이 잊지 않으려고 그 바위를 새기기 시작하였다. 제 환상(幻想)에 떠오른 사랑하는 아내의 모양은 다시금 거룩한 부처님의 모양으로 변하였다. 그는 제 예술로 죽은 아내를 살리고 아울러 부처님에까지 천도(薦度)하려 한 것이다. 이 조각이 완성되면서 자기 역시 못 가운데에 몸을 던져 아내의 뒤를 따랐다.

불국사 남서방에 영지(影池)란 못이 있으니, 여기가 곧 아사녀와 당나라 석수가 빠져 죽은 데다. 내가 찾을 때엔 장마가 막 그친 뒤라 누런 물결이 산기슭의 소나무 가지에까지 넘실거리는데, 부처님을 새긴 천연의 돌은 지난날의 애화(哀話)를 다시금 일러 주는 듯, 그 새김의 선이 자못 섬세한 것은 부처님을 새기면서도 알뜰한 자기 아내의 환영이 머리를 지배한 탓인가?

다보탑과 석가탑에 무한한 감탄과 감개를 마지않다가 대웅전(大雄殿)을 들여다보니 정면에 엄연히 선 삼위불(三位佛)의 입상(立像)이 보통 부처님보다는 어마어마하게 크다마는, 당시의 유물은 아니고 영묘조(英廟朝)(1765년 영조 41)때 개축할 때에 만들어 놓은 것이라 하며, 다만 경탄할 것은 개축할 때에 천장과 벽에 올린 휘황찬란한 단청이 3백여 년을 지난 오늘날에도 조금도 빛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무슨 물감을 어떻게 풀어서 썼는지 채색 학자의 연구 문제이리라.

앞길이 바쁘매 아침도 굶은 채로 석굴암(石窟庵)을 향해 또다시 걸음을 옮기었다. 여기서 십 리 안팎이라니 그리 멀지 않되, 가는 길이 토함산을 굽이굽이 돌아 오르는 잿길이요, 날은 흐리어 빗발까지 오락가락하건마는, 이따금 모닥불을 담아 붓는 듯 하는 햇발이 구름을 뚫고 얼굴을 내어미는 바람에 두어 모퉁이도 못 접어들어 나는 벌써 숨이 차고 전신에 땀이 흐른다.

창울한 송림은 볼 수 없건마는, 우거진 잡목 사이에 다람쥐가 넘나드는 것도 또한 버리지 못할 정취이다. 거친 상봉을 다 올라와서 동해 가에 다가앉은 치술령(#述嶺)을 손가락질할 때에 장렬하던 박제상(朴堤上)의 의기가 다시금 가슴을 친다. 저 치술령이야말로 박제상의 아내가 남편을 보내며 울던 곳이다. 단신 홀몸으로 적국에 들어가는 남편을 부르고 또 불렀지만, 박제상은 다만 손을 저어 보이고 의연(毅然)히 동해에 배를 띄웠다. 물과 하늘이 한데 어우러진 곳에 남편의 탄 배가 가물가물 사라질 때에 그의 안타까운 마음은 어떠하였으리! 피눈물로 울고 울다가 그만 자빠지고 말았다. 거기에는 지금도 그 부인의 망부석(望夫石)이 그대로 남아 있어 행인의 발길을 멈춘다 하거니와, 천추에 빛나는 의기를 남기고 왜국 기시마(木島)에서 연기로 사라진 박제상의 의혼의백(義魂毅魄)(정의롭고 굳세고 단단한 정신)은 지금 어디서 헤매는고?

끓는 물도 차다시고 모진 매도 달다시네.
살을 찝는 쇠가락도 헌 새끼만 여기시네.
비수(匕首)가 살을 오려도 태연자약하시다.

온몸에 불이 붙어 지글지글 타오르되,
웃음 띤 환한 얼굴 봄바람이 넘노는 듯,
이 몸이 연기 되거든 고국으로 날아라.

동해에 배 뜨나니 가신 임을 어이하리.
속절없는 피눈물에 잦아지니 목숨이라
사후에 넋이 곧 있으면 임의 뒤를 따르리라.

치술재 빼어난 봉을 묻어 넘은 이 빗발아
열녀(烈女)의 남은 한을 이제도 실었느냐
나그네 소매 젖으니 눈물인가 하노라.

숨이 턱에 닿고 온 몸이 땀에 멱을 감는 한 시간 남짓의 길을 허비하여 나는 겨우 석굴암 앞에 섰다. 멀리 오는 순례자를 위하여 미리 준비해 놓은 듯한 석간수는 얼마나 달고 시원한지! 연거푸 두 구기를 들이켜매 피로도 잊고 더위도 잊고 상쾌한 맑은 기운이 심신을 엄습하여 표연히 티끌세상을 떠난 듯도 싶다. 돌층대를 올라서니 들어가는 좌우 돌 벽에 새긴 인왕과 사천왕이 흡뜬 눈과 부르걷은 팔뚝으로 나를 위협한다. 어깨는 엄청나게 벌어지고 배는 훌쭉하고 사지는 울퉁불퉁한 세찬 근육! 나는 힘의 예술의 표본을 본 듯하였다.

한번 문 안으로 들어서매 석련대(石連臺) 위에 올라앉으신 석가의 석상은 그 의젓하고도 봄바람이 도는 듯한 화한 얼굴로 저절로 보는 이의 불심을 불러일으킨다. 한군데 빈 곳 없고 빠진 데 없고 어디까지 원만하고 수려한 얼굴, 알맞게 벌어진 어째, 슬며시 내민 가슴, 퉁퉁하고도 점잖은 두 팔의 곡선미, 장중한 그 모양은 천추에 빼어난 걸작이라 하겠다.

