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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산책 / 맹난자

부흐고비 2020. 10. 29. 13:50

눈이 보는 대로 귀가 듣는 대로 마음에 물결이 일 때가 있다.

그런 날은 몸이 벌떡 일어나 마음더러 산책을 나가자고 한다. 동생이 형의 손목을 잡아 이끌듯이 몸이 마음을 데리고 집을 나서는 것이다. 중국 육상산陸象山이나 왕양명王陽明같은 심학心學의 철학가들은 마음이 몸을 주재한다고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몸도 마음을 선도先導할 수 있는 것 같다.

공연히 울적하여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때, 동네의 목욕탕에라도 들어가 보라. 뜨거운 물에 몸을 한참 담그었다 나오면 마음이 한결 상쾌해지는 것이다. 날씨마저 울듯이 꾸물한 날에는 더운 구들목을 지고 한나절 뒹굴다 보면 마음의 울결도 어느새 풀어지고 만다. 마음이 앓아 눕고 싶은 날은 그래서 몸이 먼저 쉰다. 몸이 가벼워지면 마음도 따라서 가벼워지는 것이다.

아파트 후문을 빠져 나와 횡단보도를 두번만 건너며 바로 개농開籠공원 앞에 닿게 된다. 옛날 임경업 장군이 우연히 한 궤짝을 얻어 열었더니 그 속에서 갑옷과 투구가 나왔다고 전한다. 개농이란 여기서 붙여진 이름이다. 입구의 표지판을 뒤로 하고 완만한 경사를 따라 공원 안으로 들어선다. 적요와 청결감, 왠지 단정한 마음이 된다.

양쪽으로 도열한 벚나무며 느티나무, 상수리나무들은 나목으로 늠름하게 서 있다. 찬바람이 귓볼을 때린다. 억울하게 죽은 임경업 장군의 심정이 되짚어진다. 남편 대신 청나라로 끌려간 그의 부인조차도 제 명을 살지 못하고 심양의 감옥에서 자결로 생을 마쳤으니 그들의 한이 어떻다 하랴.

어긋나는 인생이 어디 그들뿐이겠는가?

우리의 삶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데에, 그리고 그것을 받아 들이는데에 전 생애가 다 걸리는 것도 같다.

볼이 얼얼하도록 나는 찬바람을 맞으며 외곽으로 난 작은 길을 따라 다섯 바퀴나 돌았다. 걷는 동안 마음이 편안해졌다. 앞만 보고 부지런히 걷다 보니 자잘한 생각들이 없어지고 만다. 땅이 흡수해 들이는 것일까?

가던 걸음을 멈추고 잠시 하늘을 올려다본다. 얼음조각처럼 투명하다.

햇살이 퍼지는 이 시간대면 운동장에 나와 게이트볼을 치곤 하던 노인들의 모습도 오늘은 보이지 않는다. 발이 시린 듯 비둘기 떼만 마당에서 종종거린다.

나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정자의 육각형 지붕이 잘 바라다보이는, 내 지정석으로 가서 앉는다. 의자의 차디찬 감촉, 이럴 때, 담배를 피울 줄 안다면 한 개비쯤 뽑아 물어도 좋으리라.

여름내 푸르던 나무숲이 휑하다. 마치 머리 밑이 드러나 보이는 것처럼 춥다. 눈이 가 닿는 풍경의 표면에 따라 마음은 겨울나무 숲처럼 이내 적막해지고 만다. 찬 하늘을 머리에 인 빈 나뭇가지며, 텅빈 공원, 마음도 따라서 텅 비어져 버린다. 내 자신이 생명의 잔고 없는 통장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인생의 여름과도 같은 바쁜 시기를 나는 강남구에서 보냈다. 20년 가까운 세월이었다. 문정동으로 옮겨 앉은 것은 재작년 초겨울께. 이제 두 번째의 겨울을 맞는 심정은 제 몸의 잎을 다 털어 낸 겨울나무처럼 홀가분하면서도 조금은 쓸쓸하다. 소나무 언덕松坡 아래로 물러나 조용한 노년을 시작하자고 자신에게 타이르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물러나 앉는다는 말에는 그것이 비록 자의라 할지라도 묘한 뉘앙스가 붙는다. 때로는 패자敗者같은, 때로는 현자賢者의 은둔거사적 이미지를 떠올려 주기도 한다.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다. 하지만 정년을 맞은 남편과 함께 선뜻 여기로 물러나 앉은 데는 마음을 좀더 외진 곳에 두고자 한 뜻도 포함되어 있었다. 마음이 속세에서 멀어지면 사는 거기가 곧 외진 곳이라고 하지만 도연명陶淵明의 그러한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 보니 자연히 환경을 탓하게 되는 것이다. 다행히 이 부근에는 공원이 많다. 공기가 맑고 조용하다. 그 한적함이 외진 마음을 더욱 외지도록 만든다. 철저하게 단절되어 보는 것도 좋은 일일 것 같다.

