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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신석초 시인

부흐고비 2021. 6. 21. 09:21

바라춤 -서장 / 신석초
환락은 모두 아침 이슬과도 같이 덧없어라. ―싯타르타//
언제나 내 더럽히지 않을/ 티없는 꽃잎으로 살아 여러 했건만/ 내 가슴의 그윽한 수풀 속에/ 솟아오르는 구슬픈 샘물을/ 어이할까나.// 청산 깊은 절에 울어 끊인/ 종소리는 하마 이슷하여이다./ 경경히 밝은 달은/ 빈 절을 덧없이 비추이고/ 뒤안 이슷한 꽃가지에/ 잠 못 이루는 두견조차/ 저리 슬피 우는다.// 아아, 어이하리. 내 홀로,/ 다만 내 홀로 지닐 즐거운/ 무상한 열반을/ 나는 꿈꾸었노라./ 그러나 나도 모르는 어지러운 티끌이/ 내 맘의 맑은 거울을 흐레노라.// 몸은 설워라./ 허물 많은 사바의 몸이여./ 현세의 어지러운 번뇌가/ 장승처럼 내 몸을 물고/ 오오, 형체, 이 아리따움과/ 내 보석 수풀 속에/ 비밀한 뱀이 꿈어리는 형역의/ 끝없는 갈림길이여.// 구름으로 잔잔히/ 흐르는 시냇물 소리/ 지는 꽃잎도 띄워/ 둥둥 떠나려가겄다/ 부서지는 주옥의 여울이여./ 너울너울 흘러서/ 창해에 미치기 전에야/ 끊일 줄이 있으리./ 저절로 흘러가는 널조차/ 부러워라.//

접동새, 우는 접동새야./ 네 우지 말아라./ 무슨 원한이 그다지 골수에/ 사무치길래/ 밤중만 빈 달에 피나게 울어/ 남의 애를 끊느니.// 이화(梨花) 흰 달 아래/ 밤도 이미 삼경인 제/ 승방에 홀로 누워/ 잠을 이루지 못하나니/ 시름도 병인 양하여/ 내 못 잊어 하노라.// 아아, 속세의 어지러운 진루(塵累)여./ 허울 좋은 체념이여/ 팔계(八戒) 게송이 모두 다/ 허사런가/ 숙명이 낳은 매혹의 과실이여./ 묻혀진 백옥의 살결 속에/ 묻혀진 백옥의 살결 속에/ 내 꿈꾸는 혼의 슬픈/ 심연이 있어라./ 다디 단 꽃잎의 이슬/ 걷잡을 수 없이 흐르는/ 애끓는 여울이여/ 길어도 길어도 끊이지 않는/ 가슴 속의 샘물이여.// 눈물이 꿰어진 진주 다래라면/ 눔비니 밝은 구슬성도/ 이루지 안 했으랴./ 눈물이 꿰어진 진주 다래라면/ 수미 높은 뫼도 아니/ 이뤘으랴./ 눈물이 흘러 이내 흔적이/ 없으니/ 내 그를 애달파하노라.// 아아, 헛되어라 울음은/ 연약한 속임이여./ 수유에 빛나는 거짓의 보석이여./ 내가 호숫가에 쓸쓸히/ 설레는 갈대런가/ 덧없는 바람 달에/ 속절없이 이끌리는/ 값싼 시름의 찌꺼기여.// 적멸이 이리도 애닯고나./ 부질없는 일체관념(一切觀念)이여./ 영생의 깊은 수기(授記)가/ 하마 허무하여이다./ 관념은 모두 멸하기 쉽고/ 잠든 숲속에 세월이 흐르노라./ 어지러운 윤회의/ 눈부신 여울 위에/ 변하여 가는 구름 연기/ 시간이 남긴 사원 속에/ 낡은 다비만 어리나니/ 세월이 하 그리 바쁜 줄은 모르되/ 멎는 줄을 몰라라.//

덧없이 여는 매살한 손이여./ 창 밖에 피인 복사꽃도/ 바람 없이 지느니/ 하물며 풍상을 여는 사람의/ 몸이야 시름한들 어이리/ 오오, 변하기 쉬운 꽃여울이여./ 내 아리따운 계곡에 흐느껴/ 우는 소리/ 내 몸 잔잔한 흐름 위에/ 홀연히 여는 전이(轉移)의 물결/ 내 끝내 지는 꽃잎으로 허무히/ 흘러 여는다.// 다만 참된 건 고뇌하는/ 현유(現有)의 육신뿐인가./ 순간에 있는 너 삶의 빛깔로/ 벅차 흐르는 내 몸뚱어리/ 순수한 욕구로 불타오르는/ 꽃송아리/ 황홀히 타는 구슬의 꽃술 속에/ 망령된 시름하는 나비들은/ 금빛으로 날아/ 빗발처럼 쏟아지느니// 깊은 산 유리 속에 홀로/ 선 내 모습이/ 하마 청산의 허재비 같으니다.// 장근 동산이 날 에워/ 한 조각 여는 구름모양/ 저 영을 넘지 못하는다/ 내 안에 내 안 내 누리 안에/ 무닐 수 없는 장벽이 있도소이다./ 아아 애절한 구속의/ 모래문이여.// 넓은 천지간에 속세를 등져/ 깊이 숙여 쓴 고깔 밑에/ 고이 접은 네 아미/ 죄스럼과 부끄러움을 가려/ 그늘진 푸르른 정의(淨衣)/ 남몰래 앓는 백합을 어리는/ 빈 산 칡 달은 하마 휘엿하여이다./ 야삼경 호젓한 다락에/ 들리느니 물소리만 요란한데/ 사람은 없고 홀로 타는 촛불 옆에/ 풀어지는 깃 장삼에/ 장한이 너울져/ 춤추는 부나비처럼/ 끝도 없는 단꿈을 나는 좇니노이다.//

