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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놋그릇을 닦으며 / 임화수

부흐고비 2020. 10. 26. 15:01

우리 도시에서 제일 큰 식당 K가든 지하에 오래 묵혀 놓았던 놋그릇을 닦는다. 사람 가슴께나 오는 커다란 고무 통에 고봉밥처럼 가득 쌓인 놋그릇을 에워싸고 가랑이를 쩍 벌리고 앉은 사십대 후반의 여자들이 둘러 앉아 놋그릇을 닦는다.

담긴 음식을 다 먹을 때까지 온도 변화가 별로 없고, 음식에 독성이 있으면 색깔이 변한다고도 하고 살균력이 강해 식중독 균이 박멸 된다는, 이전 왕이나 사대부들의 밥상을 채웠다는 놋그릇은 그 이름만큼이나 주방 식구들과 홀 직원들에게서 상전 대접을 받는 그릇이다. 그 무게는 말할 것도 없고 탕을 담았을 때는 그 뜨거움으로 우리를 쩔쩔매게 만들고 씻을 때는 그냥 닦는다는 말과 박박 닦는다는 말의 차이를 뼈저리게 실감 할 수 있는 힘겨움으로 우리를 쩔쩔매게 만든다.

이전에 짚 풀에 양잿물을 묻혀서 닦았다는 놋그릇은 밤새도록 식초와 합성 세제와 소다에 담궈 두었다 수세미로 닦아도 다음날 열손가락이 곱아들도록 힘을 주어서 검은 거품이 나도록 닦지 않으면 특유의 경쾌한 구리 빛이 나지 않는다. 처음에는 닦으면 닦을수록 환해지는 재미에 어깨가 뭉치도록 힘을 주어 닦지만 열개만 닦고 나면 곧 기운이 빠지고 지겨워져서 손끝에 뻗치던 힘들이 입 쪽으로 뻗치기 시작한다. 물론 빨간 고무장갑에 시꺼먼 거품 때가 오른 손으로 귀가 가려워도 어깨로 귀를 비벼 문질러야하고 땀에 젖은 이마에 머리카락이 달라붙어도 세제가 말라붙은 고무장갑 손등으로 쓸어 올려야하는 사람들이 시사나 교양을 주제 삼아 천 번이고 만 번이고 반복하는 똑 같은 동작의 지루함을 닦아 낼 수는 없을 것이다.

값비싼 유기방짜에 담기 부끄러운 음담패설들이 거품처럼 쏟아지면 얼마나 잘 닦였나 가끔씩 그릇에 뿌려보는 물처럼 웃음이 쏟아지고 손발이 닳도록 팔 다리가 빠지도록 등골이 휘도록 살아가는 이 삶이 그저 개들이 상 붙어먹듯 가벼운 일에 지나지 않는다고 조롱이라도 하는 듯하다.

어쨌거나 그러고 있는 동안 안을 닦기 위해 옆으로 세워 더 무거워지는 놋그릇의 무게가 덜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놋그릇의 입장에서 보면 물에 대충 헹궈 식기 세척기에 넣으면 처음 구워 냈을 때처럼 반짝반짝 강 살이 퍼지는 플라스틱과 사기와 스테인레스 그릇에 비하면 놋그릇은 모진 수세미 질과 독한 화학적인 자극을 견뎌야하는 비운이 담긴 그릇이다.

밥상 위에서는 쉽게 식거나 덥혀지지 않아 음식에 대한 의리와 먹는 이에 대한 충을 저버리지 않고 그저 멍하니 담아주는 음식을 담고 밥상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음식과 사람과 교감을 하며 음식에게도 사람에게도 이롭지 않은 것들에 시퍼런 노기를 발하기에 그가 그릇 노릇하려고 당하는 수난은 눅눅치가 않은 것이다.

