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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길 / 박이문

부흐고비 2020. 2. 24. 10:56

길 / 박이문1


길은 부름이다. 길이란 언어는 부름을 뜻한다. 언덕 너머 마을이 산길로 나를 부른다. 가로수(街路樹)로 그늘진 신작로가 도시(都市)로 나를 부른다. 기적(汽笛) 소리가 저녁 하늘을 흔드는 나루터에서, 혹은 시골 역에서 나는 이국(異國)의 부름을 듣는다. 그래서, 길의 부름은 희망(希望)이기도 하며, 기다림이기도 하다.

눈앞에 곧장 뻗은 고속 도로가 산을 뚫고 들을 지나 아득한 지평선(地平線)으로 넘어간다. 푸른 산골짜기로 꼬불꼬불한 도는 하얀 길이 내 발 밑에 깔려 있다. 그것은 내 마음에 희망을 불어넣고 내 발에 활기(活氣)를 주는 손짓이다. 나는 그 희망을 찾아 그 손짓을 따라 앞으로 가야겠다는 즐거운 유혹(誘惑)에 빠진다.

길은 우리의 삶을 부풀게 하는 그리움이다. 그리움의 부름을 따라가는 나의 발길이 생명력으로 가벼워진다. 황혼(黃昏)에 물들어 가는 한 마을의 논길, 버스가 오며가며 먼지를 피우고 지나가는 신작로, 산 언덕을 넘어 내려오는 오솔길은 경우에 따라 기다림을 이야기한다. 일터에서 돌아오는 아버지를, 친정(親庭)을 찾아 오는 딸을, 이웃 마을에 사는 친구를 기다림에 부풀게 하는 길들이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길은 희망을 따라 떠나라 부르고, 그리움을 간직한 채 돌아오라고 말한다.

희망과 그리움, 떠남과 돌아옴의 길은 어떤 관계(關係)를 전제(前提)로 한다. 길은 희망이라는 미래(未來)와 그리움이라는 과거(過去), 미지(未知)의 사람과 정든 사람들, 사물(事物)과 인간(人間)간의 관계를 이룬다. 이러한 관계에서 미래와 과거, 나와 남, 정착(定着)과 개척(開拓), 휴식(休息)과 움직임, 인간과 자연과의 만남의 열매가 결실(結實)되어 간다.

길은 과거에 고착(固着)함을 부정하는 동시에, 미래에만 들떠 있음을 경고한다. 길을 떠나 나는 이웃과 만나고, 길을 따라온 이웃이 나를 만난다. 길 끝에 휴식(休息)할 곳이 있지만, 다시 길을 찾아 어디론가 움직여야 한다. 길은, 인간이 자연 현상과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고 인간과 자연과의 경계선을 전달하는 크나큰 표지(標識)이지만, 그 표지는 인간과 자연과의 새로운 관계, 새로운 만남을 나타낸다.

이러한 만남에서 과거가 미래로 이어져 역사(歷史)가 이루어지고, 내가 남들에게로 연결되어, 고독한 실존적(實存的) 존재로서의 나는 사회라는 광장(廣場)에서 인간으로서 재발견된다. 그리고, 이런 만남을 통해서 인간은 자연, 더 나아가 우주(宇宙)로 해방(解放)된다. 이리하여, 길이 만남이라면, 만남은 곧 열림이다.

인간을 자연과 우주로, 나를 남과 사회로 열어 주는 길들은 자연과 우주에 새로운 질서(秩序)를 부여(賦與)하여 뜻있는 것으로 하며, 나와 남과의 사이에 사회의 질서를 세워 진정한 뜻에서의 인간적 세계를 창조(創造)한다. 이런 과정(過程)에서, 어떤 철학자(哲學者)가 말했듯이, 사물로서 존재가 빛을 받아 원래의 은폐성(隱蔽性)에서 밖으로 뜻을 가지는 존재로 나타나게 되며, 동물(動物)로서의 인간이 자연을 초월(超越)하는 인간으로서 승화(昇華)하게 된다. 이와 같이 하여, 길은 벨트(Welt), 즉 물리(物理) 현상으로서의 세계가 움벨트(Umwelt), 즉 환경(環境)으로서의 세계로, 환경으로서의 세계가 레벤스벨트(Lebenswelt), 즉 생활 세계로, 무의미(無意味)의 세계가 의미의 세계로 발전하는 역사의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기록이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인간의 삶의 발자국이다.

