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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서른한 번째 장미 / 손광성

부흐고비 2020. 2. 18. 21:55

서른한 번째 장미 / 손광성


남대문 꽃시장에 간 것은 네 시가 조금 지나서였다. 세 시면 파장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하다 보니 그리되고 말았다.

생각했던 대로 꽃가게들은 거의 문을 닫은 뒤였다. 살 형편도 못 되면서 보석 가게 앞에서 공연히 서성거리다가 시간을 너무 많이 보낸 것이 잘못이었다. 불이 켜져 있는 집은 대여섯 집. 그나마 다행이다 싶었다. 아내가 좋아하는 노랑 장미를 살 생각이었다. 그러나 다 팔리고 없었다. 대신 분홍 장미를 사기로 했다.

열 송이 한 다발에 4천 원이었다. 내게 필요한 것은 서른하고 한 송이니까 세 다발을 사고 한 송이는 덤으로 받으면 꼭 맞아 떨어지는 셈이었다. 지갑을 꺼내면서 꽃집 주인에게 말했다.

"아주머니, 세 다발을 주세요."

아주머니가 꽃을 싸고 있었다. 이제 한두 송이 덤으로 끼워 넣으리라.

그러나 세 다발을 다 싸고도 덤을 줄 생각을 하지 않고 나를 보고 서 있는 것이었다.

"덤 없어요? 아주머니."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부드러운 음성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꽃장수 아주머니는 아무 감정도 섞이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없는데요."

처음에는 농담인 줄 알았다. 서른 송이나 사는데 덤이 없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잠시 기다렸다. 그래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내가 다시 말했다.

"서른 송이나 샀는데, 덤이 없어요?"

나는 '서른 송이'란 말에 조금 힘을 주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못한다는 것이었다. 기분 좋게 덤으로 한 송이를 더 받고 싶었지만 안 된다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천 원짜리를 내밀었다.

"한 송이를 더 주십시오."

내가 들어도 내 말투가 좀 딱딱해져 있었다. 야박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서 그랬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번에도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못 하는데요."

"돈을 드리는데두요?"

"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돈을 주어도 팔 수 없다니. 이유를 물었다. 대답은 간단했다. 열 송이짜리 한 단에서 한 송이를 빼고 나면 그 아홉 송이는 한 단 구실을 못하기 때문에 다른 손님에게 팔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꼭 필요하다면 한 단을 더 사면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지만 내가 필요한 것은 서른 송이도 아니고 마흔 송이도 아니었다. 꼭 '서른한 송이'여야 했다. 그렇다고 그 한 송이 때문에 한 다발을 더 산다는 것도 그렇지만, 설사 그런다고 해도 남은 아홉 송이를 어떻게 하느냐가 문제였다. 아무에게나 주어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싱싱한 꽃을 사려고 일부러 멀리까지 온 것까지는 좋았는데 여기가 도매상이란 사실을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은 나의 불찰이었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내 등 뒤에서 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여왔다.

"아주머니, 제가 한 다발을 살 테니 이분께 내 것에서 한 송이를 드리세요. 그 한 송이에 깊은 뜻이 있는 것 같네요."

돌아다보니 바바리코트를 입은 중년 부인이 웃고 있었다. 처음부터 꽃집 주인과 내가 꽃 한 송이를 놓고 실랑이를 벌이는 것을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너무 뜻밖의 일이라 잠시 멍한 기분이었다. 주인 여자가 장미 한 송이를 덜어 내어 내 꽃묶음에 넣었다.

나는 그제야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감사의 말을 건넬 수 있었다. 좀 쑥스럽기도 하고 고맙기도 한, 뭐 좀 그런 어정쩡한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덥석 받기도 좀 그렇고 해서 아까부터 쥐고 있던 천 원짜리를 주저하면서 그녀에게 내밀었다. 받을 리가 없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제 동생이 꽃 가게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바쁘다기에 제가 나온 것입니다."

그러시냐고 하면서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자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어떤 소중한 분의 생일인가 보지요. 서른한 살 되시는?"

"아, 네. 그게 실은......."

좀 쑥스러운 일이지만 나는 그날이 우리 부부의 서른한 번째 되는 결혼기념일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웃었다. 그러고는 한 송이가 모자라는 장미 다발을 받아들고 다음 가게로 걸음을 옮기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 장미는 그녀가 찾고 있던 색깔도, 또 그녀가 사려고 하던 종류도 아니었을지 모른다.

버스를 타고 오는 동안에 내내 가슴이 두근거렸다. 뭔가 알 수 없는 향기라도 맡은 그런 기분이었다.

아내에게 꽃을 건네었다. 아내는 덤덤한 표정으로 받았다. 우리는 며칠째 냉전 중이었다. 그러나 내가 그 서른한 번째 장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자 꽃을 꽂고 있던 아내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지는 것이었다. 며칠 만에 보는 아내의 웃음.

이제 그 서른한 번째 장미도 다른 장미들과 함께 시들고 말았다. 하지만 그 빛나는 장미 한 송이는 우리의 기억 속에 시들지 않고 오래오래 피어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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