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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물 / 박지원

부흐고비 2020. 2. 15. 16:29

물 / 박지원1


강물은 두 산 사이에서 흘러 나와 돌에 부딪혀, 싸우는 듯 뒤틀린다. 그 성난 물결, 노한 물줄기, 구슬픈 듯 굼실거리는 물 갈래와 굽이쳐 돌며 뒤말리며 부르짖으며 고함치는, 원망(怨望)하는 듯한 여울은, 노상 장성(長城)을 뒤흔들어 쳐부술 기세(氣勢)가 있다. 전차(戰車) 만 승(萬乘)과 전기(戰騎) 만 대(萬隊), 전포(戰砲) 만 가(萬架)와 전고(戰鼓) 만 좌(萬座)로써도 그 퉁탕거리며 무너져 쓰러지는 소리를 충분히 형용(形容)할 수 없을 것이다. 모래 위엔 엄청난 큰돌이 우뚝 솟아 있고, 강 언덕엔 버드나무가 어둡고 컴컴한 가운데 서 있어서, 마치 물귀신과 하수(河水)의 귀신(鬼神)들이 서로 다투어 사람을 엄포 하는 듯한데, 좌우의 이무기들이 솜씨를 시험(試驗)하여 사람을 붙들고 할퀴려고 애를 쓰는 듯하다.

어느 누구는 이 곳이 전쟁(戰爭)터였기 때문에 강물이 그렇게 운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런 때문이 아니다. 강물 소리란,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다른 것이다. 나의 거처(居處)는 산중(山中)에 있었는데, 바로 문 앞에 큰 시내가 있었다. 해마다 여름철이 되어 큰비가 한 번 지나가면, 시냇물이 갑자기 불어서 마냥 전차(戰車)와 기마(騎馬), 대포(大砲)와 북소리를 듣게 되어, 그것이 이미 귀에 젖어 버렸다.

나는 옛날에, 문을 닫고 누운 채 그 소리들을 구분(區分)해 본적이 있었다. 깊은 소나무에서 나오는 바람 같은 소리, 이것은 듣는 사람이 청아(淸雅)한 까닭이며, 산이 찢어지고 언덕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소리, 이것은 듣는 사람이 흥분(興奮)한 까닭이며, 뭇 개구리들이 다투어 우는 듯한 소리, 이것은 듣는 사람이 교만(驕慢)한 까닭이며, 수많은 축(筑)의 격한 가락인 듯한 소리, 이것은 듣는 사람이 노한 까닭이다. 그리고, 우르르 쾅쾅 하는 천둥과 벼락같은 소리는 듣는 사람이 놀란 까닭이고, 찻물이 보글보글 끓는 듯한 소리는 듣는 사람이 운치(韻致) 있는 성격(性格)인 까닭이고, 거문고가 궁우(宮羽)에 맞는 듯한 소리는 듣는 사람이 슬픈 까닭이고, 종이 창에 바람이 우는 듯한 소리는 사람이 의심(疑心)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모든 소리는, 올바른 소리가 아니라 다만 자기 흉중(胸中)에 품고 있는 뜻대로 귀에 들리는 소리를 받아들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어제 하룻밤 사이에 한 강(江)을 아홉 번이나 건넜다. 강은 새외(塞外)로부터 나와서 장성(長城)을 뚫고 유하(楡河), 조하(潮河), 황하(黃河), 진천(鎭川) 등의 여러 줄기와 어울려 밀운성(密雲城) 밑을 지나 백하(白河)가 되었다. 내가 어제 두 번째로 백하를 건넜는데, 이것은 바로 이 강의 하류(下流)였다. 내가 아직 요동(遼東) 땅에 들어오지 못했을 무렵, 바야흐로 한여름의 뙤약볕 밑을 지척지척 걸었는데, 홀연(忽然)히 큰 강이 앞을 가로막아 붉은 물결이 산같이 일어나서 끝을 알 수 없었다. 아마 천 리 밖에서 폭우(暴雨)로 홍수(洪水)가 났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을 건널 때에는 사람들이 모두들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우러러보고 있기에, 나는 그들이 모두 하늘을 향하여 묵도(默禱)를 올리고 있으려니 생각했었다. 그러나, 오랜 뒤에야 비로소 알았지만, 그 때 내 생각은 틀린 생각이었다. 물을 건너는 사람들이 탕탕(蕩蕩)히 돌아 흐르는 물을 보면, 굼실거리고 으르렁거리는 물결에 몸이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아서 갑자기 현기(眩氣)가 일면서 물에 빠지기 쉽기 때문에, 그 얼굴을 젖힌 것은 하늘에 기도(祈禱)하는 것이 아니라, 숫제 물을 피하여 보지 않기 위함이었다. 사실, 어느 겨를에 그 잠깐 동안의 목숨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었으랴!

