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시詩 느낌

신철규 시인

부흐고비 2021. 2. 14. 02:57

검은 방/ 신철규

 

 

슬픔의 과적 때문에 우리는 가라앉았다

슬픔이 한쪽으로 치우쳐 이 세계는 비틀거렸다

 

신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지만 그것이 일반명사인지 고유

명사인지 알 수 없어 포기했다

기도를 하던 두 손엔 검은 물이 가득 고였다

 

가만히 있으면 죽는다

최대한 가만히 있으려고 할수록 몸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딱딱해지고 있었다

 

해변에 맨발로 서 있던 유가족

맨살로 닿을 수 없는 거리가 그들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죽을 때까지 악몽을 꾸어야 하는 사람들의 뒷모습

학살은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꾸는 악몽 같은 것

 

손가락과 발가락까지 피가 돌지 않고

눈이 심장과 바로 연결된 것처럼 쿵쾅거렸다

 

모든 것이 가만히 있는 곳이 지옥이다

꽃도 나무도 시들지 않고 살아 있는 곳

별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멈춰서 못처럼 박혀 있는 곳

죽은 마음, 죽은 손가락, 죽은 눈동자

 

위로받아야 할 사람과 위로할 사람이 한 사람이라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기도밖에 없는 것인가

 

우리는 떠올라야 한다

우리는 기어올라야 한다

누구도 우리를 끌어 올리지 않는다

 

가을이 멀었는데 온통 국화다

가을이 지난 지가 언젠데 국화 향이 이 세계를 덮고 있다

컴컴한 방에 검은 비닐봉지를 쓰고 앉아 있는 것처럼 숨

이 막힌다

꿈속에서도 공기가 희박했다

 

해변은 제단이 되었다

바다 가운데 강철로 된 검은 허파가 떠 있었다

 

 

심장보다 높이/ 신철규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는데 전기가 나갔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녹슨 슬픔들이 떠오른다/ 어두운 복도를 겁에 질린 아이가 뛰어간다// 바깥에 아무도 없어요?/ 내 목소리가 텅 빈 욕실을 울리면서 오래 떠다니다가 멈춘다// 심장은 자신보다 높은 곳에 피를 보내기 위해 쉬지 않고 뛴다/ 중력은 피를 끌어내리고/ 심장은 중력보다 강한 힘으로 피를 곳곳에 흘려보낸다// 발가락 끝에 도달한 피는 돌아올 때 무슨 생각을 할까/ 해안선 같은 발가락들을 바라본다// 우리가 죽을 때 심장과 영혼은 동시에 멈출까/ 뇌는 피를 달라고 아우성칠 테고/ 산소가 부족해진 폐는 조금씩 가라앉고/ 피가 몸을 돌던 중에 심장이 멈추면 더이상 추진력을 잃은 피는 머뭇거리고// 나아갈 수도 돌아갈 수도 없고/ 할 말을 찾지 못해 바싹 탄 입술처럼/ 그때 내 영혼은 내 몸 어딘가에 멈춰있을까// 물이 심장보다 높이 차오를 때 불안해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깊은 물속으로 걸어 들어갈 때/ 무의식중에 손을 머리 위로 추켜 올린다// 무너질 수 없는 것들이 무너지고 가라앉으면 안 되는 것들이 가라앉았다/ 물속의 얼굴들은 반죽처럼 흘러내렸다/ 덜 지운 낙서처럼 흐릿하고 지저분했다// 누군가가 구겨버린 꿈/ 누군가가 짓밟아버리는 꿈// 어떤 기억은 심장에 새겨지기도 한다/ 심장이 뛸 때마다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번져간다// 나는 무섭고 외로워서 물속에서 울었다/ 무섭기 때문에 외로웠고/ 외로웠기 때문에 무서웠다/ 고양이가 앞발로 욕실 문을 긁고 있다// 다시 전기가 들어오고 불이 켜진다/ 물방울을 매달고 있는 흐린 천장이 눈에 들어오고// 어둠과 빛 사이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서로를 조금씩 잃어가면서/ 서로를 조금씩 빼앗으면서// 납덩이가 된 심장이 온몸을 내리누른다//

