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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꽃신 / 유경환

부흐고비 2020. 9. 17. 14:24

꽃신이라고 말하면 전승문화 기능보유자 갖바치가 만드는 비단 가죽신을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꽃신은 글자 그대로 꽃을 심는 신일 따름이다.

어머니는 여든을 사셨지만 아무도 임종을 못 했다. 혼자 가셨다는 점이 여지껏 마음에 걸린다. 사십구일재를 마치고 형제들은 어머니 손길이 남아 있는 물건을 하나씩 골라가지고 헤어졌다. 물러서 있다가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 어머니의 옥색 고무신 한 켤레를 나는 집어 들었다. 산 지 얼마 안 되는 새 신이었다. 어머니가 보고 싶으면 신을 바라보았다. 처음엔 말끔히 닦아 놓기도 했으나 점점 눈길이 멀어져갔다. 하여간 십여 년을 그냥 가지런히 놓아두었다.

3주기, 5주기, 10주기가 지나고서는 기일조차 제날을 기억하지 못한 해가 있었다. 자식의 마음도 별 수 없었다. 고무신의 옥색도 날아가고 균열이 생겼다. 위치도 잘 보이는 곳에서 잘 안 뵈는 선반 위로 옮겨졌다. 정년퇴직을 하고 시간의 틈새가 벌어졌다. 어느 날 생각이 문득 어머니의 옥색 고무신에 미치자 뜨락으로 들고 나왔다. 내가 누리고 사는 뜨락을 어머니는 살아 보지 못하였다. 이남으로 내려온 뒤 줄곧 안마당이 없거나 있어도 좁은 집에서만 살았다. 그래도 늘 꽃을 가꿨다. 큰 깡통이나 석유통에 꽃을 심어 볕을 따라다니며 넝쿨을 올리기도 했다. 이제 되돌이키니 그것은 어머니의 대단한 정성이고 집착이었다. 몇 차례 집이 바뀌었어도 복숭아, 채송화, 분꽃, 옥잠화, 나팔꽃 따위를 언제나 볼 수 있었다.

그 기억을 되살려 꽃씨를 한 움큼씩 사 왔다. 담 그늘이 따라오지 못하는 볕 좋은 뜨락 가운데쯤 돌 위에 고무신을 올려놓고 흙을 담고 꽃씨를 묻었다. 이렇게 하여 꽃신이 된 것이다. 목련이 지고 나자 마침내 싹이 돋았다. 그 작은 연둣빛의 발견이 말할 수 없는 기쁨이요 즐거움이다.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본다. 무슨 꽃이 자라 올라 어떤 꽃을 피울지 두고 봐야 할 일이다.

“물을 너무 자주 주는 게 아녀요?”

집사람은 그것이 걱정이다. 꽃을 가꾸던 어머니 마음, 그 마음을 여름 내내 만날 수 있다는 기대 때문에 설레지 않을 수 없다. 요즘엔 꽃을 가득 담은 꽃신이 나란히 꽃밭으로 걸어가는 꿈을 가끔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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