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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름은 / 송병순

부흐고비 2021. 4. 21. 09:13
번 역 문


설 문청이 일찍이 “만 번의 말이 모두 맞는 것이 한 번의 침묵만 못하다.”라고 하였는데, 나는 이 말이 의아했다. 대개 사람의 말과 침묵이란, 말해야 할 때는 말하고 침묵해야 할 때는 침묵해야 비로소 법도에 맞거니와, 침묵해야 할 때 말하고 말해야 할 때 침묵하는 것은 실로 불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야 하는지와 해서는 안 되는지의 여부를 도외시한 채 침묵으로만 일관한다면 불가의 적멸(寂滅)에 가깝지 않은가. 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는 것은 하늘이지만 우레 소리는 그윽하고 말 없는 중에서 일어나지 않음이 없으니, 또한 침묵으로만 일관하는 것은 아니다. 무릇 하늘과 덕이 합치하고 이치가 같은 사람은 성인뿐이다. 이 때문에 주자의 〈감흥(感興)〉 시에 “하늘은 그윽하고 말이 없으니 중니께서 말을 안 하려 하셨네.”라고 하였으니, 이를 보면 성인은 말하고 침묵하는 데 때가 있음을 또한 알 수 있다. 영남의 이희언 군이 그 서재에 ‘묵재’라는 편액을 걸고 나에게 이에 대해 글을 써달라고 청하였다. 희언, 그대는 중니를 배우려는 사람인가, 아니면 문청을 본받으려는 이인가? 나는 그 뜻을 묻고자 하노라.

아, 근일에 사설이 세차게 일어남에 사람들의 마음이 휩쓸리니 온 세상 가득 시끄러운 것은 모두 의리를 등지고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이다. 그대는 이를 경계하여 뒤로 물러나 침묵에 의탁하려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대가, 말을 하려 하지 않은 중니를 사모한다는 것을 실로 알겠다. 또 한 가지 물을 것이 있다. 그저 성인을 사모하기만 할 뿐 경서에 침잠하여 체험하는 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그 침묵은 단지 입을 닫는 것일 뿐이니, 실천에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진실로 일상생활 속에서 동할 때나 정할 때나 마음을 수렴하고 이익의 유혹을 끊어내어 반드시 성인의 긴요한 가르침을 모범으로 삼아 실천해 나가야 하니, 그래야 비로소 침묵으로 이루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원  문


薛文淸嘗謂萬言萬當, 不如一黙, 余竊疑之. 蓋人之語默, 當言則言, 當黙則黙, 方有儀則, 而當黙而言, 當言而黙, 則固不可耳. 然抛郤其當不當, 而一主乎黙, 則不幾於釋氏之寂滅乎? 彼無聲無臭者, 天也, 而雷聲未嘗不自幽黙中發, 則亦非一於黙也. 夫人之於天, 合其德同其則者, 惟聖人能然. 故朱子感興詩云, 玄天幽且黙, 仲尼欲無言. 觀此, 亦可見聖人之語黙有時也. 大嶺之南, 李君希彦顔其齋曰黙, 要余識之. 希彦乎! 子欲學仲尼者歟? 抑效文淸者歟? 余欲叩其志. 噫! 近日邪說蠭起, 人心流蕩, 溢世啾喧, 皆背義趨利者, 則子其懲於此而退託於黙歟? 然則固知子之志慕在仲尼之欲無言乎! 又有一可叩者, 徒有志慕聖人, 而若於謨訓, 無沈潛體驗之工, 則其黙也, 只閉口而已, 何益於實踐哉? 苟日用動靜之間, 收其本原, 絶其利誘, 必以聖門之正法眼藏依樣做去, 始可謂黙而成之也.

-송병순(宋秉珣, 1839~1912), 『심석재집(心石齋集)』 18권, 「묵재기(默齋記)」

 

조선후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생존한 학자 송병순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900년에 간행한 시문집으로 송병순의 아들 송증헌(宋曾憲)이 편집·간행하였다.