아아, 고독은 죄스러운/ 사념의 뱀을 낳는가/ 내 맘 그윽히 떠오르는 마아야/ 남몰래 떠오르는 꿈결 같은/ 마아야의 손길./ ………….// 천만 겹 두른 산에/ 어리고 서린 두렁칡이/ 밋밋한 오리나무를 친친 감아 얽으러져/ 제멋대로 살어 연다./ 사람도 저처럼 어러져, 멋대로 살어 열까/ 바람도 그리움도 천만 없소이다. 나는……/ 절로 피인 꽃이니다./ 만개한 꽃의 매력으로 부풀어오른 몸뚱어리/ 오오, 순수한 장미의 덩어리여./ 바람으로 솟은 둥실한 도리(桃李)의 메여// 팔상(八相)에 이끌리는 무릇 재앙의 씨여/ 오오, 끊기 어려운 삼계(三界)의 질긴 연(緣)이여/ 내가 오히려 사갈나의 꿈숲을/ 얼 없이 헤매느니/ 광풍에 지부친 뱃사공처럼/ 물 아래 세 가닥 모래/ 깊은 웅뎅이를 보지 못하는다.// `보리살타' 오오,/ `보리살타'/ 나무 여래보살/ 나무 관세음보살/ 나무 지장보살// 중생을 건지신 높은 덕에/ 청정한 크신 법에/ 내 몸을 바침이 내 평생의/ 원이니다.// 시방 너른 하늘 아래/ 시방 너른 하늘 아래/ 내 몸이 한낱 피여지는 꽃이니다./ 첩첩한 구름산에 남몰래 살어지이다./ 살어지이다./ 그러나 오오 그러나/ 사바를 꿈꾸는 나여. 마(魔)에 이끌리는 나여./ 오오, `마라' 네, `마라'/ 오뇌의 이리여./ 바람 속에 달리는 들짐승이여// 네가 만약 장송에 깃들인 학 두루미라면/ 구름 잠긴 영(嶺)에 흰 날이 흐르는 제/ 구천 높이 솟아 훨훨 날아도/ 여지 않았으랴/ 내가 적막한 기와 우리 속에/ 차디찬 금빛 소상 앞에/ 엎더져 몸부림하는 시름의 포로가 되어/ 감은 치의(緇衣) 속에 솟아오르는 오뇌의 불길이/ 꽃바리에 타는 향연 같도소이다.//

오경 밤 기운 절에 헤매는/ 바람결에 그윽히 우는 풍경 소리/ 상방 닫힌 들창에 꽃가지/ 흔들려 춤을 추고/ 창 밖 구름 뜰에 학도 졸아/ 밤이 더욱 깊으메라./ 쓸쓸한 빈 방안에 홀로 일어 앉아/ 남몰래 가사 장삼을 벗도소이다./ 벗어서 버린 가사 장삼이/ 방바닥에 흐트러져/ 푸른 못 속에 뜬 연꽃 같으니다.// 누우면 잠이 오며/ 앉으면 이 시름이 사라지랴/ 이제 누운들 어느 잠이 하마 오리/ 어지런 시름 숲에 누워 앉아/ 홀로 밤을 새우나니/ 서역 먼 길은 꿈 속에도 차노메라./ 겁겁(劫劫)에 싸인 골은 안개조차 어두메라./ 극락이 어디메뇨 가는 길도 모르메라.// 오오, 스님. 바라문(門)의 높으신 몸이여./ 금석같이 밝으신 맘이여./ 하해같이 넓으신 품이여./ 백합같이 유하신 팔이여./ 날 어려지이다 어려지이다/ 이 밤 어려 자는 목숨이 하마 절실하여이다/ 가뭇없는 속세의 티끌로 나는 가느이다/ `사바세계' `일체고액'을 넋에 지고/ 여느이다./ 스님 오오, 모진 이 창생을 안아지이다.// 가사 어러메어 가사를 어러메어/ 바라를 치며 춤을 출까나/ 가사 어러메어 가사를 어러메어/ 헐은 가슴에 축 늘어진 장삼에/ 공천풍월(空泉風月)을 안아 누워/ 괴론 이 밤을 고이 새우고저/ 괴론 이 밤을 고이 새우고저/ 지루한 한평생을 짧게 살어여지이다./ 수유에 지는 꿈이 소중하여이다./ 다디 단 잊음이 영역으로 이끌어 가는 육신의 발원이여/ 게으름에 길길이 풀어지는 보석 다래여/ 천길 구름샘에 폭포가 쏟아져 내리노이다.// 아아, 나는 미쳤는가/ 나는 짐승이 되었는가/ 마라의 짐승이 되었는가./ 속세에 내린 탐란한/ 암사슴이 되었는가./ 제가 제 몸을 얽는/ 관능의 오랏줄이여./ 아스리 나는 미쳤어라./ 유혹을 버리리라./ 나는 거룩한 얼을 잃었어라./ 형산(荊山) 묻힌 백옥같이 청정한/ 예지의 과일을 나는 잃었어라.//

