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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금당벽화 / 정한숙

부흐고비 2020. 2. 15. 16:32

금당벽화 / 정한숙1


목탁 소리가, 비늘진 금빛 낙조 속에 여운을 끌며 울창한 수림을 헤치고 구릉의 기복을 따라 아래로 흐르고 있었다. 무성한 숲과 숲, 스며드는 습기로 바위의 이끼는 변함없이 푸른데, 암수 서로 짝지어 어르는 사슴의 울음은, 남국적인 정서로 이국의 애수를 돕는 듯했다.

담징은 바위에 앉은 채 움직이려 하질 않았다. 서녘 하늘은 젖빛 구름 속에 붉은 빛을 머금는가 하면, 자줏빛 구름이 솟구쳐 흐르고, 그것이 퍼져 다시 푸른 바탕으로 변하면, 하늘은 자기 재주에 겨워 회색빛으로 아련히 어두워 갔다.

바위에 기대앉은 담징은 한순간도 쉬지 않고 서녘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동광은 하늘빛을 닮은 듯, 담뿍 부풀어 올랐던 희열의 빛이 잦아들며, 몽롱한 꿈속에 잠기듯이 흐려졌다. 조용히 자리를 옮겨 앉은 담징은 묵묵히 고개를 수그렸다.

향수를 못 이겨 나그네의 신세를 슬퍼하는 것은 아니었다. 맷돌을 만들어 이 땅의 사람들을 경탄케 한 것도 벌써 이삼삭 전의 일이었다. 그러나, 담징의 사명은 그것에 있지 않았다. 생각하면 고국을 등진 지 3년, 보시의 길을 떠나, 백제 땅을 거쳐 신라에 머무르다 도왜한 지도 지금엔 어언 2년이란 세월이 흘렸다. 이름이 종교적인 보시였지, 사실 담징에겐 수학의 길이나 다름없었다. 북방 오랑캐들의 끊임없는 침범, 담징은 고국의 땅 고구려에선 편안히 화필을 잡을 수가 없었다. 말하자면, 자기의 예술적 포부를 마음대로 발휘할 수가 없었던 까닭에, 종교적인 보시라는 명목 밑에 수락의 길을 떠났던 것이다.

고국을 떠나 백제에 놀고, 백제를 거쳐 신라에 배운 담징은, 때마침 왜국의 초빙이 있어 이에 응했던 것이다. 왜국의 청에 응하긴 하면서도 담징은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수 문제의 침범 이후 북방의 풍운은 날로 거칠어 갔으니, 어느 때건 다시 한 번 우레는 번개로 터지리라고 생각은 했었지만, 양제가 다시 백만 대군을 수륙 양군으로 나누어 거느리고 고구려를 침범하려 한다는 소식이 신라에까지 번져왔을 땐, 바로 담징이 왜국의 초빙을 받고 신라 땅을 떠나려던 무렵이었다.

조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의 위험에 휩쓸리려는 이 때, 조국을 영원히 등진다는 것은 하나의 도피임에 틀림없었다. 보시의 생활을 하면서도 고구려인의 긍지를 잃지 않았던 담징, 지금 그의 조국이 오랑캐들의 발굽 아래 짓밟히려는 순간에 있지 않는가. 그런데도,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조국을 등진다는 건 견딜 수 없는 고민이 아닐 수 없었다.

불전에 서면 승이요, 화필을 잡으면 속으로 돌아가 화공이지만, 조국이 위기에 처할 때엔 조국의 방패이어야 할 몸이었다. 어떻게 조국을 등질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모든 것을 초탈한 순수한 고구려 청년으로서의 기백과 번민이기도 했다. 담징은 단연 도왜를 단념하고 조국으로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사세는 이미 담징의 이런 순수한 열망만으로써는 처리될 수가 없었다. 조국에 대한 국민적인 의무도 중했지만, 조국의 국제적인 신의도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떠나진 않았다 해도, 이미 언약한 후였던 까닭이었다.