구체적 삶은 어떠한 하나의 관점으로 설명될 수 있는 일차원적(一次元的) 현상이 아니다. 우리의 삶은 꿈과 현실, 희망과 좌절(挫折), 휴식과 일, 기쁨과 슬픔, 활기(活氣)와 피로(疲勞), 웃음과 눈물, 명상적(冥想的) 순간과 광기(狂氣)의 순간 등으로 무한히 얽혀 얼룩져 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똑같은 사람의 태도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어떤 이는 보다 감성적(感性的)이고, 어떤 이는 보다 이지적(理智的)이다. 어떤 이가 의지적(意志的)이라면, 어떤 이는 순응적(順應的)이다. 남자(男子)가 억센 성격이라면, 여자(女子)의 흔히 유순(柔順)한 체질이다. 한 집안, 한 마을, 한 사회, 한 시대의 다양(多樣)한 길들의 구조와 내용들은 각기 다양한 인간들의 삶을 표상한다.

화초로 잘 꾸며진 정원 길에서 삶의 재미를 느끼며, 시골 샘터로 가는 들꽃 무리진 길에서 소박(素朴)한 알뜰하고 따뜻함을 감각(感覺)한다. 산과 들을 일직선(一直線)으로 뚫은 고속 도로에서 인간의 승리감(勝利感)을 느낀다면, 들로, 산골짜기로 꼬부라지는 철로에서 삶의 끈기를 맛본다. 봄꽃 필 무렵, 산을 넘는 길은 마치 미소(微笑)와도 같이 밝다. 이처럼 길들이 삶이 긍정적(肯定的) 밝은 면을 채색(彩色)한 화폭(畵幅)일 수도 있지만, 거기에는 또 고통과 슬픔이란 삶의 그늘져 있다. 한여름 뙤약볕에 소를 몰고 읍내로 가는 길은 너무나도 멀고, 일손을 마치고 무거운 지게를 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농부에게는 그가 가야 하는 험한 산골짜기 저녁 길은 너무나도 고달픈 언덕길이다. 고향을 떠나 서울로 일을 찾아가는 젊은이들에게는 그가 밟고 가야 할 신작로가 너무도 거칠고 불안하다. 그리하여, 가지가지 길들은 그것대로 삶의 희로애락(喜怒哀樂), 희망과 좌절, 활기와 실의(失意)의 각양 각색의 삶의 자국을 남긴다.

두꺼운 돌을 깔아 만든 넒은 로마 제국의 길은 세계 정복(世界征服)의 힘의 자국을 내고 있는가 하면, 설악산(雪嶽山) 암자(庵子)로 올라가는 좁은 길은 세상을 떠나 명상에 잠기려는 마음씨의 자국이다. 이미 잡초(雜草)에 파묻혀 버린 오솔길에서 삶의 무상(無常)함을 볼 수 있는가 하면, 험한 산의 절벽을 따라 새로 난 길은 삶의 의욕(意慾)을 상징한다. 높은 돌의 층계(層階)를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디디고 올라가면서 우리는 삶의 어려움에 새삼 젖는가 하면, 눈 덮인 들길을 헤쳐 가면서 우리는 고독한 명상에 잠기기도 한다. 어떤 길은 꿈이 배어 있고, 어떤 길은 사색적(思索的)이고, 어떤 길은 황량(荒凉)하고, 어떤 길은 쾌활(快活)하다. 길은 인간의 꿈, 생각, 의지, 느낌을 통틀어 함께 반영(反映)한다. 길은 사람이 남기는 삶에 대한 인간의 문학적 기술(記述)이다. 인간에 의해 씌어진 이 길이라는 언어에 의해서 자연은 침묵(沈黙)을 깨뜨리고 의미를 가지게 되며, 문화(文化)라는 꽃을 피우게 된다. 자연의, 아니 우주의 고독(孤獨)이 노래나 시로 바뀐다.