환락은 아침 이슬과도 같이 덧없느니,/ 오오, 미친 상념이여, 허망한/ 감각이여./ 물결이 왔다 철렁 달아난/ 빈 모래펄이여./ 흐트러진 젖가슴에 회한의/ 바람이 휘돌아 불어/ 내 안이 텅 빈 동굴 같으니다./ 꽃 지는 산 다락에 울어예는/ 귀촉도/ 영정한 저 소리만/ 어지러운 물소리에 적녁히 굴러/ 잠자지 못하는 사람의/ 깊은 속을 울리노라.// 열치매 부엿한 둥근 달이/ 꽃구름에 어려/ 둥실 날은 추녀 위에/ 나직히도 걸렸어라/ 깊고 높고 푸른 산이 날 에워/ 네 골은 비어 죽은 듯 고요하여이다./ 접동새. 우는 저 두견아./ 어느 구름 속에 네가 울어/ 짧은 밤을 새우는다./ 두견아. 네가 어이 남의 애를/ 끊느니./ 쿵쿵 흐르는 물소리도/ 네 울음에 겨워 목이 메이노라.// 물가에 내려 이슷한 수풀 속에/ 내 벗은 꽃 같은 몸을 씻노이다./ 공산 잠긴 칡 달이 물 위에 떠/ 금빛으로 흐르메라/ 휘미진 여울에 빠져 흔들리는/ 내 고운 모습/ 여울에 잠근 하얀 진주 다래여./ 물거울에 흐트러졌다 다시/ 형체를 짓는 보석의 더미여./ 네가 물같이 흐르지 못하여/ 빠진 달처럼 구름 샘에 머무느니.// 모양에 갇힌 포말의 뫼여./ 내가 이 맑은 경(境)에 와/ 죄업의 티끌을 씻노라/ 적막은 푸른 너울처럼 감돌고/ 부풋한 아리따운 형태의 반영에/ 고혹하는 비밀의 힘은 살아나노나./ 아아, 몸과 영혼은 영원히/ 배반하는 모순의 짝이런가/ 씻어도 씻어도 흐려지는 관념 형태여.// 물아. 흐르는 물아. 철철 흐르는/ 물아./ 풀어진 네 몸은 행복도 하여라/ 응고되지 않는 네 형체/ 번뇌도 시름도 없으리./ 천 가닥 흩어지는 구슬 골짜기/ 네가 풀어져 흘러 산 밖으로 여는다/ 언제나 새로운 근원/ 흐려지지 않는 순수한 샘이여.//

뎅!……/ 새벽 종이 우노라/ 밤이 이내 지새련다/ 뎅! 뎅! 종이 우노라/ 종소리 굴러 물소리에 흔드노메라/ 소쇄한 유리 속에 넌즛 선 나/ 고독한 나여./ 여명은 참으로 모든 형체를 드러내고/ 물체와 영상을 나뉘노라/ 보랏빛 수풀 위에 흐려지는 달 그리메/ 창천이 부엿이 밝아/ 낙락한 푸른 봉우리가 이곳 가까이 다가서노나.// 청산아 네 거룩도 하여라./ 구름에 솟은 바위도 자라나는 나무도/ 어둠에서 되살아나/ 불멸의 빛을 던지노라./ 네가 날 위해 날 위해/ 언제나 있어 주렴/ 그러나 부세(浮世)를 그리는 나/ 내 몸에 소용돌이치는 숙명의/ 부르짖음이여./ 아아(峨峨)히 솟은 푸른 봉에 밝아 오는/ 숲 바다/ 밀밀한 나무가 금빛 나우리를 흔들고/ 지금 아침 태양은 장미꽃으로 벌어지노라./ 가지 끝에 자던 새들 잠 깨어/ 생생히 우지진다.// 둥, 둥, 북이 우노라./ 두리둥둥, 아침 법고가 우노라./ 천수 다라니 염불 소리/ 가사 장삼에 염주를 목에 걸고/ 아침 재를 올리느이다/ 아아. 우상에 절하는 어리석은 무리/ 서글픈 위선자여. 거지의 청신녀(淸信女)여./ 꿈도 시름도 비명으로 사라지리/ 시간은 혼미에서 깨어나느니/ 아침 빛깔이 화려하게 불타/ 자잘한 삶의 소리 일어나노라.// 북 소리 염불 소리/ 염불 소리 물 소리/ 물 소리 바라 소리/ 바라 소리 물 소리/ 물 소리 흘러/ 종소리도 흔드노메라.// 일만봉 구름 속에 울어예는 산울림/ 미풍은 참으로 내 젖가슴을 틔우고/ 첩첩한 산허리에 장미의 숲을/ 건느노라./ 네, 늘어진 장삼에 소매를 떨쳐/ 그윽한 저 절을 내린다/ 무위한 슬픈 계곡을 나는 내린다…….//
* 〈바라춤〉은 총 421행(최종 퇴고본은 348행)으로 구성된 장시(長詩)다. 1941년 《문장》지에 발표하기 시작하여 18년여를 거쳐 완성된 작품이다.  이 시편은 1968년 11월 우리나라 신시 60년을 축하하는 ‘시인 만세’ 잔치에서 임성남[무용가, 1929~2002] 씨가 안무한 춤과 함께 낭송되었다.
* ‘바라춤’은 승무(僧舞)의 일종으로 부처에게 재(齋)를 올릴 때 천수다라니경(千手陀羅尼經)을 외며 바라를 치면서 추던 춤이다.

