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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그날의 밤기차 / 정선모

부흐고비 2020. 2. 11. 11:28

그날의 밤기차 / 정선모1


짙은 안개가 나를 온통 둘러싸고 있었다.

가로등이 촘촘히 서 있는 서울 한복판에서 나는 길을 잃었다.

밤은 더할 수 없이 깜깜했고, 게다가 안개는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지독했다. 발 앞에 있는 것이 벼랑인지, 구렁인지 분간할 수도 없던 그 시절의 나는 틈만 나면 기차에 올랐다.

탈출하고 싶었다.

탱크가 한강대교를 건너고, 시민들이 잠든 시간에 세상이 뒤바뀌는 흉흉한 시절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봐야 했던 당시의 나는 사는 것이 두려웠다. 인생에 대한 모든 해답을 책 속에서 찾아내려는 듯 도서관에서 붙박이 책장 같은 시간을 보내고 막 사회에 나온 터였다. 나름대로 정리한 인생의 의미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철벽같은 현실에 부딪쳐 맥없이 소멸되는 듯했다. 암담했다. 내가 있는 자리를 벗어나면 뭔가 좀 보이려나 싶어 틈만 나면 기차를 타고 서울을 탈출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했던 때였다. 그날도 부산 가는 밤기차에 올랐다. 작은 가방 하나 든 채, 태어나서 한 번도 웃은 적이 없던 사람처럼 불 꺼진 창가 자리에 앉았다. 창문에 비친 내 모습은 24살 그 어여쁜 나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음울했다. 낯선 내 모습을 또 다른 내가 응시하며 짙은 고립감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옆에서 어디까지 가냐고 묻는 소리가 들렸다. 흠칫 놀라서 돌아보니 언제 탔는지 한 아저씨가 내 옆 좌석에 앉아 있었다. 수원을 막 지날 때였다. 허름한 점퍼 차림의 아저씨는 40대 중반쯤 되어 보였다. 뜻밖의 불청객의 질문에 “부산이요.” 하는 짤막한 대답을 하고는 더 이상 방해하지 말라는 뜻으로 다시 창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부산? 나도 부산 가는데…. 부산 놀러가는 거예요? 아니면 누구 만나러?”

“….”

몇 번의 계속되는 질문에 답하지 않는데도 개의치 않고 그는 차츰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였다. 기차 안의 승객은 거의 잠들었고, 작은 소리로 두런두런 말하는 그의 이야기가 처음엔 무척 성가셨다. 그냥 날 좀 내버려두세요. 혼자 있고 싶어 애써 틈을 내어 떠난 길이니까요. 그냥 아저씨 맘속으로 이야기하시고 제발 생각하는데 방해하지 말아주세요. 소리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분의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그는 8‧15 광복 후의 혼란했던 시기를 겨우 버티어냈는데, 6‧25 전쟁통에 그만 부모와 형제를 모두 잃고 고아가 되었다고 했다. 부산의 한 고아원에서 받아주어 몇 년을 지내면서 이다음에 성공하면 꼭 보답하리라 생각하였다고 한다. 일찌감치 결혼하여 하나 있는 아들이 대학에 들어갔고, 졸업할 때까지의 등록금과 가족이 생활할 수 있는 기반도 다 마련해놓았으니 이제 하고 싶은 일 하러 떠나는 길이라고 했다. 나도 모르게 창을 향하여 있던 고개가 조금씩 그분 곁으로 돌아갔다. 성가셨던 마음은 언제부턴가 사라지고 토씨 하나라도 놓칠 세라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마르고 작은 몸집에 노동하며 살았던 흔적이 주름 잡힌 얼굴이나 거친 손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분은 부산까지 가는 긴 시간동안 자신의 일생을 잔잔하게 풀어놓았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낯선 사람에게 신산했던 그간의 삶을,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는지를, 평생 하고 싶었던 일을 결정하는데 동의해준 가족이 얼마나 고마운지를, 한시라도 빨리 고아원에 가고 싶어 이렇게 밤기차를 탄 것을 조용조용한 말투로 누에고치가 실을 뽑아내듯 끊임없이 풀어내었다.

언제부터인가 나도 모르게 아저씨 눈을 쳐다보았다. 고생한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 따뜻하고 맑은 눈빛이었다. 고아인 자신을 5년 동안 돌보아준 원장이 아직 그곳에 계시다는 말을 할 때는 반짝 빛이 나기도 했다. 새벽에 도착하면 깜짝 놀랄 거라며 빙그레 미소 짓는 그분을 보며 난 어떤 해답을 찾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고 싶은 일과 해야만 하는 일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던 때였다. 원하는 것은 따로 있는데 가족은 나에게 해야 할 일을 끊임없이 강요했다. 내 삶의 주체가 되고 싶었고, 보다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싶었던 나는 그 의미가 갈수록 불분명해져서 그렇게 혼란스럽고 힘들어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밤기차에서 만난 아저씨는 내 삶의 주인은 곧 나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고아들을 돌보는 일을 하고 싶어 그간의 힘든 시간도 즐겁게 버텨왔다며 가는 길에 쌀 열 가마를 주문할 거라며 환하게 웃는 그 모습이 마치 성자처럼 느껴졌다.

마침내 기차는 종착역에 도착했다. 부산역 광장에서 희붐하게 밝아오는 새벽빛을 등에 업고 인파 속으로 사라져가는 아저씨를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참으로 가벼워 보이는 뒷모습이었다. 속옷만 챙겨 넣었을 낡은 가방 하나 달랑 들고, 그간의 삶의 무게를 밤기차에 모두 부려놓고는 홀가분하게 자신이 원하는 삶을 향해 걸어가는 그 첫걸음을 지켜볼 수 있는 행운에 나는 감동했다. 그분 곁에 나 아닌 누구라도, 혹은 혼자였어도 그는 그렇게 밤새도록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털어놓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산에 오면 늘 찾던 바닷가로 가는 버스를 타는 대신 되돌아서서 서울행 기차표를 끊었다. 하고 싶은 일을 기어코 하기 위해서라면 해야만 하는 일을 피하지 않으리라. 그래, 어디 한번 맞붙어보자. 삶의 목표가 분명하다면 살아갈 힘이 생길 것이다. 세상 모든 짐 다 짊어진 듯 암울하고 무거웠던 걸음이 어느새 가벼워짐을 느꼈다. 부산역 광장도 새벽안개가 자욱했지만, 숨을 못 쉴 정도로 답답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의 밤기차는 이후의 삶을 대하는 자세를 바로 세우게 했던 터닝 포인트였다.

  1. 정선모: 1989년 ⟪한국시⟫로 등단. 월간⟪좋은수필⟫, ⟪여행작가⟫ 편집국장. 수상: 한국수필문학상(2003년), 신곡문학상(2013년), 한국산문문학상(2014년), 현대수필문학상(2019). 수필집: ⟪빛으로 여는 길⟫, ⟪지휘자의 왼손⟫, ⟪바람의 선물⟫, ⟪너를 위한 노래⟫수필선집: ⟪아버지의 기둥⟫ 외.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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