좌우 석벽의 허리는 열 다섯간으로 구분되었고, 각 간마다 보살과 나한(羅漢)의 입상을 병풍처럼 새겼는데 그 모양은 다 각기 달라 혹은 어여쁘고 혹은 엉성궂고 늠름한 기상과 온화한 자태는 참으로 성격까지 빈틈없이 표현하였으니 신품(神品)이란 말은 이런 예술을 두고 이름이리라. 더구나 뒤 벽 중앙에 새긴 11면 관음보살은 더할 나위 없는 여성미(女性美)와 육체미(肉體美)까지 나타내었다. 어디까지 아름답고 의젓한 얼굴판은 그만두더라도 곱고도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드리운 왼편 팔, 엄지와 장지 사이로 살며시 구슬 줄을 들었는데 그 어여쁜 손가락이 곰실곰실 움직이는 듯. 병을 치키어 쥔 포동포동한 오른팔뚝! 종교 예술품으로 이렇게 곡선미를, 여성미를 영설스럽게도 나타낼 수 있으랴. 그나 그뿐인가. 수없이 늘인 구슬 밑에 하늘하늘하는 옷자락은 서양 여자의 야회복을 생각나게 한다. 그 아른아른한 옷자락 밑으로 알맞게 볼록한 젖가슴, 좁은 듯하면서도 슬밋한 허리를 대어 둥그스름하게 떠오른 허벅지, 토실토실한 종아리가 뚜렷이 드러났다. 그는 살아 움직인다! 그의 몸엔 분명히 맥이 뛰고 피가 흐른다. 지금이라도 선뜻 벽을 떠나 지그시 감은 눈을 뜨고 방그레 웃을 듯.

고금의 예술품을 얼마쯤 더듬어 보았지만 이 묵묵한 돌부처처럼 나에게 감흥을 주고 법열(法悅)을 자아낸 것은 드물었다. 나는 마치 일생을 두고 그리고 그리던 고운 님(보살님이시여! 그릇된 말씨의 모독(冒瀆)을 용서하사이다. 보살님이 내 가슴에 붙여 주신 맑은 불길은 이런 모독쯤은 태우고야 말았습니다.)을 만난 것처럼 나는 그 팔뚝을 만지고 손을 쓰다듬고 가슴을 어루만지며 어린 듯 취한 듯 언제까지고 차마 발길을 돌릴 수가 없었다.

벽 위에는 둘러가며 좌우 각각 다섯 곳에 불좌(佛座)를 만들었고, 왼편엔 네 분 보살님 오른편엔 두 분 보살님과 지장보살(地藏菩薩)과 유마거사(維摩居士)의 좌상(座像)을 모시었는데 그 솜씨도 또한 심상치 않았다.

석굴암의 옛 이름은 석불사(石佛寺)로 신라 경덕왕 때에 이룩한 절이라 한다. 석굴암이라 함은 곧 돌을 파내어 절을 지은 것이며 부처님을 새기고 모신 것도 모두 돌이요, 땅바닥도 돌이요, 천장도 물론 돌이다. 굴의 구조는 동남으로 향하여 평면 원형(平面圓形)으로 좌우 직경이 22척(尺) 6촌(寸), 앞뒤 직경이 11척 7촌 2푼(分), 들어가는데 너비 11척 1촌 5푼, 옆 벽의 두께 약 9척이라 한다. 1천 여 년의 바람과 비에 귀중한 옛 솜씨가 더러 이지러지고 무너진 것은 아깝기 한량없지마는 15년 전에 크게 수리한 탓으로 도리어 옛 것과 이제 것을 분간하기 어렵게 된 것은 더욱 한할 노릇이다.

그러나 앞문은 지금 손질이 많았지만 정작 굴속은 별로 수선한 것이 없고 아직도 옛 윤곽이 뚜렷이 남았음은 불행 중 다행이라 할까. 그 안에 모신 부처님, 관세음보살, 나한님네들의 좌상과 입상이 어느 것 하나 세상에 뛰어나는 신품이 아님이 없다는 것은 좀 된 붓 끝이 적이 끄적거린 바로되, 석가님이 올라앉으신 돌연대도 훌륭하거니와 더구나 천장의 장치에 이르러서는 정말 찬란하다 할 밖에 없다. 하늘 모양으로 궁륭상(穹窿狀)을 지었고, 그 복판에 탐스러운 연꽃 모양을 떠 놓은 것은 또 얼마나 그 의장이 빼어나고 솜씨가 능란한가. 온전히 돌이란 한 가지의 원료로 이렇도록 공교하고 굉걸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을 낳아 낸 것은 모르면 몰라도 동양, 서양의 건축사에 가장 영광스러운 한 장을 점령할 것이다.

굴 문을 나서니 밖에는 선경(仙境)이 또한 나를 기다린다. 훤하게 터진 눈 아래 어여쁜 파란 산들이 띠엄띠엄 둘레둘레 머리를 조아리고 그 사이사이로 흰 물줄기가 구비구비 골안개에 싸이었는데 하늘 끝 한 자락이, 꿈결 같은 푸른빛을 드러낸 어름이 동해 바다라 한다. 오늘같이 흐리지 않은 날이면 동해 바다의 푸른 물결이 공중에 달린 듯이 떠 보이고 그 위를 지나가는 큰 돛까지 나비의 날개처럼 곰실곰실 움직인다 한다. 더구나 이 모든 것을 배경으로 아침 햇발이 둥실둥실 동해를 떠나오는 광경은 정말 선경 중에도 선경이라 하나 화식 먹는 나 같은 속인엔 그런 선연(仙緣)이 있을 턱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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