바라춤 서사(序詞) / 신석초
묻히리란다. 청산에 묻히리란다./ 청산이야 변할 리 없어라./ 내 몸 언제나 꺾이지 않을 무구한/ 꽃이언만/ 깊은 절 속에 덧없이 시들어지느니/ 생각하면 갈가리 찢어지는 내 맘/ 설워 어찌하리라.// 묻히리란다. 청산에 묻히리란다./ 나는 혼자이로라. 찔레에 얽어진/ 숲 사이로 표범이 불러 에우고/ 재올리 바라 소리 빈 산을 울려/ 쩡쩡 우는 산울림과 밤이면/ 달 피해 우는 두견이 없으면/ 나는 혼자이로다.// 숨으리, 잠긴 뜰 안에 숨으리란다./ 숨어서 보살(菩薩)이 아니 스ㅣ이련만/ 공산나월(空山蘿月)은 알았으리라./ 괼 데도 필 데도 없이 나는 우노니라./ 혼자서 우노니라./ 아아, 적막한 누리 속에 내 홀로/ 여는 맘을 어찌하리라.// 낮이란 구름산에 자고 일어 우니노라./ 밤이란 깊고 깊은 지대방에 잠 못 이뤄 하노라./ 감으면 꿈결같이 떠오르는 마아야*의 그리메/ 가슴 속에 솟아오르는 오뇌의 불길이/ 꽃바리에 타는 향연(香烟) 같도소이다.// 아아, 오경 밤 깊은 절은 하마 이슷하여이다./ 달 밝은 구름 창에 이운 복사꽃이/ 소리 없이 지느니/ 사람도 늙어서 저처럼 이우는가/ 꿈 같은 사바(娑婆) 세월이 덧도/ 없으니이다.// 천만 겹 두른 산에 들리나니/ 물소리/ 어지러운 시름의 여울 속에/ 보살도 와서 어릴 거꾸러진/ 유혹의 진주를 남하 보리라/ 푸여오른 꽃잎의 심연 속에/ 다디 단 이슬이 듣도소이다.// 시름도 성체도 부질없는 우상이니다./ 팔계(八戒) 쇠성이 모두 다 성이 가시니다./ 시왕전(十王展)에 드린 원은 봄눈처럼 사라지니이다./ 가사 어러 메어, 가사 어러 메어/ 바라를 치며 춤을 출까나.// 가사 어러 메어 가사 어러 메어/ 헐은 가슴에 축 늘어진 장삼에/ 공천풍월(空泉風月)을 안고 뉘어/ 괴론 이 밤을 고이 새우고저./ 괴론 이 밤을 고이 새우고저.// 몸아. 맨몸아. 푸른 내 몸아./ 마(魔)의 수풀을 가노라./ 단꿈은 끝없이 즐김을 좇아/ 꽃잎 저 흐르는 여울을 가노라/ 바다로 여는 강물을 뉘라 그지리오./ 어느 뉘라 그지리오.// 불타는 바다 위에, 불타는 바다 위에,/ 난 던져진 쪽달일레라./ 사갈나* 너른 들에 버려진 꽃가질레라./ 이슷한 사라의 장삼 속에 꿈어리는/ 몸이 부엿한 물 같으니다./ 아스리 나는 미쳤에라./ 나는 짐승이 되었에라./ 마라*의 짐승이 되었에라./ 내 혼과 몸의 씨앗을 쪼갤/ 빛날 장검을 나는 잃었는가./ 숙명의 우리 안에 날 지닐/ 오롯한 자랑을 나는 잃었는가.// 묻히리란다. 청산에 묻히리란다./ 청산이야 변할 리 없어라./ 나는 절로 질 꽃이어라./ 지새워 듣는 법고 소리/ 이제야 난 굳세게 살리라./ 날 이끄을 흰 백합의 손도 바람도/ 아무것도 내 몸을 꺾을 리 없어라.//
* 마아야: 범어로 환영(幻影)을 말함.
* 사갈나: 범어로 인생고해(人生苦海)를 말함.
* 마라: 범어로 마왕을 이름(마라는 그의 딸을 시켜 춤을 추게 하여 싯타르타를 유혹하려 하였다).

무녀(巫女)의 춤 / 신석초
공작 깃/ 패랭이 제껴 쓰고/ 무녀야 미칠 듯/ 너는 춤을 추다// 도홍선(桃紅扇) 활짝 피어/ 붉은 입술 가리고/ 웃고 돌아지는/ 보석 같은 그 눈매// 쩔레쩔레 흔드는/ 신(神) 솟은 몸/ 저도 남도 모르는/ 귀매(鬼魅)를 부르는데// 헐은 옷 떨치어/ 낙화로 흩날리고/ 징소리 쟁쟁/ 바람집에 모이더라.//

멸(滅)하지 않는 것 / 신석초
황홀하게도, 은밀하게도/ 내 가슴에 정열이 타고 남은/ 적막한 잿무덤 위에,/ 예지와 수많은 그리메로써/ 꾸며진 이 회색의 무덤 위에/ 페닉스! 오오, 너는 되살아서/ 불과 같은 나래를 펴고/ 죽은 줄만 여긴 네 부리에/ 매혹의 힘은 다시 살아나서/ 나를 물고, 나를 쪼으고/ 연애보다도 오히려 단 오뇌로 나를/ 또, 이끌어 가누나.//

밀도(蜜桃)를 준다 / 신석초
익어터지려는 이 밀도(蜜桃) 열매!/ 오―랜 열망이 와서 어린/ 상아(嫦娥)의 두렷한 반에 놓아서/ 네 아담한 웃음에 주거니,// 그래도 제 몸 숨김일레/ 엷은 비단의 잔털로 싸아서/ 유방의 붉은 은밀한 끝이/ 애써, 지난날의 근심을 깨우려나.// 오오, 아나한 여인이여!/ 매혹으로써만 감춘 단 이슬로/ 반쯤, 벌어져서 꽃잎과도 같은/ 네 입술을 물들게 하여라.// 있는 듯, 마는 듯/ 이 과육(果肉)의 이슬이 사라지는 동안/ 붉어서 굳은 황금 씨알이/ 네가 가진 영혼의 밀우를 꿈꾸게 하노나.//

바람 부는 숲 / 신석초
바람이 내 뒤안/ 수풀을 흔들고/ 그윽한 심연의 유리가/ 바다 물결처럼 울어 온다.// 몸뚱이는 차다. 아아/ 거친 이 설레임에/ 나는 내 안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노라.// 눈 쌓인 산/ 찌어질 듯한 하늘 아래/ 떨어지는 깊은 절 종소리/ 오오, 지새는 창살이여.// 내가 질서도 없는/ 이 부산한 수풀에 누워/ 내일의 미지의 길목을/ 헤이노니// 바람도 떠 가는 달도/ 흐르는 별도 해어진 옷도/ 다만 지나는 시간을 말할 뿐.// 오오. 불어 제쳐라./ 바람. 내 몸에 걸친/ 남루가/ 홀짝 벗겨질 때까지.//

바다에 / 신석초
바다에 끝없는/ 물결 위으로/ 내, 돌팔매질을 하다/ 허무에 쏘는 화살 셈치고서.// 돌알은 잠깐/ 물연기를 일고/ 금빛으로 빛나다/ 그만 자취도 없이 사라지다.// 오오 바다여!/ 내 화살을/ 어디다 감추어버렸나.// 바다에/ 끝없는 물결은,/ 그냥, 까마득할 뿐…….//

