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수필 읽기

외줄 / 권혜민

부흐고비 2020. 2. 9. 18:24

외줄 / 권혜민
제23회 신라문학대상


줄을 움켜쥔 손이 바르르 떨린다. 팽팽하게 긴장하던 줄이 무엇에 걸린 듯 크게 한번 출렁한다. 허공에 발을 헛디딘 것처럼 현기증이 인다. 무슨 변고일까. 잡은 줄을 놓고 내려다볼 수도, 소리를 질러볼 수도 없어 나는 무릎이 꺽여 푹 쓰러진다. 얼마나 지났을까.

"고를 다시 매야겠어."

얼굴이 빨개진 남편이 등 뒤에 서 있다. 줄이 흔들리며 느슨해져서 아래로 추락한 게 아닐까? 심장이 멎는 줄 알았는데 내 앞에 선 그는 애써 태연한 척한다. 휘청대는 줄을 타고 어떻게 올라왔는지 물어볼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여기는 오층 건물 옥상이다. 남편은 삼층 창에 매달려 간판수리 공사를 한다. 옥상 기둥에 묶여 있는 줄을 지켜보는 게 내 임무지만 고가 잘못되거나 줄이 끊어진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걱정되어 그냥 지켜만 볼뿐이다. 외줄 하나에 생명을 묶고 하는 일이다. 그 줄이 삐끗 흔들려서 아래로 추악할 위기였으나 간신히 벽을 타고 거미처럼 기어오르며 그는 얼마나 무서웠을까.

혼이 빠진 듯 멍하니 입을 다물지 못하고 쳐다보는 내게 그는 이런 공사를 하다 보면 이까짓 것은 아무것도 아니니 걱정하지 말란다. 나를 위로하느라 남편은 그렇게 말했지만 불과 몇 초 사이에 생사를 오가는 충격에 목소리는 아직 떨고 있다. 다시 웅크리고 앉아 잘못된 고를 단단히 옭아매는 그의 목덜미에 땀이 번질거리고 부스스한 머리칼이 가늘게 흔들린다.

건물 아래를 내려다보니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어디론가 고물고물 바삐들 오가고 있다. 그들은 두 발을 땅에 딛고 잘 사는데, 우리의 삶은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왈칵 쏟아지는 눈물을 감당할 수 없어 남편에게 들킬세라 비상계단으로 몸을 숨긴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다시 옥상에 올라오니 죽을 고비를 넘긴 그가 허공을 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다. 푸우! 두려움을 날려버리는 듯 크게 내뿜는 한숨 속에 흩어지는 뽀얀 연기가 쓸쓸하다.

제발 오늘은 그만 하자고 말리고 싶지만 그래도 소용이 없다는 걸 그도 나도 너무 잘 안다. 간판은 가게의 생명이다. 시간을 다투는 공사기에 잠시라도 지체할 수 없다. 간판 일을 하면서 이런 고비를 이겨내지 못하면 낙오할 수밖에 없다. 위험을 무릅쓰고 일을 계속 해야 하는 그가 너무 가엽다. 도와줄 수도 없는 처지에 걱정까지 덤으로 보탤 수도 없어 목구멍까지 밀고 나오는 말을 꿀꺽 삼키고 만다. 그는 다시 고를 이리저리 흔들어보더니 거미처럼 허리에 줄을 감고 천천히 삼층으로 내려간다.

시계 도매업을 하던 남편은 중국에서 밀려오는 값싼 시계에 치이고, 느닷없이 닥친 국가 부도로 거래처가 줄도산하고 보니 졸지에 빈털터리가 되었다. 취직조차 막막할 때 동업을 하자는 후배의 말만 듣고 시작한 것이 간판 일이었다. 동업은 오래가지 못했다. 빚만 안은 채 후배와 헤어지고 좌충우돌 홀로서기를 하는 중이다. 이거라도 당장 손을 놓으면 우리 가족은 생계가 막막하였다.

