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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반야용선 / 서영윤

부흐고비 2020. 11. 2. 09:18

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

산속에 바다가 펼쳐졌다. 육중한 전각을 떠받치는 기단에 게와 거북이, 온갖 물고기가 바다를 가로질러 뒤따른다. 기단과 기단으로 이어진 사다리 문양은 틀림없는 배의 용골이다. 측면 바다에 그려진 용비어천도에는 용이 여의주를 물고서 바다를 뚫고 하늘로 솟아오르고 있다. 그 기묘함에 조심스럽고 엄숙해진다.

계단에 새겨진 성난 파도는 금방이라도 산을 삼킬 듯하다. 파도를 타고 한 치 흔들림 없이 굳건히 자리 잡은 전각은 극락전이며 극락정토로 안내하는 반야용선이었다. 극락전을 세울 때 이미 반야용선 사상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닐까.

극락전(보물 제836호)이 자리한 곳은 청도 화양읍 송금리 대적사이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다시 중창하는 등 전란 때마다 고초를 겪었으며 지금까지 잘 보전되어 극락왕생을 바라는 중생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고 있다.

극락전은 극락정토의 주재자인 아미타불을 모신 법당이다. 대웅전 다음으로 흔한 법당이지만 반야용선을 의미하는 극락전은 바닷가 사찰에서 가끔 볼 수 있을 뿐, 내륙 깊숙한 산속에 자리 잡은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단청은 지극히 아름답고 황홀하다. 사면을 둘러보지만 눈길을 어느 한 곳에 멈출 수가 없다. 부처님을 모신 불상 위에는 닫집을 설치하였고, 주변의 천장은 연화문과 꽃잎이 다섯인 오판화, 신비함을 지닌 보상화문 단청을 올렸다. 고색창연한 모습은 수백 년의 시공을 뛰어넘어 어지러운 세상에 빛이 되고도 모자람이 없다.

기둥과 보의 장식인 공포의 화려한 배치와 용머리 장식, 구름 문양의 조각 등 전각가구들의 멋스러움이 말문을 막게 한다. 불교 건축물은 우리 민족문화에 중추적인 역할을 해왔다. 고건축 연구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고, 미의 극치인 단청은 미술문화에 지대한 공헌을 했으며 돌로 탑을 쌓아올린 석공들의 작품은 민족 문화유산으로 남아 후손 대대로 이어진다. 유럽의 중세 성당에 그려진 벽화와 그림들을 극락전 단청에 비교하면 우리 민족의 붓끝이 더 위대함을 알 수 있다.

단청에 넋을 잃고 깨어났을 때 반야용선은 바다를 가르고 있었다. 기단 소맷돌에 둥글게 돌아가고 있는 태극문과 연화문, 물고기 조각들이 반야용선을 따르며 구원을 받기 위해 승선을 한다. 기단은 출렁이는 바다와 맞닿아 미끄러지듯 물살을 일으키자 극락전 법당은 반야용선의 선실이 된 셈이다. 면석에 새겨진 거북이며 게, 물고기들이 기단을 기어오르는 광경은 구원을 받기 위한 중생들의 갈망이요, 연꽃 위에 앉아 있는 새끼 거북이는 구원으로 새로 태어났음을 알린다.

불교의 반야용선은 어지러운 세상을 넘어 생사윤회의 진리와 이상적인 경지를 깨닫고자 극락정토에 갈 때 탄다는 배를 말한다. 대적사 극락전에서 기도를 올린다는 것은 바로 이 반야용선의 구원을 받아 더 좋은 세상을 염원하는 것과 같다.

삼라만상에 존재하며 살아있는 모든 것은 언젠가 사멸을 한다. 불교에서는 이 존재자들이 윤회를 통해 같은 종이나 다른 종으로 되돌아 태어난다고 한다. 중생들은 현생에서 아집과 욕망에 사로잡혀 저지른 과오는 다음 생으로 이어지기에 구원을 받기 위해 극락전을 찾는 것은 아닐까. 만약,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현생에서 인간의 몸으로 살아가지만 다음 생에는 동물이나 다른 짐승으로 태어난다는 두려움이 반야용선에 대한 간절함을 이끌어 내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흔히들 살아가는 동안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란 말을 의식, 무의식 속에서 몇 번씩은 되뇌곤 한다. 이 말은 극락정토를 향하는 반야용선의 구원을 더욱 믿음을 가지게 하고 이승에서 공덕을 쌓고 선하게 살아가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닐는지.