백운대(白雲臺) / 신석초
지난 가을날 단풍잎 지던 자리에/ 쌓이던 고운 것들은 다 갔어라.// 화사한 꽃무덤에 모이던/ 눈 흘림들은 다 갔어라.// 이제는 돌아와 서릿발 선 가지/ 서풍을 향해 눈산을 대해 앉았으니/ 백발삼천장(白髮三千丈)이 헛말이 아니어라.//

춤추는 여신(女神) / 신석초
달은 잠들고 그윽한/ 한숨지는 밤 동산으로/ 꽃 같은 여신이 내려오다.// 매혹하는 꽃송아리/ 꾸며 논 보석의 수풀 속에/ 꿈결같이 움직이는 벗은 몸이/ 바람에 흔들리는 물을 그리면서// 금강석에 묻힌 호수 위에/ 모호한 장미빛 안개 떠돌아서/ 여신은 매력의 술을 마시고// 제 그림자에 명정하는/ 아리따운 새와도 같이/ 시름하는 여울로 비틀거리어/ 허공의 한 끝을 헤매다// 머리는 칠보의 병을 기울여/ 공작이 어여쁜 연꽃봉오리를 찍고/ 홍옥을 물린 고운 입술은/ 탄식하는 꽃잎의/ 달고도 괴로운 숨결을/ 어둠 속으로 남몰래 흐트러 놓다.// 아아, 넋 끊는 적(笛) 소리 들리고/ 청춘에 늘어진 기인 버들가지/ 소백한 보드러운 팔을 서리어/ 대리석으로 깎은 허리에/ 애무하는 고운 기반을 끄르다.// 이럴 때 시간은 내밀한/ 우주를 이루고/ 침묵은 다디 단 권태의 술을 빚다.// 어느덧 빛과 그림자 얼크러진/ 순수한 진주의 바다 떠올라서/ 범주(帆舟)는 푸른 물 거울을 건너고/ 지상(至上)의 나래 오오, 뜬구름 쪽은//

육사(陸史)를 생각한다 / 신석초
우리는 서울 장안에서 만나/ 꽃 사이에 술 마시며 놀았니라/ 지금 너만 어디메에 가/ 광야의 시를 읊느뇨.// 내려다보는 동해 바다는/ 한 잔 물이어라/ 달 아래 피리 불어 여는 너/ 나라 위해 격한 말씀이 없네.//

파초(芭蕉) -육사(陸史)에게/ 신석초
황혼의 쇠잔한 노을이/ 소리 없이 뜰 위에 내리고/ 파초가 드린 기인 소매 나부껴/ 잠깐 옛날의 근심을 돋우노나.// 속절없이 저무는 이 사이/ 방황하는 바람은 불어 와서/ 황금빛 나는 네 가지에다/ 한숨 모여, 비단의 띠를 흘려라.// 한숨 쉬는 묵은 파초(芭蕉) 잎이여!/ 너는 아는가! ―현세와, 내 머언/ 인연이 짓는 어지러운 심사를/ 파멸하고, 또 존재하는 것……/ 나는 있다, 이 고귀한 것의 옆에/ 오오, 퍼덕이는 옛날의 명정이여!//

꽃잎 절구(絶句) / 신석초
꽃잎이여 그대/ 다토아 피어/ 비 바람에 뒤설레며/ 가는 가냘픈 살갗이여.// 그대 눈길의/ 머언 여로(旅路)에/ 하늘과 구름/ 혼자 그리워/ 붉어져 가노니// 저문 산 길가에 져/ 뒤둥글지라도/ 마냥 붉게 타다 가는/ 환한 목숨이여.//

연(蓮)꽃 / 신석초
내가 옛 동산을 거니다니/ 깊은 못 속에, 푸른 이끼 끼어 어리고/ 붉은 연꽃은 피어나서/ 아나한 송아리를 들었에라.// 붉게 피어난 연꽃이여!/ 네가 꿈꾸는 네안[涅槃]이 어디런가/ 저리도 밝고 빛난 꽃섬들이/ 욕망하는 입술과도 같이, 모두/ 진주의 포말로 젖어 있지 않은가// 또 깊은 거울엔, 고요가 깃들고/ 고요에 잠든 엽주(葉舟)는 저마다/ 홍보석을 실어서, 옛날 왕녀가 버린/ 황금 첩지를 생각케 하누나.// 오오, 내 뉘야 오렴아! 우리/ 님프가 숨은 이 뜰을 나려/ 연잎 위에, 오래고 향그러운 아침 이슬을 길으리…….//

시름하는 꽃가지 / 신석초
으스름 달밤에 시름하는 꽃가지/ 네 마라의 아리따운 여인이여./ 너는 바람부는 갈대의 어지러운/ 저잣거리에서/ 보석의 기이한 연단(煉丹)을 만들도다.// 네 몸은 빈 들에 핀 홍도화 가지 같도다./ 네 머리는 은횃대에 앉은 공작새 같고/ 네 얼굴은 반쯤 벌어진 연꽃봉오리 같도다./ 그러나 남그윽한 진주의 동산에/ 장난하는 뱀이 숨어 있도다.// 오오, 어여쁜 짐승이여./ 너는 표피(豹皮)를 깔은 밤바다에다/ 다디 단 술을 퍼붓고/ 홍옥을 물린 고운 입술은/ 남 호리는 웃음이/ 사뭇 터져나오도다.// 그러나 너는 도망하기를 좋아하노라/ 굴레 벗은 망아지처럼……/ 잡기 어려운 가시덤불로/ 이슷한 찔레꽃 숲 속으로// 아아, 풍설이 싸움처럼 설레는/ 밤 호수에, 단장하는 쪽배를 띄고/ 원앙이 날은 비단 자리에서/ 너는 먼 시름의 뫼를 파도다.// 으스름 달밤에 시름하는 꽃가지/ 배반하기 쉬운 하늘의 숨결을/ 교역하는 어지러운 저잣거리에서/ 너는 수많은 금강석을 울리며/ 슬픈 갈대의 피리를 불도다.//