간판 일에서 고는 이음매 역할이다. 공중에서 하는 일이기에 줄과 앉음판을 잇는 고는 생명줄이 된다. 또한, 간판을 달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고가 시원찮아 떨어지기라도 하면 큰 사고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부부사이도 마찬가지이다. 빌딩에 매달리기 위해 받침대와 줄이 하나가 되게 고를 만들듯이 결혼도 보이지 않게 연결하는 고가 있다. 그것을 사람들은 흔히 사랑이라지만 막연한 사랑보다 서로 굳건한 믿음이 고의 원천이다. 빈틈없이 묶어놓은 고도 이유 없이 풀어질 때가 있다. 부부도 결코 방심할 수가 없다. 일상에서 부딪치는 사소한 오해와 갈등으로 백년가약을 하고 자식을 둔 부부들도 이혼하는 것이 다반사이다.

스물여섯 살에 한 첫 결혼은 아이를 생산하지 못한 것이 원인이 되어 이혼했다. 지금 남편과는 재혼이다. 전처소생의 아들이 둘 있으니 나는 남편보다 그 자식들을 얻는다는 기쁨이 더 컸다. 자식을 낳기 위해 배 아파 본 적은 없지만 "엄마' 하고 불러주는 자식의 목소리는 하늘이 주신 복이다.

결혼 초기에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많은 애로가 있었다. 이 모든 고통을 가족에 대한 사랑과 성실성으로 버티어낸 우직한 남편은 이제 업계에서 인정해 주는 유능한 간판장이다. 그가 며칠 전, 술에 불콰해진 얼굴로 말했다.

"그때 생각하면 지금도 오금이 저리네. 사실 한발만 더 내려갔어도 나는 영락없이 추락하고 말았을 거야. 당신 놀랄까 봐 내색을 안 했으니 잘 몰랐지?"

남편의 말을 들으면서 정말 몰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척을 했지만 어찌 그때의 가슴 철렁했던 일을 모르겠는가. 그날을 생각하면 지금도 심장이 오그라든다. 그는 재혼해서 고생만 죽어라 시키는데 행여 잘못되어 험한 꼴을 보일까 봐 그것이 더 마음 아팠다고 한다.

그 일 이후, 오랫동안 우리는 아침마다 실랑이를 했다. 그는 나의 현장 출입을 한사코 막았고, 나는 위험한 삶의 전쟁터에 차마 혼자 보낼 수가 없어 몰래 살금살금 따라갔다가 그를 속상하게 했다. 날마다 삶의 벼랑 끝에 매달려 외롭게 가족을 지키려는 그가 짠하고, 고맙고, 자랑스럽다.

비가 잦거나 태양이 이글대는 요즘 같은 여름은 공사가 더욱 힘들고 위험하다. 오늘따라 남편의 코 고는 소리가 고단해 보인다. 새우처럼 웅크리고 잠든 남자의 등이 외로워 보인다. 곁에 누워 두 팔을 벌려 그를 감싸 안고 손을 잡는다. 풀리지 않게 깍지를 끼며 동그랗게 고리를 만들어본다.

네 개의 팔이 얽혀 고가 되었다. 우리는 서로 말로서 사랑을 표현하는 데는 서툴지만 한 줄에 매달린 가족이다. 마주잡은 손에 갑자기 힘이 실리면서 그의 등에 식은땀이 흐른다. 날마다 사는 일이 전쟁이고 긴장의 연속이니 꿈속에서도 우리 세 식구를 등에 업고 외줄을 타고 있는 모양이다. 안타깝다. 제발 꿈에서만은 흔들리는 줄에서 내려와 땅 위에 두 발로 섰으면 좋겠다. 땀을 닦아주고 이불깃을 여미면서 남편에게 나지막이 속삭인다.

"여보! 사랑해"

'수필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감은사지에 핀 사랑 / 전미경  (0) 2020.02.09
내 생의 은밀한 파수꾼 / 최영애  (0) 2020.02.09
인생시계 / 김제숙   (0) 2020.02.09
메주각시 / 박헌규  (0) 2020.02.09
갈목비 / 전영임  (0) 2020.02.09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