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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의 은밀한 파수꾼 / 최영애
제22회 신라문학대상


세상의 모든 존재는 고유한 형태나 소리로 자신을 드러낸다.

새벽은 어둠의 커튼을 올리며 서서히 다가오고, 시간의 전령을 마다 않던 닭도 붉은벼슬을 세우고 새벽을 향해 목청을 높이며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그러나 존재감이 없는 것들은 숨어 소리를 키운다. 유년의 내 옷 속에서도 그것은 필수적이었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내밀한 위치에 숨어 자기의 기능을 다한다. 산소방울로 올라오는 투명한 기포처럼 빛나다 사라지는 기억의 그물 안에서 건져내는 은빛 갈치의 눈알처럼 동그랗게 빛나던 존재.

'꽃마리'처럼 작은 그 존재의 언어. 그것은 마치 ‘똑’, 한 발짝 딛고 기우뚱하다가 내딛는 첫 돌박이의 서툰 한 박자의 걸음처럼, 한 템포 쉬고 잠시 머뭇거리다 ‘딱’으로 되돌아온다. 그 소리는 아주 작지만 여물게 들린다. 채우고 풀며 자신들을 알리는 유일한 존재의 울림.

똑딱단추는 언제나 한 쌍으로 있어야만 존재의 이유가 빛난다. 그것들은 어느 한쪽이 없으면 의미를 잃는다. 이미 그들은 누구를 선택할 권리가 주어지지 않는다. 반드시 ‘똑딱이’여만 한다는 불문율. 그들만의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질서이자 그것은 은밀하고도 확고한 본령이었으리라. 금실지락琴瑟之樂, 그들은 문자 그대로 찰떡궁합인가보다. 그 무엇보다도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음양의 이치처럼 각자의 몫을 하도록 조물주에게 역할을 부여 받은 것일까.

그들이 포개지거나 입을 맞추면 ‘똑’하고 영원히 붙어있을 것처럼 은밀하고도 찰진 소리를 낸다. 사랑의 밀어였을 그 존재의 속삭임, 어떤 합일의 상징어가 이러했을까. 스스로는 서로를 밀어낼 수 없고 반드시 타자에 의해서만 헤어질 수 있는 운명. 헤어질 땐 영근 밤처럼 '딱' 벌어져 내는 소리는 가출 소녀의 발자국처럼 왠지 불안을 내포하는 소리처럼 들리기도 한다.

빛바랜 기억을 잇는 회랑 속에 그것들은 별빛처럼 가물가물 은한의 띠를 잇는다. 바느질하는 엄마 옆에서 명주실에 알록달록한 단추를 쭉 꿰어 목에 대면 브이 라인 목걸이가 되고, 손목에 감으면 물방울처럼 송알송알 팔찌가 되었다. 두 손으로 실을 잡고 돌리면 똑딱이들은 그중에서도 제일 빛났다. 한쪽 귀를 붙잡힌 채 방울처럼 매달려 줄넘기를 하듯 한 방향으로 돌고 돌며, 단추들의 윤무로 놀이는 끝이 났다.

아마, 그것과 나의 최초의 만남은 배내옷이었을 것이다. 배 위에 나직이 엎드려 가만히 귀를 기울이던 순간, 젖내 향긋한 냄새와 함께 들숨과 날숨에 고요히 일던 보송한 솜털의 들락거림. 요플레의 조용한 발효처럼 조용한 정적이었다. 보푸라기 같이 일던 숨소리를 듣던 그 순간부터 호기심과 충동의 세상탐구가 시작된 것은 아니었는지. 걸음마를 시작하고 초등학교를 거쳐 여학생이 되었을 때, 교복의 가슴 앞가리개와 함께 수줍은 발육을 지켜보기까지 누릴 수 있는 똑딱이 만의 특권이었으리라. 빵집에서의 미팅도 함께 한 동행자, 그것은 저울 눈금을 재는 심장소리와 마음자리를 제일 먼저 지켜본 은밀한 존재였다. 이스트를 넣어 한껏 부푼 흰 찐빵 같이 소복이 부풀어 오른 가슴은 곧 사춘기 소녀들의 자존심이라는 것을 제일 먼저 눈치 챈 그 유일한 목격자로, 똑딱이와 함께 앓았을 그 지독한 성장통은 청춘의 효소였을까.

말할 수 없는 비밀이 하나씩 늘어갈수록 가슴도 벅차오르고, 단추가 은근히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른 한 가시내에게 똑딱이 소리는 경계의 일성이었다. 그 단단한 흡착으로 보여주던 훈육은 그들이 떨어지지 않는 한, 그 애의 한 바가지의 웃음과 가슴도 더이상은 헤퍼지지 않았으리 라.

어느 날 숙녀가 되어 의상실에서 만난 플라스틱 똑딱이는 안개꽃만큼 작아졌다. 흰 색과 연한 파스텔 톤으로 안개꽃처럼 가녀린 모습으로 바느질 하는 실 위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그들의 원형은 본래 금속이었으나 세월 따라 한껏 가벼워진 모습으로 밀착되어 있다. 정장 속에서 속 여밈 장치로 유지되고 싶은 은밀한 욕망은 그들을 더욱 작아지게 만든 것일까.

소녀에서 숙녀로, 아니 나와 함께 성숙해 갔던 존재.

겉에서 화려한 메인 단추의 보조 역할로 여전히 내밀한 위치를 지키지만 자신들의 공간만은 상층부를 지향 하나보다. 그들은 하의보다는 상의에서 자존심만은 굳건히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 고고한 자존심만은 지켜주고 밀폐의 공간에서 살도록 허락해주마 무언의 약속을 한 것일까. 그리하여 크고 화려한 단추들이 누릴 수 없는 지위를 한껏 누리고 있으니, 고로 뭇 여성들의 향수 냄새만큼은 제일 먼저 선점하였으리라.