오늘날까지 화필을 잡지 못한 것은, 조국을 염려하는 그것도 그것이려니와, 가혹한 자책 때문인지도 모른다. 메아리같이 울리던 사슴 울음소리도 이젠 들리지 않았다. 뿌연 안개만이 담징이 낮아 있는 바위 밑에서 번져 오를 따름이었다. 어둠 속을 흐르는 은하가의 잔별들은 총총히 빛나건만, 담징의 가슴 속에 흐르는 회상과 전망의 꿈은 경경각각으로 흩어지기만 했다.

금당 벽화를 그리기로 언약한 지도 벌써 칠팔 삭이 지났지만, 담징은 손에 붓이 쥐어지질 않았다. 무위도식 하다시피 하는 담징의 태도에 왜승들의 쑥덕거림이 있다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승적에도 없는 자라는 둥, 화공을 가장한 불량배라는 둥, 갖은 욕설이 다 떠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담징은 일언반구도 이에 응하질 않았다.

벌써 채색의 정제를 해 놓은 지도 오래었다. 그러나 붓을 들고 벽면을 향하면, 구슬같이 아롱진 열반의 환상이 아니라, 피비린내 풍기는 조국의 현실만이 떠오를 뿐이었다.

담징은 몇 번이고, 들었던 붓을 던진 채 그대로 벽면을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숨가쁜 순간들이었다. 그럴 때마다 담징의 이마엔 구슬땀이 솟았었다. 그래서 그는, 그 걷잡을 수 없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절 뒤 펑퍼진 들판을 방황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는 몇 번인가 고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이 절 주지에게 간청하다시피 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 때마다 주지는 펄쩍 뛰면서, 붓을 들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했다. 담징은 미안하여 이젠 그 말마저도 할 수가 없었다.

오늘도 담징은 일찌감치 금당으로 들어가 붓을 가다듬어 보려고 했지만, 코끝에 서려 드는 살생의 피비린내로 얼굴을 들지 못했다. 담징은 그냥 금당 마룻바닥에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동포들의 신음 소리가 가슴을 두들기고, 오랑캐들의 말발굽이 등허리를 짓밟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합장한 손끝에 눈물이 떨어졌다.

'아, 조국의 현실......'

담징은 도저히 자기로선 금당 벽화를 착공할 도리가 없을 것만 같았다. 붓을 던지다시피 하고 뜰로 나온 담징은, 진종일 바위에 앉은 채 하루해를 보냈다.

이 모든 괴로움을 잊어보리려는 생각이었지만, 잊혀지기는 고사하고 더욱 괴로워졌다. 별무리 속에 떠오르는, 조국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의 고달픈 얼굴들, 저기 북녘 끝 외로이 떨어져 있는 북극성 모양, 지금 이 바위에 앉아 있는 자기의 외로운 모습, 심한 자책..... 눅룩한 밤이슬에 옷깃이 젖었다.

담징은 바위에서 일어났으나 발길이 옮겨지질 않았다. 얽힌 나뭇가지 사이로 부는 바람에 잎들이 우수수 소리를 냈다. 그건 마치 조국의 변두리를 침범해 오는 백만 오랑캐들의 말굽 소리같이 들렸다.

순간 담징의 전신에 피가 역류하듯 불끈 힘줄이 뻗쳤고, 그의 눈은 살생의 불길이 솟아오르는 듯 뜨거웠다. 오늘날까지 담아 온 자비의 불심은 이 순간에 물거품같이 사라졌다. 꽉 진 의분의 주먹은 펴지질 않았다. 비록 불도에 어긋난다 해도 담징은 조국을 버릴 수 없었고, 살생의 죄로 부처님께 버림을 받는다 해도 조국의 멸망을 보고 있을 순 없었다. 밤하늘을 응시하고 있는 담징의 눈앞엔, 오랑캐를 쫓아 허허벌판을 달리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그 때, 유성 하나가 꼬리를 길게 끌며 사라져 갔다. 담징의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불길한 징조인 듯싶었던 까닭이다. 명장 을지문덕이 있다 해도, 중과부적일 때에는 어이할 것인가? 을지 문덕 장군을 믿지 못함이 아니라, 조국의 위기에서 도피하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가책이 앞섰던 것이다.