그건 그렇고, 그 위험(危險)이 이와 같은데도, 이상스럽게 물이 성나 울어대진 않았다.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은 요동의 들이 넓고 평평해서 물이 크게 성나 울어대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것은 물을 잘 알지 못하는 까닭에서 나온 오해(誤解)인 것이다. 요하(遼河)가 어찌하여 울지 않았을 것인가? 그건 밤에 건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낮에는 눈으로 물을 볼 수 있으므로 그 위험한 곳을 보고 있는 눈에만 온 정신이 팔려 오히려 눈이 있는 것을 걱정해야 할 판에, 무슨 소리가 귀에 들려온다는 말인가? 그런데, 이젠 전과는 반대로 밤중에 물을 건너니, 눈엔 위험한 광경(光景)이 보이지 않고, 오직 귀로만 위험한 느낌이 쏠려, 귀로 듣는 것이 무서워서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아, 나는 이제야 도(道)를 깨달았다. 마음을 잠잠하게 하는 자는 귀와 눈이 누(累)가 되지 않고, 귀와 눈만을 믿는 자는 보고 듣는 것이 더욱 밝아져서 큰 병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까지 나를 시중해 주던 마부(馬夫)가 말한테 발을 밟혔기 때문에, 그를 뒷수레에 실어 놓고, 이젠 내 손수 고삐를 붙들고 강 위에 떠 안장(鞍裝) 위에 무릎을 구부리고 발을 모아 앉았는데, 한 번 말에서 떨어지면 곧 물인 것이다. 거기로 떨어지는 경우에는 물로 땅을 삼고, 물로 옷을 삼고, 물로 몸을 삼고, 물로 성정(性情)을 삼을 것이리라. 이러한 마음의 판단(判斷)이 한번 내려지자, 내 귓속에선 강물 소리가 마침내 그치고 말았다. 그리하여, 무려 아홉 번이나 강을 건넜는데도 두려움이 없고 태연(泰然)할 수 있어, 마치 방안의 의자 위에서 좌와(坐臥)하고 기거(起居)하는 것 같았다.

옛적에 우(禹)가 강을 건너는데, 누런 용(龍)이 배를 등으로 져서 지극(至極)히 위험(危險)했다 한다. 그러나, 생사(生死)의 판단(判斷)이 일단 마음속에 정해지자, 용이거나 지렁이거나, 혹은 그것이 크거나 작거나 간에 아무런 관계(關係)도 될 바가 없었다 한다. 소리와 빛은 모두 외물(外物)이다. 이 외물이 항상 사람의 이목(耳目)에 누(累)가 되어, 보고 듣는 기능(機能)을 마비(痲痺) 시켜버린다. 그것이 이와 같은데, 하물며 강물보다 훨씬 더 험하고 위태(危殆)한 인생의 길을 건너갈 적에 보고 듣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치명적(致命的)인 병이 될 것인가?

나는 또 나의 산중으로 돌아가 앞내의 물소리를 다시 들으면서 이것을 경험(經驗)해 볼 것이려니와, 몸 가지는 데 교묘(巧妙)하고, 스스로 총명(聰明)한 것을 자신(自信)하는 자에게 이를 경계(警戒)하고자 하는 것이다.

『연암집(燕巖集)』 중에서

  1. 朴趾源: 1737(영조 13) - 1805년 (순조 5년). 실학자 자는 중미(仲美). 호는 연암(燕巖). 실학자 홍대용에게 수학하였다. 1777년 (정조 1년)에 삼종형 박명원(朴明源) 이 청나라에 진하사로 갈 때에 그를 따라 중국에 다녀오면서 중국 사람들의 이용후생하는 방법을 보고 『열하일기』를 저술하였다. 다음해 의금부 도사, 제을령이 되고 1791년 한성부 판관을 거쳐 안의 현감, 1797년 면천군수가 되었다. 1800년 순조 즉위시 양양 부사로 승진, 이듬해에 치사, 귀향하였다. 홍대용, 박제가와 함께 북학파의 영수이며, 저서로 『연암집』이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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