그러나 여성의 옷 안에서만 존재한 것은 아니었다. 땡땡이 치는 남학생을 따라간 도시락 위에서의 따뜻한 잠, 손수건 대신 등장한 세련된 주머니는 또 다른 그들이 머무는 새로운 공간이다. 까까머리 주인이 도시락을 풀면 잠시 짝과 헤어지는 단 삼십 분의 여유도 즐거웠을 것이다.

길흉화복을 함께 지켜보던 그들에게도 고난은 있었을 터, 개구진 꼬맹이들의 털실 스웨터 안에서는 언제 떨어져 나갈지 몰라 콩처럼 졸이는 가슴은 또 얼마나 작아졌던가. 패싸움에 끼면 꼭 폼부터 잡아 가슴부터 여는 사내아이들의 객기를 지켜본 청춘의 산 증인이기도 한 그것. 강제로 풀어헤쳐진 옷 위에서 가는 실에 매달려 위기의 순간을 넘긴 아슬아슬한 곡예의 현장. 그 격전장은 똑딱이 들에게는 이별의 정거장이 되기도 했다.

그러다 이산이 되면 잃어버린 제 짝 찾기는 쉽지 않았으리. 풀 섶에서 녹슬어 가거나 도로에서 뒹굴다 압사되기가 일쑤였던 그들의 횡사. 짝을 잃은 다른 똑딱이와 재혼하기도 한다. 아님 잃어버린 연인을 기다리거나 홀아비나 청상과부가 되어 늙어가기도 하고, 어린아이들의 장난감으로 전락하기도 하는 팔자인 그들의 운명. 해리된 똑딱이는 소소막막蕭蕭寞寞 가엾은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이 사소한 것들에게 운명을 논한다는 일이 가당한 걸까. 그러나 소소한 것들조차 혼이 있고 주어진 운명이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경이로운 세상의 이치인가.

그러나 이 소소한 것들은 옷 속에서 더욱 소박하다.

좀처럼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이 작은 것들은 화려하지도 크지도 않다. 스와로브스키 큐빅단추 같은 명품을 고집하지도 않는다. 기능보다는 디자인을 중시하는 시대에서도 근근이 이어져 온 숨은 명맥. 사람들이 존재가치를 인식하지 못할 만큼 작지만. 주인과의 내밀한 관계로 볼 때 그것은 주인의 지근한 측근임에 틀림없다. 그 미미한 존재의 언어는 옷 속에서 더욱 똑떨어진다.

똑딱이 소리는 시니피앙으로 하나의 주관된 상으로 인식된다. 발화와 동시에 인식되는 대상의 어감만이 강할 뿐, 다만 자신들을 부를 때는 입을 오므리고 나직이 불러주기를 원하는가 보다. ‘똑’할 때의 원순모음의 오롯한 느낌, ‘딱’할 때의 개 모음의 활달함, 혀끝이 윗니의 뒤에 살짝 노크를 하면 치조음의 이중창이 시작된다.

어쩜 똑딱이라는 글자 자체도 모음조화의 규칙을 따르는 것을 보면 한 단어의 ‘형태소’조차도 조화를 모색함인가. 이름의 사회성. 소품 하나의 이름에서 어울림 자체도 경이로운 일이지만 내겐 조금 무색하기도 한 일이기도 하다.

모든 단추들이 '단추'라는 이름 하나로 다 통용이 되지만 이 작은 존재 앞에는 꼭 똑딱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단추의 유년이름 같은 ‘똑딱이’, 마치 초등학교 국어교과서에 나오는 ‘영희’와 ‘철수’처럼 내 유년의 모퉁이에서 함께 성장을 지켜본 친근한 이름. 그 한 쌍은 또 하나의 ‘머스마’와 ‘가시내’는 아니었는지. 돌아보면, 모든 사물이 갖고 있는 본래의 기능보다 놀이감으로 먼저 인식이 되던 시기, 물방울처럼 매달려 있던 그것은 단추이기 전에 장난감이자 친구이기도 했다.

그들이 가르쳐 준 음양의 이치는 이 세상의 순리라는 것을 내게 조용히 일러준 것은 아니었을까. 그것은 합일의 상징어였다.

씨실과 날실로 얽힌 섬유의 안에서 바깥세상은 거부하고 은둔의 삶을 택한 것일까. 나 또한 똑딱이 같은 삶을 원한 것은 아닌지. 내게도 은근히 구석자리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처럼 있는 듯 없는 듯 드러나지 않고 살고 싶지만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든 주어진 일만큼은 야무지게 하고도 싶었다. 똑딱이처럼.

직장에 출근을 하던 시절, 하루의 시작은 거울 앞에서였다. 작은 똑딱이를 먼저 채우고, 다시 겉단추를 여미던 그 순간은 하나의 경건한 의식이었다는 것을 상기해 본다. 똑딱이는 날개라고 하는 옷 안에서 점자처럼 작게 도드라져 있다. 그것은 내게 불립문자不立文字이자 교외별전敎外別傳이었다고 하면 지나친 상상일까. 한 여자의 생을 지켜보고 또 지켜 준 존재, 어쩜 내 생의 은밀한 파수꾼이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삶이라는 것도 적당히 채우고 열기도 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보편 타당한 진리를 은연 중 전하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지난 생의 과정에서 어쩜 내 의식에 조금씩 자리하며 스스로 문지기를 자처한 오만함은 아니었는지 돌아보게 된다. 똑딱단추는 어쩜 내게 한 지킴이의 역할로서의 한 상징적인 존재는 아니었을까.

영원히 드러나지 않을 작은 존재여, 아직도 내 날개의 어딘가에 숨어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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