풍우(風雨) / 신석초
봄도 반 넘어/ 깊은 산방에/ 내 홀로 잠을/ 깨어 누웠나니// 베개 위에 듣는/ 비바람 소리는/ 뒤안 꽃숲을/ 다 흔들어 놓는다.// 꽃이 피면 왜 이리/ 비바람은 많은가// 세월이 하마 덧없어/ 뒤흔들며 가느니.//

함령지곡(咸寧之曲) / 신석초
홍포(紅袍) 금사(金絲)띠/ 흑사모(黑紗帽)로/ 피리 가야금 적대 비껴 들고/ 무고(舞鼓) 앞에 앉다/ 적적한 고궁 뜰에/ 강화 화문석이 차구나/ 조용히 울려 퍼지는/ 함녕지곡/ 옛 가락은 구름인 양.// 그날 번화했던 뜨락에/ 빈 자락 깔린 위에/ 새삼 그윽히 우조(羽調)가 흐른다.//

호접(蝴蝶) / 신석초
호접(蝴蝶)이여! 언제나/ 네가 꽃을 탐내어/ 붉어 탈 듯한/ 꽃동산을 헤매느니// 주검도 잊고/ 향내에 독주에 취하여/ 꽃잎 위에 네 넋의/ 정열이 끝나려 함이// 붉으나 쉬이/ 시들어질 꽃잎의 헛됨을/ 네가 안다 하여도// 꿈결 같은 즐거움/ 사라질 이슬 위에/ 취함은, 네 삶의 광휘일러라.//

화장(化粧) / 신석초
다만 불멸의 소리 있을 뿐. ―발레리/ 날마다, 날마다/ 고적한 거울을 대하여/ 내 모양을 꾸미는/ 내 심사를, 그대는 알아요?// 내가, 내 꾸밈으로써/ 구태여 그대의 욕구를/ 끄을려 함은 아니언만// 그래도, 난 내 모양 꾸미는/ 그 일에만 팔려, 날마다/ 거울을 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을…….//

흐려진 달 / 신석초
하룻밤, 내가 달을 좇아서/ 이름도 모를 먼 바닷가/ 모래 위에다 장미꽃으로/ 비밀의 성을 쌓고 있더니// 밤이 깊도록 내가 모래성에서/ 다디 단 술에 취하여 있을 때,/ 문득 구름이 몰려와서/ 내 달을 흐레다.// 아아, 내 꿈이 덧없음이런가/ 바다의 신이 나를 시기하였음이런가/ 심연으로 달은 빠지다.// 달이여, 너는 어디로 갔는가/ 나는 헤매다, 나는 보다/ 물결쳐 움직이는 바다의 그 큰/ 모양을…….//

처용(處容)은 말한다 / 신석초
1// 바람아, 휘젓는 정자나무에 뭇 잎이 다 지겄다/ 성긴 수풀 속에 수런거리는 가랑잎 소리/ 소슬한 삿가지 흔드는 소리/ 휘영청 밝은 달은 천지를 뒤덮는데// 깊은 설레임이 나를 되살려 놓노라/ 아아 밤이 나에게 형체를 주고/ 슬픈 탈 모습에 떠오르는 영혼의/ 그윽한 부르짖음…….// 어찌할까나 무슨 운명의 여신이/ 나로 하여금 이렇게도 육체에까지/ 이끌리게 하는가/ 무슨 목숨의 꽃 한 이파리가/ 나로 하여금 이다지도 기찬 형용으로/ 되살아나게 하는가// 저 그리운 연못은 거친 갈대 우거져서/ 떠도는 바람결에도 몸을 떨며 체읍을 한다/ 굽이 많은 바다다운 푸른 물 거울은/ 나의 뜰이었어라/ 밤 들어 노니다가 들어와 자리에 보니/ 가랄이 넷이어라// 그리운 그대, 꽃 같은 그대/ 끌어안은 두 팔 안에 꿀처럼 달고/ 비단처럼 고웁던 그대,/ 내가 그대를 떠날 때/ 어리석은 미련을 남기지 않았어라/ 꽃물진 그대 살갗이/ 외람한 역신의 손에 이끌릴 때/ 나는 너그러운 바다 같은 눈매와/ 점잖은 맵시로/ 싱그러운 노래를 부르며/ 나의 뜰을 내렸노라/ 나의 뜰, 우리만의 즐거운 그 뜰을// 아아 이 무슨 가면이 무슨 공허한 탈인가/ 아름다운 것은 멸하여 가고/ 잊기 어려운 회한의 찌꺼기만/ 천추에 남는구나/ 그르친 용의 아들이어/ 처용(處容)/ 도(道)도 예절도 어떤 관념 규제도/ 내 맘을 편안히 하지는 못한다/ 지금 빈 달빛을 안고/ 폐허에 서성이는 나 오오 우스꽝스런/ 제웅이어.//