유빙(流氷)/ 신철규

입김으로 뜨거운 음식을 식힐 수도 있고 누군가의 언 손을 녹일 수도 있다 눈물 속에 한 사람을 수몰시킬 수도 있고 한 방울이 그를 얼어붙게 할 수도 있다 당신은 시계 방향으로, 나는 시계 반대방향으로 커피 잔을 젓는다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우리는 마지막까지 서로를 포기하지 못했다 점점, 단단한 눈뭉치가 되어갔다 입김과 눈물로 만든 유리창 너머에서 한 쌍의 연인이 서로에게 눈가루를 뿌리고 눈을 뭉쳐 던진다 양팔을 펴고 눈밭을 달린다 꽃다발 같은 회오리바람이 불어오고 백사장에 눈이 내린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하얀 모래알우리는 나선을 그리며 비상한다 공중에 펄럭이는 돛새 하얀 커튼해변의 물거품시계탑에 총을 쏘고 손목시계를 구두 뒤축으로 으깨버린다고 해도 우리는 최초의 입맞춤으로 돌아갈 수 없다나는 시계 방향으로 당신은 시계 반대 방향으로 우리는 천천히 각자의 소용돌이 속으로 다른 속도로 떠내려가는 유빙처럼,//

거기, 누구/ 신철규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림자를 깎고 있는 남자를 보았다. 그는 축축한 벽에 기대어 땅위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둥근 조각칼로 오리고 있었다, 그것을 파내면 자신이 그 골목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듯이, 단호하고도 집요한 손놀림으로, 손끝이 부르르 떨린다. 그는 절벽 앞에 선 사람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생을 도려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거기, 누구요? 그가 갑자기 고개를 들고 내 쪽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의 때 묻은 손톱이 잠깐, 침침한 가로등 불빛에 반짝, 빛났다. 우리들의 머리 위로 전깃 줄이 잉잉거리고 있었다. 그는 다시 작업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작업이 성공할까봐 조마조마했다. 그가 작업을 끝내고 내게 뚜벅뚜벅 걸어 와 내 손을 끌고 그 자리에 나를 앉히고 홀연히 떠날까봐, 두려웠다. 나는 발가락 끈으로 따을 있는 힘껏 누르고 있었다. 그의 작업이 발뒤꿈치를 지나 발가락 끝에까지 다다랐을 때, 그림자가 일어나 그의 위에 쓰러졌다. 그리고 나는 뒷걸음치며 골목을 빠져나왔다, 그 축축하고 침침한 골목을.//

늑대의 진화/ 신철규

노란 보름달을 보고 있으면/ 손을 가지런히 모으게 된다/ 두 손을 땅에 대고 컹컹/ 짖고 싶다/ 삶은 계란 노른자를 먹을 때처럼/ 목이 뻑뻑하고/ 꼬리뼈가 조금 자라는 느낌이 든다/ 퇴근길, 덜컹거리는 만원버스 안/ 엉덩이를 맞대고 있던 그 여자/ 가릴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던/ 서로의 꼬리뼈가 닿을 때마다/ 발톱이 신발을 뚫고 나올 것 같았다/ 경사진 언덕을 오를 때마다/ 손을 땅에 대고 걸으면 얼마나 좋을까/ 계속 바닥으로 쏠리는 얼굴을 들기 위해/ 엉덩이를 쭉 빼고/ 집에 와 손을 씻으며/ 오늘도 손을 더럽히지 않았구나, 안도하며/ 얼굴을 점점 덮어오는 털을 쓰다듬는다//

