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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여덟 살의 배신 / 목성균

부흐고비 2021. 5. 16. 12:02

토요일 오후인데 승주가 오지 않는다. 토요일날은 학교에서 열두 시 반에 파한다고 했다. 두 시가 넘었다. 토요일은 피아노 학원도 태권도장도 안 간다. 그러면 집에 들러서 점심 먹고 올라와도 벌써 올라왔을 시간이다. 녀석은 아파트에서 200미터쯤 떨어진 저의 집에서 아빠, 엄마, 동생 주영이와 산다. 토요일만 아파트에 와서 잔다. 젖 떨어지고 한때는 저의 엄마한테 갈 생각을 하지 않고 할아버지, 할머니하고 산 적도 있다.

현관 벨 소리에 “승주냐.” 하고 달려가서 문을 여니까 신문구독 외판원이다. 신문을 바꿔 보란다. 선물도 주고 육 개월은 무료로 넣어준다면서 떼거지를 쓴다.

“글쎄 싫어요. 싫어-.”

신경질적으로 문을 쾅 닫아버렸다.

“안 보면 그만이지 왜 신경질이여. 나도 먹고 살려구 하는 짓이여. 참 살맛 안 나네-.”

신문 외판원이 문 앞에 서서 궁시렁거리더니 조용해졌다. 그러고 보니 미안한 생각이든다. 안 보면 그만이지 그 사람에게 신경질 부릴 게 뭐람, 옹졸하긴-.

배신감 때문이다. 배신감에 속을 끓이고 있는 사람에게 와서 잘 보고 있는 신문을 바꿔 보라고 떼를 쓴 그 사람이 잘못이다. 오늘 자기 운세가 나빠서 그렇지, 내가 사람 나빠 그런 게 아니다. 나는 가고 없는 신문 외판원에게 대고 속으로 궁시렁거렸다.

승주가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바쁜 몸이다. 저의 집에서 저의 아비 다음으로 바쁜 몸이다. 학교 급식을 하고 미술 공부를 한 후에 집에 오면 두 시다. 그러면 피아노 학원에 간다. 피아노 학원에서 세 시에 오면 한 시간 자유시간이 있다. 그리고 네 세에는 태권도장에 갔다가 다섯 시에 온다. 그래서 평일에는 그 녀석을 못 보려니 각오하고 있다. 대신 토요일과 일요일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런데 안 온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는 유치원에만 다녀오면 평일에도 아파트로 올라와서 ‘롤러브레이드’를 신고 나서면서 나를 제 시종무관인 것처럼 “할아버지 따라와.” 하고 명령하던 놈이다. 그러면 나는 수필이라는 걸 쓰다가 발딱 컴퓨터 앞에서 일어나 따라나간다. 어느 영이라고 감히 거행에 소홀했다간 울고불고 왜장을 친다.

녀석은 나를 아파트 주차장에 세워놓고 롤러브레이드를 탄다. 넘어지면 난리 난다. 제 잘못으로 넘어지고 내 잘못으로 넘어진 것처럼 “넘어졌잖아.” 하고 울면서 내게 덤빈다. 그러면 롤러브레이드를 신은 채 안동을 해서 아파트 단지 앞 문방구로 가야 한다. 거기서 위생상태가 의심스러운 비메이커 제품 빙과류로 일단 군것질을 한다. “전하 배탈나시옵니다. 슈퍼에 있는 ‘줘도 못 먹나’ 하는 걸로 드시지요.” 내 충정 어린 만류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굳이 먹고 나면 입이 시뻘겋게 물 드는 문방구의 싸구려 빙과를 사 먹는다. 녀석은 ‘경제담당 비서지, 위생 담당비서가 아니야.’ 하듯 위생에 대한 충정은 아랑곳도 하지 않는다. 다행이 이직 배탈은 안 났다.