육모방망이를 든 왜승들에게 쫓기어, 담징은 어둠 속을 달음질치고 있었다. 죽여 버리라는 함성들이 어둠 속에 요란했다. 어둠 속이라 다행히 그들은 담징을 쉬 찾아 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횃불을 추켜든 그들은 샅샅이 훑으며 그를 찾으려고 했다. 언덕 밑으로 쫓기던 담징은 이젠 기진하여 몸을 가눌 기력조차 없었다. 왜승들의 고함 소리가 횃불 모양 또다시 어둠 속에 피어올랐다. 대자대비의 부처님을 생각할 시간적 여유조차 가지지 못한 담징은 죽음을 각오하고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이런 변을 당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치욕이기도 했지만, 솟구치는 분노를 참을 순 없었다. 주먹을 부르쥔 담징은 이를 악물었다. 맞아 쓰러지는 한이 있다 해도 그냥 쓰러질 수는 없는 일이다. 어떤 경우에라도 정신을 잃어서는 안 된다. 왜승들의 방망이에 맞아 쓰러질지언정,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다시금 마음을 가다듬었다. 생각하면, 조국을 배반한 죄과인 것 같았다. 당연히 받아야 할 형벌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담징의 어깻죽지는 축 늘어지도록 힘이 빠지는 듯했다. 눈앞에 번뜩이는 것은 왜승들의 불빛에 드러난 육모방망이뿐이었다.

개중엔 낯익은 놈들도 있으련만, 그들의 얼굴은 어둠에 가리어 분간할 수가 없었다. 어느 놈의 어느 몽둥인지 의식하진 못해도, 정통으로 얻어맞은 담징은, 번갯불 같은 불꽃을 쏟으며 그냥 쓰러지고 말았다. 왜승들의 고함 소리도 들리질 않았다. 피가 흐르는지, 이마와 목덜미가 축축히 젖어들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담징은 아직도 자기가 살아 있다는 의식은 잃지 않았다. 심한 갈증이 나지만, 소릴 지를 수가 없었다. 겨우 한 눈을 떠 보았다. 횃불도 보이지 않았다. 총총한 별들만이 어렴풋이 흘렀다. 머리의 상처를 더듬으려는 순간, 담징은 문득 잠에서 깨었다.

이마에선 구슬 같은 땀방울이 솟아 흘렀다. 어둠이 창을 가로막고 있어 때를 분간할 수가 없었다. 숨을 길게 돌리고 난 담징은, 머리맡을 더듬어 백팔염주를 찾아 들고 밖으로 나왔다. 어둠만이 일층 더 짙어가는 것으로 보아, 멀지 않아 동이 틀 것 같았다. 새벽바람이 땀에 젖은 앞가슴 속으로 스며들었다. 담징은 절로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비록 꿈속의 일일망정, 신세를 끼치고 있는 주지에게 미안했고, 자기의 부덕이 부끄러웠다. 게다가 요즈음 지나치게 속된 생활 속에 불공을 게을리한 가책도 없지 않았다.

