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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에세이 모노드라마 / 조재은

부흐고비 2021. 2. 9. 15:59

백지는 텅 빈 무대다.

작가는 종이 위에서 연출자이고 모노드라마의 배우이다. 백지 위의 공연은 몇 백 회를 넘어도 막이 올라가면 심장이 멎는 듯하다. 배우는 관객의 마음을 피땀 흘리는 연기 하나로 사로잡아야 한다. 객석의 불이 꺼지고 무대에 밝은 조명이 켜지면 순간, 배우는 앞이 보이지 않고, 오직 자신만을 응시하는 무서우리 만치 냉정한 관객의 시선을 온몸으로 느낀다.

절대 고독의 순간이다.

백지 위의 첫 줄, 호흡을 맞출 상대역도 연출도 없는 무대에서 첫 동작을 시작한다. 비어있는 백지는 거대한 강이고 하나의 문자는 작고 작은 돛도 없는 조각배다. 상처 난 손으로 힘없는 노를 저어 거센 강의 물살을 헤쳐 가야 한다. 물살에 잡혀 강의 심연으로 가라앉을 것 같은 두려움에 사로 잡힌다.

모노드라마의 배우가 된 것은 세상에 방관하는 빚을 지지 말고 삶의 핵을 가슴에 안고 뜨겁게 살고 싶은 욕망의 단죄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자신을 확인하려는 가장 독한 방법으로 원고지의 칸을 메우는 길을 택한 것인지도. 그도 아니면 영원히 해갈되지 않는 그리움을 품고 살기 때문일 게다.

얼음 무대 위에서 갈등과 고뇌로 점철된 대사를 읊조리는 햄릿을 보았다. 러시아 극단의 ‘햄릿’ 공연은, 햄릿의 고뇌를 얼음으로 만든 무대장치로 표현했다. 햄릿의 머리 위에는 수정 대신 얼음을 쪼아 조각으로 만든 샹들리에를 걸어 놓았다. 조명을 받은 얼음이 햄릿의 머리 위로 뚝뚝 녹아 떨어지고 고뇌하는 햄릿의 얼굴에 얼음 눈물이 흘렀다. 맨발로 서 있는 발은 시린 단계를 지나 아픔을 느끼는 듯, 한 발씩 들고 고통을 참고 있었다. 대사가 러시아어라 알아듣지는 못해도 배우의 몸짓과 무대 연출은 어느 공연보다 햄릿의 고뇌가 잘 전달되었다. 머리와 발에 냉기와 아픔을 참으며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하는 배우와, 참을 수 없는 고뇌를 얼음으로 표현한 연출자의 감각을 보며 예술의 팽팽한 엑스터시를 느꼈다. 예술의 사명은 관객과 독자의 가슴에 파문을 일으켜야 하는데……. 나의 모습을 살핀다.

수필의 무대 위.

나도 이제 백지의 무대에 나갈 시간이다. 객석 구석에 앉아 자신을 응시한다.

무대 의상은 정결한 손과 피 흘리는 가슴이다. 손을 씻는다. 하얀 비누 거품으로 두 손을 오래도록 비빈다. 물을 될수록 세게 틀고 물방울이 튀는 것을 본다. 물이 살아 움직이고 이야기를 쏟아 내는 듯하다. 세상과 나의 이야기, 그 소리를 들어야 한다. 더 잘 듣기 위해 귀를 얼얼할 때까지 후빈다. 그다음 의식은 조금씩 정성스럽게 손톱을 깎는다. 너무 짧게 깎아 아픈 손가락에 밴드를 감는다. 글의 무대에 오르기 전, 의식을 끝낸다.

나를 발견하고 타인에게 다가가려는 동작을 시작한다. 기억의 창고를 열고 가슴의 상흔들을 꺼내 살펴보니 모두가 남루하고 빈한하다. 길거리에 내놓은 비 맞은 이삿짐 같다.

초조한 마음으로 책을 읽기 시작한다. 참고해야 할 부분이 들어있는 책을 찾는다. 한 권, 두 권, 여기저기서 뽑아낸 책이 십여 권 주위에 쌓인다. 찾던 부분을 잊고, 쓰고자 하는 방향을 잃는다. 책 속의 언어들이 머릿속에서 얽힌다.

기진한 신경을 위로받고 순화와 안정이 필요해, 볼륨을 마음껏 높이어 음악을 듣는다. 음표들이 춤을 추며 뇌 속 신경을 살며시 감싼다. 멜로디의 울림이 온몸에 전해지며 얼음 발판에 서 있는 것 같은 고통이 조금은 완화된다. 고통의 무풍지대다.

흰 종이의 무대에서 대사를 다시 시작한다.

발음은 정확하게, 관객에게 감정 전달이 잘되게, 연기는 과장하지 않고 표정이 자연스럽게. 무대 위의 계율을 머리에 넣어 둔 채 목이 쉬도록 연습을 했는데 실제 공연에서는 서툰 목소리와 몸짓이 나온다. 그러나 무대에 오르면 쓰러지더라도 연극은 계속해야 한다. 배우의 어떤 사정도 관객은 눈감아 주지 않는다. 부모의 상을 당해도 희곡에서 웃어야 하는 장면이면 커다랗게 웃어야 하는 게 배우의 숙명이다.

지우고 몇 번씩 고쳐 써도 단어들은 서로 화합하지 않고 부딪치고 밀어낸다. 문장은 떠오르지 않고 구성도 거칠어 자주 멈추게 되지만, 약속된 분량은 채워져야 한다. 거짓된 포장이 통하지 않는 게 인쇄된 작품이라는 생각을 하면 온몸에서 진액이 나온다. 투쟁의 몸부림이 끝나고 마지막 문장에 마침표를 찍는다. 컴퓨터 구석에 자리한 ×표를 눌러 출구로 빠져나온다.

객석의 불이 켜지고 막이 내린다.

그러나 박수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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