당신의 벼랑/ 신철규

마지막 연락선이 바다에 몸을 맡긴다/ 천천히/ 박음질을 하며 나아가는 배/ 꽁무니에 하얀 실밥이 풀려나온다/ 갈매기들이 머뭇거리다가 선착장으로 돌아간다/ 너무 멀리 가면/ 돌아올 곳을 잃어버린다/ 빛과 어둠이 만든 붉은 주름이 조금씩 뒷걸음친다/ 실핏줄이 돋아난 바다/ 비문처럼 떠 있는 바지선들/ 고물이 들썩거릴 때마다 흔들리는 당신의 속눈썹/ 등대의 불빛이 검은 수평선을 향해 뻗어간다/ 등대의 밑은 어둡다/ 섬 뒤에 숨은 또 하나의 섬/ 당신 속에 가라앉는 또 하나의 당신/ 뒤돌아선 당신의 뒷모습이 벼랑 같다/ 벼랑의 뿌리를 핥는 파도가 하얗게 부서진다/ 우리는 너무 멀리 왔다/ 서로 밀어내며 좀 더 짙어졌을 뿐,/ 속눈썹 위에 걸려 있는 말들이 파르르 떤다/ 반환점을 돌 때 우리는 잠시/ 포개졌다가 다시/ 멀어진다 마주잡은 손 틈으로/ 미세한 전율이 지나간다/ 우리가 실밥 같은 웃음을 주고받을 때/ 우리의 등 뒤로/ 먹구름들이 꿈틀대며 몸을 비빈다//

영문법 시간/ 신철규

쉽게 오는 것은 쉽게 가고/ 눈에 보이지 않으면 마음에서 멀어지고/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 쉽게 오는 것도 쉽게 가고 어렵게 오는 것도 쉽게 간다/ 나는 쉽게 와서 쉽게 가고 너는 쉽게 와서 어렵게 간다/ 건너편 플랫폼에서 쪼그려 앉아 울고 있는 저 여자/ 남겨진 손바닥 지문은 입김을 불 때마다 되살아난다/ 한쪽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고 지하철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리던 사람들/ 간절한 것들은 저마다의 가슴 속에서 가라앉고/ 사람들은 눈을 감고 이리저리 흔들리며/ 간절했던 것과는 반대 방향으로 흘러간다/ 나는 나의 의지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았다/ 난자를 뚫고 들어간 정자는 도화선의 생을 마감했다/ 무한한 세포 분열은 죽음을 향해 간다/ 더 이상 분열될 수 없을 때 눈에 어둠이 내려앉는다/ 지구에 모든 경사가 사라지면 돌은 구르지 않는다/ 멀리 있는 것들이 궁금할 때가 있다/ 태양 별 은하수 빙하 사막 적도 그리고 당신/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은 멀리 있고/ 멀리 있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다/ 너는 너무 멀리 있고 또 너무 가까이 있다/ 내가 보이지 않는 것은 내가 너무 멀리 있기 때문이다/ 햇살이 가파른 경사를 그으며 너무 먼 곳에서 와서/ 내 가까이에서 부서진다 구르는 돌은/ 언젠가는 멈추고 이끼가 몸을 덮는다/ 나는 손바닥에 얼굴을 묻는다//

