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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종택(宗宅) / 석민자

부흐고비 2020. 10. 27. 14:26

한 때는 문중의 중심으로 자리해오던 종택이 세월의 무게에 몸살을 앓고 있었다. 기왓장 사이에서 잡초가 뿌리를 내리는가 싶다보면 빗물이 새어들기 시작하면서 제대로 된 균열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종택의 건재를 그 가문의 흥망과 맞물려 있다고 보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문중이 손을 모아서라도 종택을 건사하러 드는 것이 전통처럼 되어 있기 때문이다. 길을 나섰다가도 인근에 종택이 있다는 소리가 들리면 얼마간은 무리를 해서라도 들러보고 있다. 이번 걸음도 근처까지 간 김에 둘러보고 온 참이다.

종택치고는 아담한 것이 자칫 제실을 연상시키고 있었지만 허물어지기 시작한 것을 가까스로 얽어놓은 모양새가 눈시울을 젖어들게 하고 있었다. 누덕누덕 기워놓은 서까래하며 낙숫물 떨어지는 곳이나 맨땅이 드러나 보일까 양탄자를 깔아놓은 듯 이끼로 뒤덮여있는 마당하며 흡사 묘비명에 새겨놓은 활자처럼 침잠해 있었던 것이다. 한 세상을 돌아들고 나면 새것이나 헌것이나 거기가 거기라는 것을 몰라서가 아니다. 다만 검은 옷에 흰 천을 대고 기운 듯한 서까래가 보는 이의 마음을 처연하게 하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일행이 찾아간 집은 다행히 아흔을 바라보는 종부가 지키고 있었다. 집이나 사람이나 해질녘의 아궁이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며 마당으로 들어섰다. 평소엔 당신이 거처하는 방 한 칸만 군불을 지피지만 가끔은 사랑방에도 불기를 쐬어주고 있다고, 그렇게 하지 않았다간 쥐가 구들장을 거덜을 내버리기 때문이라고, 마침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일행이 들렀을 때 사랑방 아궁이에 군불을 지피고 있었다. 나는 친정어머니라도 만난 양 두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섰다. 아궁이 앞에 얼찐거리는 객이 성가스러울 법한데도 고구마까지 한 바가지 내주면서 친동기간이 듯 살갑게 맞아주는 종부의 마음 씀씀이에 고개가 수굿해졌다.

아궁이에 고구마를 묻어두고 마을 구경에 나섰다. 나가면서 보니 문지방이 절 문지방처럼 파여 있었다. 문전성시를 이룬 적이 있기는 했던가 싶던 것이 문지방을 보고 나자 고개가 끄덕여졌다. 골목길을 돌아들자 노인정이 나타났다. 요즘 농촌 풍경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번듯하게 지어진 노인정이다. 사람이 거처하고 있는 집은 집 주인만큼이나 삭아있게 마련이지만 노인정은 현대식으로 지어진 새 건물이다.

마당 앞 평상엔 바깥노인 여남은 명이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가 일행이 보이자 일제히 주목을 했다. 무료하던 차에 낯선 사람이 나타나자 아이처럼 호기심이 인 표정들이다. 흡사히 바닷가 갈매기를 닮았다는 생각을 하며 인사를 드렸다. 세월을 잘못 타고 났음이다. 늦가을 밭둑을 뒹굴고 있는 늙은 호박을 닮은 얼굴 위로 흰 무명옷으로 치장한 꼬장꼬장한 모습이 겹쳐진다.

흰옷 입은 노인들과 제사를 모시는 집으로 각인되어 있는 종택이 고향이라는 이름으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은 유년이 함께하고 있어서일 것이다. 핵가족화가 되면서 비록 종택으로서의 권위는 미미해졌다고 해도 그곳은 우리 모두의 고향으로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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