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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 박이문

부흐고비 2020. 2. 24. 10:57

여행 / 박이문


여행은 하나의 움직임이다. 파스칼은 불행의 유일한 이유가 우리가 방 안에 혼자 가만히 있지 못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움직이지 않을 때 삶은 끝이 난다. 살아 있지 않고서 행복할 수 없다. 여행은 떠남으로써의 움직임이다. [플루타크 영웅전]에선 떠남에 대한 파루스와 시네아스의 상반된 태도가 이야기되고 있다. 피루스는 희랍을 정복하고 아랍을 점령하고 그 다음엔 아시아를 정복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난 다음은 무엇을 하겠느냐고 묻는 시네아스에게 쉬겠다고 대답한다. 그러자 시네아스는 아무래도 쉴 바에야 그냥 지금부터 쉬면 더 좋지 않으냐고 반문한다. 그러나 삶은 쉬더라도 우선 움직이기를 요구하며, 언제고 반드시 돌아와야 하더라도 떠나기를 요청한다. 그것은 우리가 언젠가는 죽기 마련이라도 살고 봐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여행이 떠남이라지만 거기에는 확정된 목적이 없어야 한다. 어떤 확정된 목적을 위해서 떠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떠나는 것이 여행이다. 여기서 말하는 여행은 사업가나 유학생, 공무원처럼 어떤 목적을 둔 여행이 아니다. 그것은 바캉스, 즉 비우는 것, 휴가로서의 여행을 뜻한다.

바캉스! 휴가! 말만 들어도 시원하고 그 말의 여운만으로도 어딘가 낭만적이며 자유로운 해방감, 더 나아가서는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 바캉스, 휴가로서의 여행은 일상적인 것, 따분하고 무서운 상습성으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한다. 그래서 여행은 새로움, 신선한 것, 낯선 것에 대한 호기심의 만족을 의미한다.

배낭을 짊어지고 설악산에 오르면, 복잡하고 탁한 공기와 소음에 싸인 서울과는 다른 환경에 접하는 신선함이 있다. 산골짜기에서 도시락을 풀어 요기를 할 때 일상의 틀에 박힌 식탁에서와는 다른 새로운 맛을 경험한다. 또는 비행기를 타고 가서 파리의 노트르담, 로마의 콜로세움,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신전, 고층 빌딩이 숲을 이룬 뉴욕의 맨해튼 등을 구경할 때면 교과서나 신문, 잡지를 통해서 막연하게 상상하던 미지의 세계에 대한 의혹이 풀린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인도의 도시 여기저기서 발견되는 성우, 남미 잉카문명의 유적, 그리고 아프리카의 원주민들을 접하면서 인류의 역사와 인간의 가지가지 생활양식을 눈과 피부로 직접 배운다.

이렇게 보면 여행은 교육적 의미를 가진다. 이른바 수학여행이란 관념이 생기고 그런 명목하에 수많은 학생,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학교, 자기의 고장을 잠시나마 떠나서 버스에 실려 또는 배나 비행기를 타고 다른 지방으로 혹은 다른 나라로 떠난다.

그러나 신문, 잡지, 텔레비전이 극도로 발달한 오늘날에 교육적 여행은 그 의미를 잃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막대한 돈과 시간을 들여가며 멀리까지 가서 직접 사물과 사람들을 접하여 무엇을 배우는 효과보다는 오히려 집에 앉아 책을 읽든가 텔레비전을 시청함으로써 더 많은 정보를 더 정확하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해인사에는 평소에 못 피우던 담배를 태우기에 여념이 없는 남학생들로 그득하고, 불국사에는 사진 찍기에 한창인 여학생들이 대부분이다. 발가락이 붓고 충분히 잠을 못 자서 눈이 부은 시골 일본인들이 루브르 박물관이나 피렌체의 시가를 돌아다녔다고 해서 과연 무엇을 보고 듣고 배웠다고 하겠는가. 어쩌면 집에 돌아온 그들에겐 양떼를 끌고 다니듯 하는 안내자가 들고 있던 깃대만이 기억에 역력할 것이며, 그들에게 남을 수 있는 것은 고작 정신없이 찍은 기념사진뿐이기가 일쑤이며, 그들이 여행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유명한 곳을 갔었다는 사실, 파리, 로마의 유적들을 보고 왔다는 일종의 허영심에 대한 만족감에 불과할 것이다. 여행이 대중화된 오늘날, 그것은 이른바 아메리카식으로 속화되고 피상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껴두었던 돈을 몽땅 쓰면서 비행장, 호텔 혹은 버스정류장에서의 피로를 경험하고 이른바 고적, 명소를 배경으로 자신의 얼굴이 담긴 사진을 찍은 것으로 만족해버리는 경우가 많다.