서울로 못 간 金봉달씨 / 신철규

경찰 나으리, 서울 좀 보내도, 내사 뭐 거게 살러 가나, 봉제 공장에서 손 잘리고 촌에 들어와서 소 몇 마리 키운 게 죄는 아니잖여, 세발소시랑 같은 내 손꾸락 좀 봐, 내가 이 손으로 뭘 하것어, 남의 멱살 잡기도 힘들고 간신히 막걸리 잔이나 들 수 있는 손이여, 손꾸락이 세 개인 놈은 서울 구경하면 안 되는 법이라도 있능겨?// 경찰 양반, 그냥 조용히 국회의사당 앞에만 있다 올꾸마, 테레비에서나 보던 말린 소똥맬로 생긴 그 건물이 보고 잪아서 그랴, 국회의사당 입구에 쪼르륵 대기하고 있는 소똥구리 같은 승용차들에는 손도 안 댈겨, 트랙터 뒤에 실린 삽이며 소시랑이며 꼬깽이는 뭐냐꼬? 농투성이한테 연장을 와 들고 다니는지 물으면 할 말이 없제// 이봐, 형씨, 그만 좀 팍팍하게 굴고 나 좀 지나가게 해도, 내가 돈을 안 냈나 와 톨게이트를 못 지나노, 농가보조금은 다 없어졌제 쌀직불금은 어만 사람이 받아묵제, 간신히 소 몇 마리 키운 거 구제역 땜에 산 채로 땅 속에 파묻으라 카는 게 말이 되나? 겡찰은 궁민이 어려울 때, 힘든 곳에 달려가는 거 아이라, 이럴 시간 있으면 우리 축사에 가서 소들 여물이나 좀 주고 와// 경찰 나으리, 서울 갈 차비가 없어서 트랙터를 끌고 나온 겨, 아, 나도 도로교통법 정도야 알지, 자동차 아닌 것들은 고속도로에 못 나오는 거 알고 주말이면 1차선이 버스전용차로인 거도 알지, 여물만 먹고 가만히 있는 소들을 내 손으로는 못 파묻것어, 젖도 안 뗀 송아지들이 무슨 죄인겨// 어이, 김순경, 해는 설렁설렁 넘어가는디 니캉 내캉 와 여게서 이래 실랑이하는지 모르것어, 내사 손가락 잘린 데가 욱신거리서 못 있것네, 담에 보면 아는 척혀, 막걸리 한 잔 살 텡께, 할랑할랑하게 살기가 힘든겨, 니캉 내캉 원수진 것도 없는디 와 이카고 있는지 참말로 모르것어, 해는 설렁설렁 넘어가는디//
* 내미: ‘냄새’의 방언(경상).

슬픔의 바깥 - 하루살이 / 신철규

밤길을 달려 시골집에 갔다. 통영대전 고속도로에서 무주 IC로 빠져 빼재를 넘어오는 동안 마주 오는 차가 한 대도 없었다. 헤드라이트 불빛 앞으로 하루살이들만 어지럽게 명멸했다. 시골집에 도착하니 식구들은 모두 잠들어 집안은 괴괴했다. 달이 헤드라이트를 켜고 시골집 마당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달빛을 밟으니 발밑에서 뽀드득 소리가 났다, 눈밭을 걷는 것처럼.// 다음날 오전 어머니와 면소재지에 있는 농협에 갔다. 앞 유리에 눌어붙은 하루살이의 시체들을 와이퍼로 닦아냈다. 나와 동생의 결혼식 때문에 사과밭을 담보로 잡고 낸 농협 빚과 인삼조합, 원예조합 등에 흩어져 있던 빚들을 지워나갔다. 지난해 빌려 쓴 농약과 농자재 대금마저 치르고 나니 통장이 가벼워졌다. 어머니는 그 많은 숫자들이 영으로 바뀐 것을 몇 번이고 확인했다.// 포근한 봄 햇살로 더워진 공기를 식히기 위해 차창을 내렸다. 어머니가 왼손가락에 침을 묻혀 오른쪽 손등을 문질렀다. 야야, 이것 봐래이. 손등에 점이 난 것 맬로 닦아도 닦아도 안 지워지는 기라. 월면처럼 우둘투둘한 손등에 검버섯이 몇 개 피어 있었다. 눈앞에 하루살이가 날아다니는 것처럼 어지러웠다. 햇살이 내 가슴을 꾹꾹 밟고 있는 것처럼 따가웠다.//

 



신철규 시인은 1980년 거창군 고제면에서 태어났다.

거창 대성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및 동 대학원 박사과정

201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  [CULTURA] 2018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시 - 신철규 시인 인터뷰

 

2018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시 - 신철규 시인 인터뷰 - 쿨투라

그는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때 : 2018년 2월 12일 월 오후 5시 / 곳 : 서촌 시민행성 / 질문자 : 함돈균 신철규는 조용한 시인이다. 요즘 젊은 작가들이 아이돌처럼 발랄하고 능동적으로 문학행

www.cultura.co.kr

 

'시詩 느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산山 / 지은이 불명  (0) 2021.02.15
신처용가新處容歌 / 원용수  (0) 2021.02.15
정끝별 시인  (0) 2021.02.13
오광수 시인  (0) 2021.02.11
정호승 시인  (0) 2021.02.09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