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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돌층계 / 유경환

부흐고비 2021. 5. 16. 12:49

경복궁에 볼일이 생겨 들어설 때마다, 한가운데 높이 솟아 있는 국립 중앙 박물관의 돌층계부터 바라보게 된다.

반듯하게 누워있는 가지런한 돌층계, 보이지 않는 손짓으로 올라와 보라고 하는 것 같아, 자꾸 눈길이 끌린다.

왜 그렇게 느끼는지 모를 일이지만, 돌층계가 날 시험해 보려는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돌층계가 시험해 볼 까닭이 없다. 그런데도 이런 공상을 하게 되는 것은, 아마 평소의 내 생활의식 때문이리라. 성실하지 못했던 생활 의식의 탓이 아니랴.

많은 층계를 우리는 밟고 오르며 산다. 층계를 밟고 오를 때마다 그것은 내게 삶의 계단으로 떠올라, 헛디딜세라 조심이 된다. 어차피 인생은 끝이 있는 층계를 딛고 올라서며 사는 것이다. 한 층에 한걸음이 맞도록 계단은 만들어 진 것이다. 그런데도 두 단, 세 단씩 뛰어오르려는 충동을 느껴 왔었다. 이렇게 서두르거나 남보다 앞서려거나, 또는 남을 밀치고 먼저 나서려는 데서 헛딛는 실수나 넘어지는 확률은 커지게 마련이다. 한 층에 한 걸음, 한 발짝씩 밟아 오르게 되어 있는 것이련만, 두 층, 세 층을 한꺼번에 건너뛰어 밟으려는 욕심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인생 추락이나 도중 탈락, 도중하차를 해왔던가?

우리는 인생을 너무 쉽게 살려고만 허둥거리며 살아왔다. 차근히 한층, 한 층 밟아야만 할 과정을 다 밟고 올라가는 성실한 사람을 오히려 어리석게 여기는 눈길로 바라보거나, 또는 약삭빠르게 잔재주로 앞지르려는 사람을 부러워하는 눈길로 바라보았었다. 얼마나 높게 오르느냐 하는 것만을 고개 들어 쳐다보았기에, 쉽게 오르려 했었다. 남보다는 조금 더 많이 오르려는 욕심 때문에, 남을 제치거나 딛고 올라서려 했었다. 끝이 있는 삶의 계단에 얼마나 높게, 얼마나 빨리 오르느냐 하는 것이 별로 큰 문제가 안 된다는 것을 이제야, 힘이 드는 나이에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국립중앙 박물관의 높은 돌계단이 보이지 않는 손짓으로 내 삶의 성실성을 시험해 보려는 것처럼 보인다.

이제야 내 삶의 계단을 얼마쯤 올라서서, 지금 내가 선 곳이 어디쯤인가를 되돌아보게 된다. 수없이 많은 층계를 밟아 오르면서, 과정을 무시하지 않고 얼마나 차근히 제대로 발을 옮겼는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다리에 힘주고 무릎을 짚어가면서 이마에 땀을 씻게 되니, 한 층, 한 층 올라 딛고 서는 그 힘겨움에서 과연 얼마나 보람을 느꼈었는지 이제야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얼마나 비틀거렸는지, 얼마나 숨차게 헐떡이며 남을 밀쳤는지, 몇 번이나 헛디딜 뻔했는지, 또 뒤에서 남 보기에 흉하도록 갈지(之)자로 왔다 갔다 했었는지..... 그것을 헤아리는 동안 내 그림자가 길어진다.

어렸을 적, 고향의 돌층계에서 동무들과 가위바위보를 하며 누가 먼저 오르느냐를 놓고 쌈 싸우 듯 한 적 있었다. 그러다가도 기울어져 비끼는 햇살에 그림자가 길어지면, 돌층계에 꺾여진 그림자밟기를 하면서 놀았었다. 누가 많이 이겨 돌층계에 먼저 올랐든 간에, 그림자가 길게 돌층계에 늘어지게 되면 해지기 전에 집에 돌아가기 위해서 미련 없이 내려와 그 곳을 떠났었다.

지금 내 삶의 층계에서는, 앞으로 내 인생의 계단이 얼마나 더 많이 남았는지 헤아릴 길이 없다. 다만, 인생의 해가 지게 되면 미련없 이 비켜서서 내려오게 될 것이다. 밟게 되어 있는 층계 한 단씩을 딛고 밟아 올라서면서 다리가 무겁도록 힘이 들어도, 되도록 성실하게 내딛는 바로 그 때 그 순간에 느끼는 것이 결국 보람의 전부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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