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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인(仁)을 밟다 / 이능수

부흐고비 2020. 11. 10. 09:20

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

문지방을 밟고 넘는다. 바닥에 경사면이 느껴진다. 움푹 닳아 파인 면과 닳지 않아 불룩한 바닥 면이 시차를 두고 신발에 닿는다. 올려다보니 정문에 이인문(履仁門)이란 현판이 당당하게 걸려있다. 인(仁)을 밟고 있는 내 발끝이 잠시 무거워진다.

수봉정(경북기념물 제102호)은 경북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에 자리한 수봉 이규인의 고택이다. 수천 평 면적에 수봉정, 홍덕묘, 전사청, 열락당, 무해산방, 중간 사랑채, 안채, 곳간 등이 정답게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지형 따라 둘러쳐진 담장이 이웃과 인정을 나누었던 주인의 따뜻한 마음을 전해준다. 경북문화재로 지정한 후 수리한 공간과 세월 따라 무너진 담벼락에서 지난날 융성했던 가문의 현주소를 보는 듯하다.

불국사 가는 한적한 괘릉마을에서 이인문을 만났다. 고택의 담벼락에 기댄 대문이 성큼 앞으로 나서 나그네를 반긴다. 주위환경과 어우러진 문이 마치 균형을 이룬 한 폭의 그림 같다. 곡선의 처마 끝에 푸른 하늘이 매달려 아롱대고, 쪽문 지붕 위에는 귀면와가 허공을 쳐다보고 있다. 풍상 어린 문턱으로 세월이 사람을 앞질러간다.

이인문이라는 이름은 명나라 남경 사대문의 하나에서 따왔다. 건국이념에 따라 인(仁)사상과 관련된 명칭을 궁궐의 전각과 대문 이름에 붙인 것이다. 수봉정의 대문을 이인문이라 부르는 것도, 주인이 공자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 이자를 ‘밟을 이(履)’로 해석하여 참된 인을 이루려고 한 것이 아니었을까. 공자는 설문에서 인자는 사람 人변에 두 이二가 합쳐서 만들어졌다고 가르친다. 인이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사랑을 나눈다는 의미를 지녔다. 공자는 남을 사랑하는 것을 인 실천의 시작으로, 백성과 중생을 구제하는 것을 인 이행의 마지막으로 보았다.

수봉 선생은 1859년에 태어나 78세에 돌아가신 경주 일원의 부자였다. 이재에 밝아 당대 만석꾼의 지위에 올랐다. 부를 형성하는 과정에 무리수가 따랐지만, ‘정승같이 쓰라’는 생활철학으로 만년엔 구제사업과 육영사업, 독립운동지원 사업에 흔쾌히 재산을 환원했다. 뿐만 아니라 여생 동안 인의 실천에 온몸을 던졌다.

선생의 일생은 서당인 비해당과 약국인 보인재를 보면 알 수 있다. 비해당은 일제강점기에 아이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주었고, 보인재는 빈곤한 병자에게 무료로 치료해 주었다. 수봉정을 쳐다보니 켜켜이 쌓인 선생의 영혼이 말을 걸어온다. 아이들의 꿈을 키우고 가난한 환자들의 건강을 지킬 일이 후인들이 걸어갈 이정표 하나라고.

명성황후 시해 사건으로 신돌석 장군이 을미의병을 일으켰을 때는 군자금과 생필품을 공급하였고, 독립의열단원으로 항일독립운동을 벌였던 이육사에게 군자금과 피난처까지 제공해 주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인이란 개인에서 출발하여 사회를 거쳐 나라에까지 확대될 때 제 의미를 갖는다는 사례들이다.

인의 정신은 오늘날에도 변하지 않는다. 인은 이해이고 양보이고 사랑이다. 이를 실천하는 사람을 옛날에는 군자라 불렀다. 인 사상을 통치이념으로 세웠던 때보다 현대사회에서는 사회계층 수만큼 갈등 수도 증가하고 있다. 서로가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의 이해관계에만 몰입할수록 배려의 실천은 어려워진다. 인이 내 안에 있음을 깨닫고 실천할 때 세상은 평화로워질 것이다. 더불어 화목하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이상사회이자 진정한 행복이 아닐까.

대문은 주인의 마음이며 사상의 표현이다. 남대문인 숭례문이 유교 사상의 표현이라면, 광한루 춘향사당의 단심문은 여인의 절개를 상징한다. 안동 도산서원의 유정문은 자연과 어울리려는 풍경을 뜻하고, 성주군 월항면 북비문은 이석문이 사도세자를 추모하던 정신을 나타내는 곳이었다.

이인문이 남긴 가르침은 후손들이 설립한 경주중·고등학교에서 구현된다. 운동장에 서 있는 선생의 동상은 문에서 인격을 본받아서일까, 이목구비 하나하나가 문으로 다가온다. 귀는 소리로 사람의 진실을 알아내는 ‘지혜의 문’, 눈은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심안의 문’, 혀는 음식에서 건강을 찾아내는 ‘묘미의 문’, 코는 냄새로 자연을 이해하는 ‘신비의 문’처럼 보인다.

모든 것은 마음이 지어내는 것이라 석가는 가르친다. 사람의 도리도 마음에 달렸다. 문을 여는 걸쇠가 내부에 있듯이, 마음을 여는 손잡이는 내 안에 있다. 문을 닫으면 고립되고 열면 자유로워진다. 수봉 선생도 소작인의 아픔을 깨달으면서 마음을 비웠을 것이고 자신도 고립에서 벗어나 참 자유를 누렸을 것이다.

대문의 문지방이 너덜너덜하다. 어짊을 밟아 올곧은 사람 인으로 거듭 태어난 선생의 모습 같다. 욕심의 문을 폐쇄하고 베풂의 문을 열기까지 걸린 세월이 증명하고 있다. 고택과 역사를 같이한 화단의 아름드리 반송에도 인을 닦던 주인의 고통이 옹이가 되어 울퉁불퉁하다. 대문에서 피어난 인의 향기가 방문객의 마음을 정화하는 듯하다.

이인문을 나선다. 들판에서 개구리의 합창 소리가 요란하다. 선생의 가르침을 받았던 아이들이 후손에게 인의 가르침과 실천을 잊지 말라는 소리로 들린다. 삐걱, 이인문이 열리면서 주인장이 방문객을 전송하는 듯, 등이 후끈해진다. 인과 함께 길을 나서니 마음이 편안하다.

 

 

수 상 소 감


이순의 언덕위에서 지난 세월을 돌아봅니다. 나를 힘들게 했던 고통, 절망, 아픔, 미움도 뒤돌아보니 인생이란 항아리에 세월이라는 촉매제를 넣어 발효시키는 작업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폭설과 폭우, 태풍은 자연을 지키기 위한 순환이듯, 처절했던 인생사는 행복과 삶의 의미를 깨달게 하는 교육이었습니다. 삶의 체험을 담담히 풀어내는 작품으로 자신의 상처를 치료하고 독자들의 마음을 힐링하고 싶습니다. 삶의 의미에 새로운 맛을 내는 효소 같은 작가가 될 것을 약속합니다. 늦깎이 학생 마다않고 지도해 주신 H. P. L 선생님에게 오늘의 영광을 돌립니다.
부족한 작품 뽑아주신 심사위원님에게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리며 제대로 된 작가로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그리고 US, IK 문학서클 회원과도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2015년 예술세계 신인상수상(수필부문) △에세이울산동인회 △예술세계동인회 △ 울산문협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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