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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누구나 크고 작은 상처를 지니고 살아간다. 그 상처에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들과 볼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우리들의 몸 위에서 아픔을 주던 상처는 시간이 흐르면 피가 멎고 아물어 흔적만을 남긴다. 그 흔적은 새살이 돋아난 흉터로 존재할 뿐 그것을 대할 때 새삼 고통을 느끼지는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마침내 아문 흉터를 익숙해진 내 몸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된다.

하지만 우리들의 영혼에 흠집을 내었던 상처는 시간이 흘러도 피가 멎지 않는다. 그것은 사라진 듯 하다가도 뾰족한 송곳으로 되살아나 우리의 심장 속을 후벼댄다. 응어리진 상처 그리고 미처 치유되지 않은 상처들은 어느날 홀연히 나타나 고요하던 내 핏줄들을 흔들어 깨우고 또다시 눈물을 흘리며 울어 대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관계'로 인하여 상처를 받는다. 그 관계가 나와 가까운 사이일수록 상처의 비중은 커진다. 사랑하는 연인의 변심으로, 친한 친구의 배신으로, 또는 부모의 편애 때문에 우리의 마음엔 깊고 깊은 골이 생기게 된다.

나도 수많은 상처를 지니고 있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마음껏 미워하고, 더 이상 다치지 않기 위하여 혼자만의 밀실을 마련한 나, 나를 보호하고 내 상처의 눈물을 감추기 위하여 깊숙한 구덩이를 팠다. 그리고는 스스로 그 곳에 빠져버린 어리석은 동물이 되고, 귀를 막고 눈을 감고 입에는 재갈을 물린 미움의 노예가 되기도 했었다.

나의 영혼은 또한 저급하여 알라의 신봉자도 아니면서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의 원리를 써먹기도 했다. 나를 아프게 한 상대편에게 상처를 줌으로써 보상을 받고, 치유되지 않은 내 상처를 남에게 투사하여 화내기도 했다. 이유 없이 미워도 했었다. 그리하여 마음속엔 언제나 녹지 않는 빙하가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몰랐다. 밀실 안의 공간은 자폐의 공간일 뿐, 도피를 함으로써 망가지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을... 이와 눈의 원칙보다 우선하는 부메랑의 법칙이 있다는 것을... 상처를 상처로 갚는다면 이 세상은 유혈이 낭자한 살벌스런 복마전일 뿐, 나는 진작에 어두운 밀실을 버리고 넓은 광장으로 걸어 나왔어야 했던 것이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상처에 소금을 뿌려 덧나게 하고 싶지 않다. 내 상처의 채마밭에 미움이란 거름을 더 이상은 주고 싶지 않다. 미움은 내 영혼을 갉아 먹는 병균, 그리고 그것은 끝이 없는 악순환의 고리일 뿐, 나는 이제 그 사슬에서 자유로와지고 싶다.

오십의 문턱에 선 나는 이제야 알 것 같다. 인간의 영혼이 동물의 그것과 다른 이유를... 나에게 상처를 준 이를 용서하는 일이 곧 나를 치유하는 것임을... 내가 상처 입힌 사람에게 용서받음으로써 진정한 평화가 온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또 아는 게 있다. 성인이 아닌 우리에게 용서란 얼마나 하기 힘든 것인지를... 하지만 인디언 속담에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어떤 사람을 이해하려면 그 사람의 신을 신고 일 마일을 걸어 보아야 한다는 그 말. 남의 신을 신고 일 마일을 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나의 눈높이가 아니라 그의 지평에서, 그 사람의 입장에 서서 그를 본다면 조금은 쉬워지지 않을까. 이해하고 마침내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

누구나 가슴 속엔 녹지 않는 빙하가 있다. 그 위에 떠 있는 크고 작은 빙산들... 그의 아픔을 보듬고 싶지만 두 개의 눈 밖에 없는 나는 그것을 보지 못한다. 만약 나에게 어린 왕자의 눈이 있다면 그 맑은 심안으로 빙산들을 보아내고, 수면 아래 얼어붙은 뿌리마저 헤아릴 수 있을 텐데... 그리하여 쓰라린 우리는 서로에게 익숙히 길들여질 텐데...

혹은 나에게 천 개의 눈이 있다면 나는 그의 슬픔을 단번에 꿰뚫어 보고, 천 개의 눈에서 흐르는 뜨거운 눈물로 그 차가운 빙산을 녹일 수 있을 텐데... 그리하여 그 빙하가 나의 눈에서 그의 눈으로, 그의 가슴에서 나의 가슴으로 흐르게 할 수도 있을 텐데...

그 해빙의 봄날을 위하여, 나는 그를 얼싸안고 그는 나를 껴안으며 서로를 사랑하고 싶다. 두 뺨을 부벼대며 맨 발로 걸으며, 우리는 모두 그렇게 사랑하고 싶다. 사랑이 없는 용서란 위선의 몸짓임을 알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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