 

 

해 설


위는 송병순이 이병철(李柄喆)에게 지어준 글이다. 이병철은 자가 희언(希彥)으로, 생몰연대 및 행적은 자세하지 않다. 다만 작자의 형 송병선(宋秉璿)의 『연재집(淵齋集)』 연보를 보면 송병선의 자질(子姪) 혹은 문인(門人)이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송병선을 중심으로 한 인맥 속에서 작자와도 비교적 가까운 관계였던 것으로 보인다.

작자는 먼저, 침묵을 극단적으로 지향하는 설선(薛瑄, 1389~1464)의 말을 제시한다. 그러나 곧 침묵으로만 일관하는 것은 불가(佛家)의 적멸(寂滅)에 가깝고, 말해야 할 때는 말하고 침묵해야 할 때는 침묵해야 한다며 설선의 말을 비판한다. 작자가 생각하는, 말과 침묵을 시의적절하게 가장 잘 구현하고 있는 대상은 하늘이다. 하늘은 평소에는 고요하지만 때가 되면 우레 소리를 낸다는 것이다. 인간의 영역으로 넘어오면 하늘과 가장 비슷한 속성을 가진 성인이 있으니, 바로 공자이다. 작자는 주자의 시를 인용하여 공자가 말을 하려 하지 않는 이유를 암암리에 말이 없는 하늘에게서 찾고 있다.

그렇다면 설선의 침묵과 공자의 침묵 중 어느 쪽을 배워야 할까. 작자는 설선의 침묵을 비판하면서도 침묵에 관한 수많은 격언 중에 왜 하필 설선의 말을 인용한 것일까. 설선의 침묵은 그저 입만 닫는 것이고 공자의 침묵은 말할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공자는 학문과 도덕이 완성된 성인이기에 때만 기다리면 되지만 범인들은 다르다. 성현의 경전에 침잠하여 그 가르침을 몸소 체험해야 한다. 또 마음을 항상 일깨워 외물의 유혹을 끊어내야 한다. 이병철이 성인의 침묵을 지향하면서도 이름만 칭탁할 뿐 실질에 대한 노력은 하지 않을까 우려한 작자는 이 때문에 설선의 침묵을 끌어온 것이리라.

실질을 갖춘 침묵은 작자가 살았던 시대에 더욱 필요한 덕목이었을지 모른다. 당시와 같은 격변기에는 수많은 가치가 혼재하고 사람들은 각자의 목적을 위해 저마다 목소리를 드높이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이러한 때에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보아야 혼란에 더 큰 혼란만 가중시킬 수 있다. 학문과 도덕을 갖추고 묵묵히 시대와 타인을 위해 자신의 신념을 실천하는 사람의 진가는 이때 더욱 발휘된다. 작자가 이병철에게 글을 써준 의미가 이에 있지 않았을까.

시대와 사람이 달라졌어도 말과 침묵에 대한 고민은 현재에도 유효해 보인다. 여전히 수많은 가치가 혼재하고 사람들은 각자의 목적을 위해 저마다 목소리를 드높이기 때문이다. 필자 또한 사람이기에 삶의 수많은 지점에서 말과 침묵의 욕구와 마주한다. 말할까 고민하다 침묵해도 후회하고, 침묵할까 고민하다 말해도 후회하곤 하는데, 돌이켜보면 후자의 빈도가 더 많은 듯하다.

‘침묵[黙]’이라는 말을 새삼 되새기다 보니, 자신을 빛내기 위해 떠들어대는 사람들 속에서 스스로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침묵을 견지하며 홀로 무광으로 빛나는 사람을 주변에서 가끔 보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공자가 말한, 하지 않는 바가 있다는[有所不爲], ‘견자(狷者)’가 이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필자가 감히 사람을 가려 사귀겠는가마는,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바로 이들일 것이다.

글쓴이 : 강만문(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문충사는 대전광역시에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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