아주 오래전, 이십 대에 몹쓸 병을 앓은 적이 있었다. 음식을 목으로 넘기지 못해 몸이 철사처럼 말라갔지만 현대의학으로 치료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해야 하는 운명을 두고 가슴을 쥐어짜는 울분과 한탄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문득, 절을 찾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부처님께 기도를 올리며 편안한 마음으로 운명을 맞이하는 것이 나와 가족들에게 힘을 들어 줄 것이라 여겼다. 생각대로 절 생활은 집보다 편했다.

어느 날 새벽, 주지 스님은 나를 깨워 산으로 가서 이슬을 품은 새싹 풀잎을 보이는 대로 뜯어 오라는 것이었다. 동트기 전에 새싹 풀잎을 작은 소쿠리에 담아오면 스님은 독초를 골라내었다. 남은 새싹을 갈아 즙을 내어 한 컵씩 마시기 시작했다. 보름이 지나자 절밥이 목으로 넘어가지 않는가. 한 달쯤에는 매끼마다 만복감을 느낄 수가 있었다. 두 달 만에 집으로 돌아와 몸보신을 하자 옛 모습으로 돌아왔다.

구풍연지에 태어난 새끼 거북이처럼 나 역시, 삶의 절망에서 반야용선인 부처님과 스님의 구원을 받아 새 희망을 꽃피우게 된 것은 절을 찾은 나약한 중생에게 내린 부처님의 자비라 여기고 있다.

인생은 시한부로 살아간다. 선하고 덕을 쌓은 선인이나 남을 해치며 살아온 악인이나 삶의 끝은 죽음 앞에 서게 된다. 대적사 극락전 반야용선에 오르려는 많은 수생식물은 현세인 이승에서 이해에 얽혀 남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불행에 빠뜨린 중생들은 아닐까. 어느 스님은 남의 불행으로 먹고사는 이는 제일 먼저 지옥의 나래에 빠진다고 하셨다. 살아가면서 선을 베풀고 공덕을 쌓는다면 반야용선의 구원이 아니라도 극락정토에서 다시 태어날 것이다.

어느덧, 동학산 대적사에 산 그림자가 밀려오고 극락전 반야용선은 어리석은 중생들을 구원하고자 극락의 하늘로 다시 날아오른다.

 

 

수 상 소 감

 

입상 발표 이틀 전에 날아든 문자, “입선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글 쓰는 사람들에게는 짜릿한 희열을 주는 소식입니다. 작품은 산모와 마찬가지입니다. 소재를 찾아 구성을 하고 글을 수없이 탈고를 합니다. 잉태와 출산입니다. 이같이 어려운 과정을 거친 작품의 수상 소식은 더할 나위가 없겠지요. 문학의 장르중 수필만큼 명로하게 드러나는 작품은 없을 겁니다. 원고지 15매 내에 문체, 문장, 대상의 해석, 사유와 묘사 등 작품 속에 녹아 있기에 읽다보면 모든 게 밝혀지게 됩니다. 해서 수필은 글을 쓸수록 점점 더 어려워지는 문학이 아닐까 합니다. 무엇보다도 수필 문학의 발전을 위해 공모전을 마련 해주신 대구일보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를 통해 수필 작가들은 동기부여가 돼 한 작품 한 작품을 남기게 됩니다. 앞으로도 변함없는 공모전으로 수필문학이 꽃피울 수 있도록 부탁을 드립니다. 특히 수년 동안 저를 지도 해주신 곽흥렬 교수님과 청도 도서관 수필반 회원님들에게 무한한 감사와 고마움을 전합니다.
△청도 도향 독서회 △청도 도서관 수필반 △오후수필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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