2// 모든 것은 흘러가 없어지는가/ 시간의 여울로/ 어지러운 잊음의 숲이어/ 변모한 서라벌이어/ 빈 절 무너진 성 둘레/ 멸하고 또 멸하지 않는 대리석의/ 빛나는 소상들이어/ 구름 다락과 비단의 거리는 어디 있는가/ 사랑하며 노닐던 나의 황금 장소는/ 바이 없고/ 지금 황량한 갈대밭에/ 바람 달이 설렌다// 나의 범절과 나의 몸짓은/ 다시없는 보물을 잃게 했어라/ 나는 우활(迂闊)하였어라/ 나는 빈 꿈 여울에서 크낙한/ 술을 마셨어라/ 그대는 나를 떠나고/ 나는 나의 체념의 갈밭을/ 그지없이 헤맨다/ 나의 달관은 스스로 나를 버리게 했구나/ 지금 뉘우친들 무엇하리/ 홀로 메어지는 슬픔을 안고/ 여기 서성이노니/ 하늘과 땅이 나에게 모멸하는/ 눈살을 던지는 듯/ 나무는 깔깔대고 돌들은 허허 웃는다// 바람에 부서지는 산란한/ 물/ 보라/ 이슥한 물거울에 비칠 그림자도/ 나는 갖지 못하였어라/ 우수수 듣는 나뭇잎이 낙화(落花)처럼 내려/ 찬 늪을 덮을 뿐…….// 아아, 나는 유령이 되었는가/ 형체만 남은 형체도 안 보이는/ 유명의 그림자여/ 못내 나는 슬픈 유령이 되고 말았는가/ 이젠 사랑도 그리움도 없어라/ 이젠 의젓한 풍채도 높은 긍지도 없어졌어라// 머리 그득히 꽃 꽂아 밝은 모양에/ 수삼(袖衫) 드리워 늘씬한 몸매에/ 애인 상견하여 윤나는 눈에/ 산상(山相) 이슥한 긴 눈썹에/ 홍도화같이 붉은 입술에/ 백옥같이 흰 이빨에/ 칠보(七寶) 늘이어 수굿한 어깨에/ 지혜 가득하여 풍만한 가슴에/ 그리움도 아름다움도/ 이젠 모두 소용이 없어라// 무녀(巫女), 네가 성화같이 날 불러 외었은들/ 무엇하리/ 요사스런 미치광이어/ 밤 신명의 의붓딸이어/ 너의 헐은 옷에 펄렁이는 쾌자 자락이랑/ 징소리에 흔드는 붉은 둥치랑/ 외잡한 네 몸뚱어리의 뒤흔드는 물결은/ 나를 완구로 만들었을 뿐/ 너의 수다스런 언어의 주술도/ 거만하고 실속 없는 나의 화상을 남겼을 뿐/ 휘황한 궁궐도 춤추던 깁 장삼도/ 나의 서글픈 풍류에 지나지 않는다// 무녀(巫女) 지혜 많은 사생녀여/ 숱하고 오랜 어두운 밤/ 밤의 목마름이 너로 하여금/ 을씨년스런 신화를 지어내게 했구나/ 신들린 너의 사지, 사시남기처럼/ 떨리는 손길로/ 너는 무슨 광명의 불꽃을 가져왔는가/ 네 기특한 슬기도 이젠 쓸모가 없어졌어라/ 아무도 네 말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고/ 아무도 네 얼굴을 믿지 않는다/ 나의 태양의 잠든 가지는/ 재난과 안개에 뒤덮여/ 희미한 전설의 내음으로 떠돈다.//

3// 저기엔 내가 불던 옥적(玉笛)이 굴러 있어라/ 허무히 빈 갈대가 되어/ 써늘한 다락 속에/ 여인이 버린 패물 조각과/ 쓸쓸히 지는 나뭇잎과 함께/ 일찍이는 네 짙푸른 목청이/ 하늘가에 가 서렸더니/ 사랑하다 밀리는 흐느낌도/ 저녁 노을도 밤바람 소리도/ 바다 물결도 모두 멎었더니/ 지금은 잠잠한 가락도 없이/ 무위한 옥가지 되어/ 어둡고 이끼 낀 섬돌 위에 버려졌구나/ 바다는 뒤설레어 상기 멎지 않고/ 바람은 부르짖고 물결은 솟아올라/ 언덕을 물어뜯는다// 눈이 부시게 쏟아지는 저/ 금속의 별빛 소리는 내 것이 아니어라/ 차고 현란한 위조 보석/ 금강석이 부서지는 불야성은/ 은하의 별 구름다워라/ 사월 초파일 황룡사에 높이 현/ 연등불도 무색하구나/ 그러나 여기엔 정신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일찍이 너그럽고도 큰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섰던 곳에/ 값싼 모형 건물들이 서서/ 그 속에 어지러운 장기판이 벌어진다/ `황무지'의 허술한 들창가에/ 간음하는 소리 들린다.// 춥다 춥다/ 내 품 안에/ 들어오너라/ 저며 논 보릇다운 몸뚱어리,/ 오오 드러난 살갗들이어/ 아내도 처녀도 없어라/ 뒤섞인 소란한 수풀 속에/ 풀어지는 자락은/ 나라 땅을 가른 장벽만치나/ 저를 가리지 못하는구나/ 갈대는 어질머리처럼 흐트러져/ 은빛 물결을 흔들고/ 여기 흐므진 성황굿이 열렸는데/ 야만스러운 인수(人獸)의 다리 얽히어/ 숨도 헐떡거리며/ 안간힘을 쓴다// 열반이 번져 온 마을에 노을이/ 타는/ 이 언덕에/ 꽃 타는 이 언덕에/ 언제 머루나무의 새잎이 돋아날 건가/ 밤 밤 밤/ 기어오르는 뱀의 혓바닥과 환장할/ 한바다의 물결이 넘실거리는 움직임과/ 전신의 혼이 녹아내리는 마디마디는/ 열병신(熱病神)에게야 횟갓이어라// 바다는 뒤엎질고 물결은 일어난다/ 바람아 인다 동해 바다/ 아홉 개의 머리의 용이 솟구쳐 올라/ 천지를 뒤흔드는데/ 성난 물결을 잠재울 태평의/ 가락이 없구나.// 오오, 처용(處容) 너는 보는가/ 변화의 격한 물이랑을/ 눈부신 세월은 그 위를 지나가고/ 너에겐 이제 아무 할 일이 없구나/ 너는 너로 돌아가야 하리/ 네 자신의 위치로 태양처럼/ 고독한 너의 장소로/ 지혜의 뜰, 표범 가죽이 드날리는/ 그 속으로/ 동이 튼다// 아침 해가 비늘진 물결 너머로/ 굼실거리는 용의 허리 너머로/ 솟아오른다/ 황금빛 부챗살을 펴고/ 바람꽃을 헤치며/ 아득한 푸름의 맞단 곳으로/ 붉게 불타는 찬란한 구슬 늪이/ 이글이글 뒤끓고/ 진동을 하며/ 보라색 안개의 가리마 위로/ 징 같은 태양이 솟아오른다./ 오오. 광명의 나래짓이어…….//