담징은 금당으로 가 불을 밝히고 주위를 정히 치웠다. 그리곤 마음을 가다듬었다. 합장하고 단좌한 담징의 손끝이, 너울거리는 불빛 밑에 선인장 같이 벋어 올랐다. 몸을 도사리고 있는 배암 모양 장심 밖으로 감겨 있는 염주의 알알이 불빛에 빛났다. 불상의 자비하신 얼굴을 담징은 감히 우러러볼 수가 없었다. 흉중에 오르내리는 잡념을 가시게 하려고 그는 열심히 불경을 외었다. 생각하면 꿈일망정, 자신을 비방하는 왜승들을 미워한 것이 사실이다. 지금 담징으로선, 도저히 그럴 처지가 못 되었다. 허구한 세월을, 두고두고 그들의 신세를 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무엇보다도 불도에 어그러지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어둠을 몰아가는 바람이 추녀 끝에 부딪치고 다시 불당 안으로 꼬리쳐, 켜 놓았던 불을 불어 꺼 버렸다. 합장한 채 눈을 감고 앉아 있는 담징으로선 그런 것에 개의할 바가 아니었다. 호심같이 잔잔하던 그의 얼굴에 갑자기 주름이 잡히며 이마가 찡그려졌다. 그는 애써 염불을 했지만, 하면 할수록 꼬리를 치며 일어나는 잡념을 누를 길이 없었다. 부처의 자비도 열반의 즐거움도, 추녀 끝에 부딪치는 바람에 어둠이 몰려가듯, 담징의 가슴 속으로부터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어금니에 힘을 주는 순간, 담징의 합장한 손끝이 풍에라도 걸린 듯 부르르 떨렸다. 살생의 피비린내가 코끝에 스며들고, 멀리 조국의 땅을 침범한 오랑캐들의 말발굽 소리만이 귓가를 때려 오기 때문이었다. 담징은 더 참고 견딜 수가 없었다. 그의 장심을 감고 있던 염주가 불상 앞에 떨어졌다. 주먹을 부르쥔 담징은 벌떡 일어서고 말았다.

동이 훤하게 텄다. 메아리 같은 사슴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목탁 소리가 울리건만, 담징의 귀엔 아무것도 들리질 않았다. 그의 눈은 살기가 떠돌아 핏빛이 되었다.

금당 밖으로 나오던 담징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느 틈엔지 법륭사 주지가 서 있었던 까닭이다. 생불이라 우러름을 받는 그였다. 담징은 자기도 의식하지 못한 채 합장을 했다. 그도 맞받아 합장을 하며 끓어 앉았다가 일어섰다.

"기뻐하소서. 수 양제의 백만 대군이 을지문덕 장군의 한칼 밑에 가랑잎 같이 부서지고 말았나이다. 대사가 금당 벽화를 착공할 때가 왔나 보오이다."

담징은 다시 한 번 크게 놀라며 눈을 떴다. 주지는 말없이 보살 같은 미소를 띄며 다시 합장 배례하고는. 총총한 걸음으로 금당 앞 돌층계를 내려갔다.

이심전심이었을까? 이 절 주지만은 오늘날까지 내가 화필을 잡지 못한 까닭을 알고 있었구나. 담징은 그지없이 고마웠다. 주지의 뒷그림자를 멀리 바라다보며 그는 꿇어앉아 합장한 채 일어서질 않았다.

벌겋게 물든 동녘 하늘의 아침 기운이 울창한 수목들을 물들이고 있었다. 목탁 소리도 끊어졌다. 불상 앞으로 돌아온 담징은, 떨어뜨렸던 염주를 주워 들고 다시 합장 배례를 했다. 아침 이슬이 풀잎을 굴러 뿌리로 흐르듯 염주 한 알 한 알이 그의 엄지손가락을 타고 마음속으로 굴러들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푸른 숲이 아침빛을 받아 더욱 빛났다. 황홀 찬란한 이 모든 빛에 눈이 부셔서, 담징은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가슴에 복받쳐 오르는 희열, 조국에 대한 끝없는 감사의 염, 북녘 하늘을 향하여 몇 번이나 합장 배례를 해도 복받쳐 오르는 환희는 가라앉을 줄 몰랐다. 담징은 비로소 합장한 손끝에서 자비로운 불심을 느낄 수 있었다.

담징은 다시 금당 벽면을 향하여 섰다. 벽면엔 아침 햇빛이 훤히 들이비치고 있었다. 담징은 정제해 두었던 채색 통을 날라 놓게 하고, 우거진 숲 사이에 흐르는 냇물로 가서 속세의 때를 벗기려는 듯 몸을 깨끗이 닦고 닦았다. 어쩔 수 없이 터져 오르는 환희를 경건한 불심으로 바꾸어, 벽화를 그리려는 마음에서였다.

붓을 든 담징의 손끝이 무학같이 벽 앞에 나는가 하면, 진한 빛이 용의 초리같이 벽면을 스쳤다.

