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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흙이 되신 아버지 / 강호형

부흐고비 2020. 11. 16. 12:50

유년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 나가다가 혼자 웃을 때가 있다. 두살 아래인 동생이 기저귀를 차고 마당에서 엉금엉금 기어 다니다가 닭똥을 주워 먹던 일 따위를 떠올릴 때가 그런 경우인데, 이처럼 하찮은 일은 기억을 하면서도 정작 있었을 법한 일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떠오르는 것이 없어 안타까울 때도 있다.

아버지는 나이 삼십이 되어서야 나를 낳았다. 아버지에게는 형님이 두 분 있었지만 큰형님은 딸만 둘을 두고 일찍 세상을 떠나셨고, 둘째 형님은 만주를 떠돌면서 소식조차 없던 터라 형님들을 대신하여 부모님을 모시던 아버지로서는 대를 이을 책무까지 다한 셈이었다.

사정이 그러했던 만큼 조부모님을 비롯한 가족들의 나에 대한 사랑은 내 기억으로도 대단한 것이었다. 둘때 고모는 시집을 가서도 내 생각이 나서 울었다고 할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마땅히 있었음직한 아버지의 사랑에 대해서는 특별히 기억나는 것이 없다. 이렇게 말하면 독자들은 혹시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고도 60여 년을 더 사시다가 9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사람들은 인생이 짧다고 한탄하지만 아버지의 일생은 결코 짧은 것이 아니었다. 구한말에 태어나서 문민정부 하에 생을 마치셨다면 파란만장한 한국 근대사를 고스란히 겪어낸 셈이다. 그 질곡의 한 세기를 살아 보지도 않고 누가 감히 짧다고 할 것인가.

나도 이제는 아버지 생애의 3분의 2를 살았다. 그러나 아버지와 같이 살았던 60여 년을 다 더듬어 봐도 아버지에게 애틋한 사랑을 받았던 기억이 없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나를 미워한 기억도, 내가 아버지를 크게 원망한 기억도 없다. 아버지는 마구간의 어미 소처럼, 나는 젖 떨어진 송아지처럼 그렇게 살았을 뿐이다.

음력설을 하루 앞둔 날 아버지를 차디찬 땅속에 묻으면서도 나는 울지 않았다. 봉분에 흙을 올리면서 지금 아버지의 유언을 따르고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했다. 게다가 나는 언제부턴가 저승은 이승보다 훨씬 좋은 세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하고 있던 터였다.

아버지는 어느 날 계모의 무덤 옆을 발끝으로 짚으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죽거든 여기다가 묻거라. 나는 평생을 흙에서 나서 흙만 파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니 무덤은 돌볼 수 있으면 돌보고, 돌보지 않아서 숲이 우거져도 개의할 것 없다."

흙에서 났다고 믿으신 아버지가 그렇게 흙으로 돌아가신 지도 두 해가 지났다. 처음에는 나의 생모와 계모를 나란히 대동하고 누우신 아버지가 한없이 편안해 보이더니 날이 갈수록 가슴속에 고여 오는 것이 있다. 6.25전쟁 통에 홀아비가 되어, 할머니가 몸살이라도 나신 날이면 손수 밥을 짓던 아버지 모습을 생각하면 눈물이 고이고, 돌아가시기 전 두 달여를 병원에서 지내시는 동안 날만 새면 집에 가자고 어린애처럼 조르시던 처량한 모습이 떠오르면서 가슴이 아파 온다. 평생 병원이라고는 60대에 좌골신경통으로 한 번, 90대에 낙상으로 한 번밖에 가본 일이 없는 아버지였던 만큼 산소관, 링거관, 배뇨관을 주렁주렁 달고 대변 시중까지 받는 것이 지겨우셨을 것이다.

아버지는 평생을 통해 남에게 신세지는 것을 싫어하셨다. 병원에 있는 동안에도 며느리는 물론 딸이나 간호사에게조차 대변 시중받기를 거부하시는 바람에 내가 주로 그 일을 맡아 해야 했는데 어느 날인가는 병원 앞 식당에 내려가 점심을 먹고 돌아오니 옆 병상 환자의 부인이 웃으면서 돈 만 원을 내미는 것이었다.

"할아버지(우리 아버지)가 아드님 좀 찾아 달라고 이걸 주시네요." 하는 것이었다. 내가 아버지의 5남매 중 장남이란 사실을 잊고 살지는 않았지만 그때처럼 그것을 절감한 적은 없었다.

"얘야, 내일은 저 소나무 숲이 있는 언덕에 가서 사진이나 한 장 찍어 가지고 집으로 가자. 여긴 내가 살 데가 못 된다."

병실 창문 밖에는 빌딩 숲만 보일 뿐인데도 그렇게 애원하시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뭔가 허깨비를 보고 계신 것이 분명했다. 당신이 가실 저승을 보신 것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다 늙은 아들을 석 달 가까이나 붙잡아 두는 것이 미안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가 내게 애정 표현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은 애정이 없어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인생 역정이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란 것을 짐작하게 되었다. 내가 어렸을 때는 할아버지, 할머니 앞이라 내색하기가 어려웠을 것이고 어머니를 잃고 나서는 내가 서울에 와서 학교에 다니는 동안 재혼을 하셨으니 소심한 아버지로서는 전처의 소생들에게 각별한 정을 쏟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아버지는, 제사는 세 번씩 지낼 것 없이 누구의 제사든 한 번만 지내라는 유언도 남기셨다. 나는 물론 그 유언만은 지키지 않고 있다. 새 어머니에게서 뒤늦게 남매가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그 아이들이 내게 짐이 되지 않을까 걱정하시는 눈치였다. 제사를 한 번만 지내라는 말씀도 그런 뜻이었음이 분명하니 유언이라고 해서 반드시 지킬 필요는 없을 것이다.

계모마저 돌아가시고 난 어느 날 차를 몰고 선영 앞을 지나다가 무덤 앞에 망연히 앉아 계신 아버지를 발견하고 차를 세웠다.

"아버지, 산소엔 뭘 하러 오셨어요?"

"밤 떨어졌나 보러 왔다."

아버지는 몹시 어색한 심기를 애써 감추면서 그렇게 말씀하셨다. 밤나무를 쳐다보니 밤송이는 아직 새파랬다. 나는 아버지를 모시고 돌아오면서 두 번이나 상배喪配를 당하신 외로움이 헤아려져 속으로 울었다.

평생 내 자식도 드러내 놓고 사랑해 보지 못한 아버지, 흙에서 나서 질곡의 한 세기를 흙에서 사시다가 흙으로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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