새로운 것을 보더라도 새로운 것을 관찰하기란 쉽지 않다. 새로운 정보를 듣는다 해도 정말 새로운 정보로 지각되기란 드문 일이다. 누구나 자신의 눈으로, 자신의 귀로만 보고 들어야 하기 때문이며, 자신의 눈이나 자신의 귀가 아닌 다른 사람의 눈과 귀를 통한 정보는 상상을 한다 해도 쉽게 파악되기 않기 때문이다. 물리적 방법에 의해 자신의 공간을 떠난다고 정말 새로운 공간 속에서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만으로는 지금의 자신을 떠나 스스로를 새롭게 보거나 자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쩌면 누구나 타고난 나르시스트인지도 모른다. 따지고 보면 여행의 유혹은 호기심의 만족에 있지도 않고 교육적 목적을 달성하는 데 있지도 않다. 그것은 자신으로부터의 탈출, 자기로부터의 해방에 있다. 나는 나의 집에서, 나의 가족 혹은 친지로부터 떠나고 싶은 것이다. 나는 나의 마음, 나의 도시, 나의 나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물론 그러한 공간들이 나의 삶을 보호해주고, 오늘의 나를 만들어준 밑거름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또한 나를 구속하는 제약이기도 하다. 생명으로서의 나는 항상 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가족의 한 사람이기 전에, 누군가의 친구의 한 사람이기 전에 시민이나 국민이기 전에 하나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현재나 과거의 나로부터 나는 빠져나가고 싶은 것이다. 가족과 친구와 떨어져서 혼자 있고 싶은 것이다. 여행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유혹은 혼자가 되고 싶은, 그럼으로써 모든 사회적 관계의 틀, 일상적 틀 속에서 해방될 수 있는 데 있다. 단체여행은 고독하지 않아 좋고, 가까운 친구나 애인과의 여행은 다정해서 좋다. 남들과 함께 보는 아름다운 것들은 그만큼 더 아름답다는 말에 일리가 있음을 인정한다. 이야기할 사람도 없이 혼자 다니는 여행은 여행의 절반을 잃어버린 거임을 많은 사람들은 체험을 통해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의 진짜 맛은 역시 혼자, 단 혼자 하는 데 있지 않을까 싶다.

아무도 모르는 낯선 도시에서 혹은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이국의 낯선 거리에서 완전히 익명으로 어쩌면 있으나마나 상관없는 조재로서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만큼 허전하고 가난한 것 같기도 하지만 또한 그만큼 나는 흐뭇하고 풍부해질 수도 있다. 낯익은 곳에선, 낯익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나는 모든 면에서 제약을 받게 되고 그 속에 뒤얽혀 있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직장인으로서, 한 단체의 성원으로서, 국민의 일원으로서 내게 부여된 일정한 역할과 내가 맡아야 할 특수한 기능이 있다. 나는 이런 관계 속에서 항상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행실해야 할까를 염려한다. 아들의 교육을 위해서, 아내의 행복을 위해서 마음을 써야 한다. 이웃과 친구들 간의 관계에서 사회적으로나 도덕적으로도 얽매여 있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아내에게는 남편으로서, 직장에서는 직업인으로서, 국가의 관점에서는 국민으로서 존재한다. 나는 그냥 나로서 존재하지 못하고 남의 눈에 의해서 존재하며 남의 눈을 떠나서는 존재 할 수 없다.

전혀 아는 사람들이 없는 낯선 도시를 혼자 서성대는 즐거움은 그러한 속박을 완전히 벗어나는 해방감에 있으며, 잠시나마 독립된 자기 자신으로 놓여 있다는 자기발견에 있다.