한 사회에 따라, 한 문화에 따라, 그리고 한 시대에 따라 길은 애절(哀切)한 노래일 수도 있고, 길이라는 시는 서정시(敍情詩)가 될 수도 있고, 서사시(敍事詩)가 될 수도 있다. 로마로 통하는 돌을 깐 길들이나 미국 대륙(大陸)을 그물처럼 누비고 있는 고속 도로에서 크나큰 서사시를 읽을 수 있다면, 미루나무에 그늘진 한국의 논길 혹은 산 너머 이웃 마을로 통하는 한국의 산길에서 따뜻한 서정시를 들을 수 있다.

산천(山川)을 누비어 꿈을 꾸는 듯한 한국 시골들을 이어 놓은 한국의 옛 길들에서 우리는 극히 인간적인 것을 느낀다. 철도, 아스팔트가 깔리고 플라타너스에 그늘진 한국의 신작로도 아직 인간적인 호흡(呼吸)을 담고 있다. 그러나 바쁘고 부산한 고속 도로, 큰 도시의 실꾸러미처럼 엉킨 길에서 우리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박자(拍子)로 맞출 수 없는 비인간화(非人間化)된 삶의 형태(形態)를 체험한다. 그렇다면, 인간적 체온(體溫)이 풍기는 길을 잃어 갈 때, 우리는 인간을 잃게 될는지 모른다. 그러기에, 큰 도시의 네거리에서 복작거리다가도 잠시나마 버드나무 그늘진 시골 논길을, 냇물이 돌조각 사이로 흐르는 개천 길을 걸어 보고 싶어지게 된다. 명상적이면서도 청청(淸淸)한 노랫가락 같은 한국의 길에서, 우리는 논과 밭, 산과 개천, 구름과 나무, 하늘과 땅, 인간과 자연과의 친근(親近)하고 조화(調和)로운 관계를 체험하고, 그리하여 진정한 의미에서의 마음의 자유를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한 사회, 한 시대의 생활 양식(生活樣式)의 변천과 더불어 그 사회, 그 시대의 길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옛날 길들에 마음이 끌리고 유혹을 느낀다면, 그것은 잃어버린 것에 대한 낭만적 향수(鄕愁)나 진보(進步)에 대한 거부심(拒否心)에 기인(起因)되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자연과 남들과의 조화로운 만남 속에서 살아 있는 인간으로 남아 있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1. 박이문: 1930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불문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하고 이화여대 불문과에서 교편을 잡다가 프랑스 소르본 대학에서 불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중학교 시절부터 허무주의에 빠져 지냈던 그답게 철학으로 관심사를 확장, 결국 미국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화여대 불문과 교수, 렌셀러폴리테크닉 대학 철학과 교수, 시몬스 대학 철학과 교수, 하버드 대학 교육대학원 철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도쿄 국제기독교 대학 초빙교수, 마인츠 대학 객원교수 등을 역임했고, 현재는 시몬스 대학과 포항공대에서 명예교수로 재직 중이다. 문학과 철학, 과학과 예술 모두가 결국은 한 뿌리라고 생각하는 그는 스스로의 철학을 ‘둥지의 철학’이라고 말한다. 보금자리를 제공하는 둥지처럼 철학 역시 삶의 길을 찾을 수 있고 쉴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 어떠한 것에도 절대적인 답은 없다고 말하는 허무주의자이지만 한평생 글 쓰고 공부하는 일에 매달려 최선을 다해 살아온 그는 우리 모두가 깊은 지혜를 겸비한 철학자가 되기를 희망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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