마음을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이런 타율적인 방법도 좋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바깥 경계境界에 따라 움직이는 마음의 물결을 잠재우자면 모든 감각 작용을 차단하는 것도 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사실 벌써부터 물러나 쉴 나이가 되지 않았던가. 예순 살을 인도에서는 '산으로 가는 나이'라고 말한다. 자연으로 돌아가는 나이가 된 것이다. 스스로 하나의 자연이 되어야 하는 나이이기도 하다.

휴지기休止期를 맞아 온 산의 물을 퍼내고 숨을 고르는 저 겨울산처럼 가쁘지 않은 호흡으로, 조용히 숨결부터 다스리는 법을 배워야 하리라.

급한 물살에 격랑이 일 듯 때로는 턱없이 뛰는 가슴, 그런 가쁜 숨결부터 다스려야 하리라.

바로 며칠 전의 일이다. 뜻하지 않은 일이 생겨, 바빠진 마음으로 속을 좀 끓였더니 위가 탈이 나고 말았다. 억지로 마음을 느긋하게 하여 그 위염胃炎의 불꽃을 달래야 했다. 마음에 바쁜 일이 들어와 걸리면 이렇게 위가 탈이 나고, 신경에 한번 켜진 불이 꺼지지 않을 때는 눈에 실핏줄 터지고 마는 경우도 있다.

몸이 마음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일까?

마음처럼 몸이 되질 않는다. 오래된 양복의 안감과 겉감처럼 안과 겉이 따로 논다. 양복 밑단으로 슬며시 삐져나온 안감처럼 궤도에서 이탈을 할 때도 있다. 이래서 둘 사이의 관계는 협응이 원만하지 못하다. 몸과 마음이 하나 되는 일이 이리도 어렵다. 몸과 마음이 순일純一하게 하나가 되기 위해 나는 오늘도 이 언덕을 오르는 것인지 모른다.

낡은 수레는 먼저 짐이 가벼워야 하리라.

몸이 늙으면 마음도 몸의 속도를 따라야 한다. 가볍지 않은 발걸음을 나는 천천히 옮겨 놓는다. 찌르르 이따끔씩 무릎에 와 닿는 통증, 마음이 앞서는 날은 이래서 몸이 따라 주지 못하고 마음이 미처 몸을 따라오지 못할 때에는 저만치 앞서가던 몸이, 걸음을 멈추고 마음을 기다리는 것이다.

육신의 무게만 둔중하게 느껴지는 날은 정신이 몸을 이끌고, 그리고 이렇게 마음이 꾸물거리는 날에는 몸이 마음을 데리고 나와 이 자리에 앉는 것이다.

누가 비키라고 하지 않는 마지막 장소, 내가 나에게로 돌아가 눕는 자리다. 몸도 마음에게로 돌아가 눕는다.

귀일歸一을 위해 바쳐지는 시간이다.

나비의 두 날개가 한 장으로 접어지듯, 몸과 마음을 포개어 마침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조용히 풍화風化되고 싶다. 텅 빈 숲 둘레에 어둠이 가만가만 내려앉는다. 나는 적요 속에 한 점의 정물靜物이 되어 그냥 앉아 있다. 이윽고 편안한 어둠이 몸을 감싼다. 푸른 어둠의 바다 밑으로 잠기고 있다. 이제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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