나는 이름도 성도 없다. 나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눈들도 없다. 내가 죽든 살든 아무도 상관하지 않는다. 나는 누구의 아버지도 아니며, 누구의 아들도 아니다. 나는 높은 관리도 아니며 유명한 교수도 아니다. 나는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다. 그냥 살아 있는 하나의 인간이며, 생물체에 불과하다.

남들에게 나는 있으나마나한 존재다. 나를 관찰하고 평하는 눈이 없다. 나는 관찰되지 않는 자유의 고지에서 남들을 구경하고 관찰하는 쾌감을 느낀다. 남들의 눈 때문에 하지 못했던, 이른바 사회적으로 제약되지 않은 몸차림으로 있을 수도 있고 도덕적으로 규탄받는 나쁜 짓도 할 수 있다. 그 답답한 넥타이를 팽개치고 걸레 같은 청바지를 입은 채 젋은이들의 틈에 끼여 걸어다녀도 걸리는 게 없다. 술집에 가서 밤늦게까지 앉아 있어도 나를 이상하게 볼 사람은 없다. 뜻하지 않은 사랑, 그렇게 맛보고 싶었던 극히 낭만적인, 말하자면 비상식적이고 비도덕적인 사랑에 빠져볼 수도 있다. 나는 아버지도, 장관도, 교수도 아닌 그냥 한 벌거벗은 사나이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제 체면이 필요 없다. 내 사회적 지위가 어떠했든 나는 값싼 여관방에서 마음 편히 뒹굴 수 있다. 나는 이제 분수를 생각할 필요가 없다. 기분 나면 호텔 식당에 들러 값비싼 요리를 만끽할 수 있다. 내게는 이제 특별할 일도 없고 각별히 생각할 것도 없다. 꼭 사야 할 물건도 없다. 나는 시간이나 날짜를 생각하지 않고, 어쩌면 시간과 공간의 공백지대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마음 내키는 대로 거리를 서성거리다가 피로하면 여관에 들어가서 낮잠을 즐길 수 있다. 마음대로 게으를 수 있는 사치스러움이 있다.

이역의 큰 도시에 그 많은 사람 틈에 밀려다니지만 나는 혼자서 고독하다. 그 많은 사람들에게는 내가 있으나 마나지만 나에게는 그들이 있으나 마나이다. 내가 관심을 둘 필요도 없고, 그들 역시 나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 한 그들은 실상 나에게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고독이 내 마음을 시원하게 한다. 혼자로서의 내가 모든 사회적, 도덕적 규제로부터의 탈출감을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고독이 내 마음을 흐뭇하게 채워준다. 처음으로 독립된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찾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완전히 혼자서, 아무도 몰래, 아무에게도 그리고 아무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자신을 발견할 때 귀중함과 보배로움을 느끼게 된다. 나만의 나, 숨겨진 나,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비밀을 갖고 있는 나는 바로 그 비밀 때문에 남들이 접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남들과의 복잡한 관계에서 거칠고 냉혹하게 변하기 마련이었던, 따사로움을 되찾는다.

낯선 땅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당혹감을 체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역에서 언어가 통하지 않아 답답할 수도 있다. 어느 역에서 돈이 떨어져 막막할 때도 있을 것이다. 땀이 흐르고 발이 부르터서 쉬고 싶어지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다.

떠남. 걸어서, 버스나 기차를 타고서, 비행기로 날아서 떠나는 그것에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것은 떠남이 인간의 근본적인 해방을 향한 욕망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처음 보는 고장, 이국으로의 여행이란 낱말이 우리들의 가슴속에 낭만적 향수를 일깨워주는 것은 여행이 생동하는 모험, 자유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벗어던진 적나라한 자기 자신과의 접촉을 마련하고, 그 속에서 남들과는 혼돈될 수 없는 자신만의 깊은 영혼의 비밀을 보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행의 가장 깊은 뜻은 남들과 혼돈되거나 대치될 수 없는 자아의 유일성을 확인하는 데 있다. 낯모르는 곳, 이국의 땅으로 우리는 떠날 수 있다. 이렇듯 떠남이 모든 사람의 어쩔 수 없는 꿈이지만 이 마을에서 다른 도시로,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떠나듯이 언젠가 숙명적으로 맞닥뜨려야 할 이 삶으로부터 다른 삶으로, 곧 죽음으로의 떠남은 어떤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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