우리는 사람이 겪는 모든 공부를 무엇인가를 닦는 행위로 표현할 때가 많다. 도를 닦는다 라고도 하고 마음을 닦는다, 무예를 닦는다 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도도 마음도 무예도 닦아 내야 할 더러움이 많이 끼여 있는 사물인 듯하다. 도도 마음도 무예도 더 자주 더 치열하게 닦은 사람이 더 크게 성취하고 더 활짝 넓어지고 일가를 이루듯, 닦을 것 많은 그릇도 이 치열한 부대낌을 통해 빛을 얻고 자리를 얻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을 그릇이라 치면 시간의 거친 표면에 가장 많이 쓸리고, 사람들에게서 풀려나오는 독성에 가장 많이 노출된 인생들은 누구일까? 놋그릇의 빛은 놋그릇의 상처다. 다니던 식당이 망하지 않는 한 그만 두는 일이 없는 내 친구 B의 열 손가락 끝은 늘 반짝거린다. 주부 습진으로 찢어져 가던 껍질이 다 벗겨져 잘 닦은 놋그릇처럼 은은한 광택이 열손가락 끝을 감싸고 있다.

열 세평짜리 원룸에 대학생 딸과 고삼 아들을 데리고 혼자서 벌어먹고 사는 그녀의 나날은 정말 혹독한 수세미질 같다. 닦는 행위는 진정한 본래의 성질만을 남기고 본래의 것이 아닌 것들을 제거하는 행위일까? 그녀에게는 남편도 돈도 집도 차도 그녀가 아닌 것은 도무지 없다. 오로지 그녀 자신뿐인데 자식이란 건 아무리 써도 빳빳한 수세미 같다. 집에 가면 자식들에게 닦이고 직장에 나오면 혹독한 노동에 닦이고, 숨 한번 쉴만한 틈이 있나 싶으면 술과 외로움에 닦인다. 도대체 어떤 그릇이 되어 저승이라는 밥상에 오르려고 그녀의 인생은 이렇게도 닦이고 있나 싶다.

유기방짜의 금빛은 진짜 금에서 나는 빛보다 은은하고 깊고 은근슬쩍 고귀하기까지 하다. 그런데 유기방짜가 밥상에 오르기 전 부엌에서 뒹구는 꼴을 보면 흰 쌀밥을 검은 거품에 말아 먹는 것 같아 냉큼 식욕이 동하지는 않을 것이다. 굳이 애 터지게 닦지 않아도 빛나는 플라스틱, 스테인레스, 사기 그릇 같은 인생들이 얼마나 많으랴? 그래서 쉽게 깨지고 쉽게 낡고, 쉽게 버려지고 하루하루 담겨 오는 삶을 가볍게 담고 비우는 인생 또한 얼마나 많으랴?

그녀들은 오늘도 놋그릇을 닦는다. 출근길 그녀들의 발걸음처럼 무겁고 당장의 희망도 꿈도 보이지 않는 그녀들의 내일처럼 칙칙하고 어깨 근육이 뭉쳐서 늘어지도록 하루하루를 움켜쥐고 낑낑거려야 겨우 얻어지는 쥐꼬리만 한 빛처럼 희망이 귀한 그녀들의 나날을 닦는다.

사실 놋그릇을 닦으면 놋그릇에 대한 적개심을 닦아내느라 더 힘들다. 그냥 플라스틱 그릇에 먹으면 가볍고 깨지지 않고 우리의 쉬는 시간도 뺏기지 않을텐데 품격은 무엇이고 분위기는 무엇인가. 우아한 홀 조명이 비치지 않는 주방에서 우리가 흘리는 땀과 견디는 짜증들이 음식보다 먼저 담겨 있는 그릇으로 밥을 먹으면 소화가 잘 될까.

그러나 지금은 생각한다. 우리가 닦은 것은 우리들 자신이다. 이것저것 달라고 벨을 누르는 손님 앞에 다가가 어떤 터무니없는 요구를 해도 끝내 찡그리지 않는 우리들의 웃음이 저 놋그릇의 빛이다. 다 먹어가는 국에 금방 날아다니던 날파리 한 마리 빠졌다고 인터넷에 올리겠다고 야단법석인 손님에게 고개 숙이며 새 국을 끓여내기 위해 묵묵히 지피는 불꽃이 저 놋그릇의 빛이다. 어깨가 빠지도록 쟁반을 들고 자신에게 주어진 세상을 닦고 또 닦다 퇴근하면 또 다시 아이들의 먹고 누울 자리를 돌보기 위해 집 채 만 한 놋그릇을 닦는 모정이 저 놋그릇의 빛이다.

아침이다. 저것은 누가 밤새 쪼그리고 앉아 닦아놓은 놋그릇인가. 온 몸의 힘을 손목에 실어서 누군가 닦고 또 닦아 물속에서 건져 낸 놋그릇 하나 천공에 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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