거침없는 선이여, 그 위엔 고구려 남아의 의연한 기상이 맺혔고, 부드러운 색조여, 그 속엔 백제의 다사로운 꿈이 깃들인 속에 남국적인 정열이 어렸도다. 동방을 제패한 조국 고구려의 환희는 관음상의 미소를 자아내게 하고, 담징의 싱싱한 예술적 포부는 여기 무르익어 관음상의 불룩한 유방 위에 흘렀다. 이른 봄같이 다사로운 감촉이 숨은 보살의 손끝엔, 지금 막 멸망당한 수많은 오랑캐들의 죽음을 조상하는 자비로운 불심이 흘렀다.

목에 걸린 구슬이여, 이는 소식조차 아득한, 조국 땅에 남아 있는, 잊혀지지 않는 사람들의 얼굴이런가? 알알이 빛나고 줄 이어 맺혔으니, 국난을 막기 위한 단결된 그들의 정성이 여기 있도다.

담징은 비로소 붓을 놓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씻었다. 그리고는 한 걸음 물러서서 눈을 가늘게 뜨고 화면을 바라보았다. 온갖 정성을 다 기울였건만 어딘지 모르게 허전한 것 같았다. 그는 눈을 감았다. 조국 땅에 두고 온 여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담징은 다시 눈을 크게 뜨고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여인의 모습이 더욱 뚜렷해졌다. 담징은 몹시 괴로웠다. 그것은 열반의 세계를 구현한 것이 아니라, 사바를 모방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까닭이다.

다시 붓을 든 담징은 한 걸음 물러섰다가 앞으로 나갔다. 그대로 화면을 지워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던 것이다. 담징은 다시 주춤 서 버렸다. 초승달 같은 아미, 열반의 세계가 그 속에 있어야겠는데, 거친 속세의 모습만이 떠도는 것 같았다. 넓은 듯 좁은 듯 한 그 미간에 떠오르는 여인의 모습, 담징은 속세에 대한 마지막 미련을 씻기라도 하듯, 온 정성을 다하여 그 미간에다 일점을 찍었다. 그건 다시는 그의 의식에서 그런 생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필사의 노력이기도 했다. 그의 입가엔 비로소 미소가 떠올랐다.

범할 수 없는 관음상이여. 그리운 사람의 환상마저 잊으려는 담징의 각고의 노력으로 열반의 상징 보살이 이루어졌도다. 벽면엔 저녁놀이 물들기 시작했다. 담징의 등 뒤에 서 있던 주지가, 구현된 지상열반의 세계에 도취하여 그만 합장한 채 꿇어 엎드렸다. 담징을 비방하던 모든 왜승들도 모두 합장을 하고 주지의 옆과 뒤에 꿇어 엎드렸다.

조국의 승전의 쾌보를 받지 못했던들 금당 벽화는 한낱 승 담징의 관념의 표백에 그쳤을런지도 모른다. 윤이 흐르는 생기여! 그것은 조국에 대한 담징의 충성이었다. 화면은 바라보던 담징도 그냥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붓 대신 염주를 든 그도 뭇 승들과 같이 합장하며 꿇어앉았다. 누가 피워 놓았는지 향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오고가던 속세의 뜬마음도 향불 연기를 따라 사라졌다.

가사를 입은 주지가 맨 앞에 앉아 목탁을 두들겼다. 누구인지 뒤에서 법고를 울렸다. 그 때마다 뭇 승은 일제히 일어섰다가 앉으며 배례를 했다. 자기 손에서 이루어진 관음상이건만, 지금 담징에겐 그것이 자기의식의 세계가 아닌 것만 같았다. 벽면엔 관음상의 미소가 빛나는데, 타오르는 향 연기 속에 목탁과 법고가 울리며, 뭇 승들의 합장 배례가 그칠 줄 몰랐다.

  1. 鄭漢淑: 1922.11.3.~1997.9.17. 호는 일오(一悟). 평안북도 영변 출생.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후 고려대학교 교수 및 한국문예진흥원장을 역임하였다. 1947년 전광용(全光溶)·정한모(鄭漢模) 등과 ‘시탑’·‘주막’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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