그러던 녀석이 초등학교에 들어가더니 이 주일도 되지 않아서 할아버지를 배신했다. 일주일은 내가 학교에 데리고 가고 데려왔다. 그런데 이 주째부터는 선생님이 교문까지 데리고 나와서 배웅을 하면 내게 달려와서 손을 잡던 녀석이 어느 날인가부터 저의 반 이이들과 손을 잡고 뛰어가면서 할아버지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마침내는 내게 “할아버지, 이제 안 데리러 와도 돼.” 하고 시종무관의 직위마저 삭탈해 버렸다. 왠지 허전한 마음 금할 길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생각보다 일찍 학교생활에 적응하고 친구도 사귀는 것이 나보다는 사회적응력을 타고난 놈 같아 보여서 대견했다. 그러나 일 주내 녀석을 못 보는 건 고통이었다. 녀석에게 들볶이던 시절이 그리웠다. 그래서 토요일만 기다려졌다. 승주가 토요일은 아파트로 와서 잤다. 그것도 두어 주일 뿐 이번 주일은 오지를 않는 것이다.

기다리다 못해서 전화를 했다. 제 어미가 받는다.

“승주는?”

“제 친구네 집에 ‘햄스터’ 보러 갔어요.”

섭섭했다. 내가 저를 어떻게 키웠는데, 그 녀석 우유 타 먹이는 물은 내가 사십 리나 떨어진 초정 약수를 떠 날랐다.

“음-, 할아비가 ‘햄스터’만도 못하다 이거지, 좋아-, 나도 제 놈한테 연연하지 않을 거야.”

“이이구 분수를 떨어요, 분수를…. 애들이 그렇지 그러면 어른 같을지 알았어요.”

아내가 속상해 하는 데다 기름 치듯 불쑥 모욕적인 언사를 던졌다. 그래서 불똥이 엉뚱하게 튀었다.

“이게 다 자기가 며느리 교육을 잘못 시킨 때문이야.”

“그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예요.”

“하다못해 귤이라도 몇 알 사서 애한테 들려주면서 할아버지 갖다 드리라고 심부름을 보내야지, 그게 가정교육이야-.”

“며느리 교육은 꼭 시어미가 하란 법 있어요? 자기는 못해?”

며느리한테 섭섭한 생각이 들었다. 저의들이 주말 데이트를 할 때는 애들을 둘 다 잘도 맡기더니, 정작 기다릴 때는 생각을 못하는 시부모에 대한 배려의 모자람이 미워지는 것이었다. 현명한 며느리의 도리까지 거론할 것도 없이 이건 상식에 관한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르면 가르쳐야 하는데 시아버지가 해야 하느냐, 시어머니가 해야 하느냐를 놓고 부부간에 언쟁으로 비화할 조짐을 보였다. 참자, 남자가 참아야지, 그리 생각하니 공연히 속이 끓는다.

아-! 그런데 승주가 왔다. 현관문을 발로 차는 소리가 났다. 현관문을 발로 걷어찰 놈은 승주밖에 없다. 이 놈은 기분 좋으면 벨을 누르고 기분 나쁘면 발로 문을 걷어찼다. 현관문을 열자 승주가 눈물 자국으로 더러워진 얼굴을 불쑥 들이 밀며 나타났다. 되게 심기가 불편할 때의 행동이다.

“햄스터 사줘-.”

“임마, 햄스터가 뭐야-.”

나도 너한테 유감있다는 표시로 쥐어박듯 말했다.

“있잖아, 알록달록한 생쥐 말이야. 할아버지는 바보마냥 그것도 모르냐.”

“임마, 생쥐를 다 돈 주고 사. 안돼.”

그러자 대번 승주가 자배기 깨지는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

“애하고 똑같아, 똑같아-. 울지 마 사줄게.”

아내가 애를 안고 달래면서 나를 나무라는 것이었다.

“너 임마, 햄스터 보러 갔다며?”

“근데 재형이 자식이 저만 만져보고, 나는 못 만져 보게 하잖아. 치사하게-.”

녀석이 엄청 서럽게 우는 것이었다. 그때서야 승주가 당한 못가진 자의 압박과 설움이 할아버지의 가슴에 와 닿는 것이다. 햄스터도 없는 가엾은 녀석, 여닯 살짜리의 배신은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 애들의 크는 과정일 뿐이라는 명백한 증거 앞에, 아내 말마따나 나는 애하고 똑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부끄러워졌다. 배신감은 봄눈 녹듯 사라지고 진작 녀석에게 햄스터를 못 사준 게 후회가 될 뿐이었다.

“알았어. 밥 먹어. 밥 먹고 할아버지하고 사러 가자.”

“와-, 신난다.”

녀석은 언제 울었더냐 싶게 함박꽃 같은 얼굴로 피어나서 밥을 소담하게 먹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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