천지(天池) / 신석초
밝아 오라/ 너의 높은 연화(蓮花)로부터/ 하늘로 솟아오른/ 너의 크낙한 심연으로부터/ 신룡(神龍)이 살아 굼실거리고/ 오색 영롱한 벽으로/ 천둥 번개를 하며/ 진동하는 하늘의/ 정수리로부터/ 그 높은 심장으로부터/ 일월은 천지 개벽을 하고/ 천도화(天桃花)를 피우고/ 태초에 하나의 무리의/ 조상을 낳았나니.//

종(鍾) / 신석초
나라이 망하면/ 종도 우지 않던가// 네가 한갓/ 지나는 손의 시름을/ 이끄는/ 기인한 보물이 되었을 뿐/ 꿍하고 네가 울면/ 신라 산천 사백 주가/ 한데 엎드려/ 대응도 하였으리// 나라이 망하면/ 종도 우지 않던가./ 오오, 묵묵한 종이여// 가을날 단청이 떨어지는/ 옛 정(亭) 소슬 추녀에/ 구름이 돈다.// 울어라. 종 울어 보렴./ 네가 큰소리를 내어/ 또 한 번 천리를/ 뒤흔들어 보렴…….//

적(笛) / 신석초
슬프다, 찬 달이여./ 연기 낀 서라벌의/ 옛 하늘로 헛되이/ 네 먼 꿈을 보내는가.// 아스라한 날과 달이/ 흘러가고 또 와도/ 네/ 인간의 어지러운 풍파를/ 그치지는 못할넨가.// 어느 초월한 악공이 있어/ 널 부러 홍량(弘亮)한 소리를 내어/ 창해에 담뿍 어린 구름을/ 깨끗이 쓸지는 못하는가.// 멸한 나라 옛 빈 터전에/ 남은 찬 달과 연기/ 오오, 애달픈 침묵의/ 적(笛)이여.//

선녀(仙女) 비천(飛天) / 신석초
그대는 천상으로 날아가며/ 구름 속에 하늘한 꽃이파리/ 누가 그대를 하늘의 나비로 그려/ 적(笛) 불며 깊은 푸름 속으로/ 날아가게 하였던가/ 먼 우리 조상들/ 아득한 고려인들의 신비로운 솜씨가/ 이곳에 있다/ 주황색 옷자락을 펄렁거리며/ 선연히 검은 눈썹이여/ 금세 피어난 한련화/ 선녀/ 애무당/ 꽃 같은 님의 얼굴이여.//

주렴(珠簾) / 신석초
주렴 드리우라// 주렴 밖에// 쨍쨍한 햇빛이/ 저리 눈에 부시니// 소슬한 꽃 추녀/ 육간(六間) 대청에// 분홍색 깨끼저고리// 남 갑사치마에/ 비취 옥을 꽂은 가인(佳人)// 주렴 드리우라// 벌거벗은 몸뚱어리/ 벌거벗은 몸뚱어리/ 벌거벗은 몸뚱어리// 이제는/ 아마존 여족(女族)들의/ 방패*만큼한 한 올 덮개도/ 기릴 줄이 없다만// 주렴 드리우라// 주렴 밖에// 쨍쨍한 햇빛이// 저리 눈에 부시니……//
* 아마존 여족(女族)들의 방패: 밀튼의 실락원에 나오는 말.

폭풍(暴風)의 노래 / 신석초
바람이 분다. 바람아 잠 깬 바다를 건너/ 네 몰려오라./ 너의 숨결은 내 아침 하늘에/ 안개와 광명의 티끌을 가져온다./ 금은으로 두른 아레스*의 옷자락이/ 나를 빛내고 또 나를 흐린다.// 프로메테우스여. 내―/ 바다를 쏘는 황금 화살이/ 구름 벽을 뚫고/ 너의 심연으로 쏟아지는구나./ 바람에 뒤설레는 물결의 눈보라/ 밝음을 낳는 아침 한때는/ 이렇게 혼란을 가져오는가.// 저기 번득이는 여명의 부채살 속에/ 구름과 갈대 흔들리는 곳에/ 바빌론*의 저자가 움직인다./ 불멸하는 묵은 제왕의 도시가/ 잠 깨어 물결을 치노라./ 성은 뒤끓고 원주(圓柱)는 수런거린다/ 복도에 웅성대는 군집(群集)의 소리.// 바다는 고민하는 아틀라스*의 머리 위에서/ 진동을 한다./ 바위로 부서지는 물결의 물보라가/ 하늘 꼭대기까지 솟아오르는구나./ 유락의 천사. 하얀 비둘기들은/ 놀래어/ 미지의 숲으로 날아 흐트러지고/ 적멸을 깨뜰고 일어선 팡세의 군사들이/ 구름에 모여 기치 창검을 든다./ 오오, 프로메테우스./ 황량한 나의 뜰에 구르는/ 부서진 주춧돌과 어수선한 벌집들.// 바람아 불라. 씰라*의 숨결이여./ 불어 오라./ 역사를 꾸미던 숱한 꽃잎들이/ 낙엽처럼 날아/ 기슭 없는 바다를 덮는다./ 갑작스러운 물결의 소용돌이로/ 바위는 포효하고 하늘은 찌푸려지고/ 갈대는 떤다./ 잡초는 우거진 묵은 거리론/ 놀란 곤충들이 기노라/ 아아, 먼지가 이노라.// 광명을 찾는 무리들이여./ 대지에 자줏빛 하늘문이 열릴 제/ 내가 쏘는 불의 화살/ 나의 빛깔의 충격에 사로잡힌/ 뭇 새들, 자유의 새들이여./ 서로 배반하는 오오, 시천(十千)의 생각의 자식들이여./ 이 큼직한 불집 속에 와 헤매라/ 나의 장미빛 화살에 몸을 던져/ 살을 찢기우고 피를 흘리게 하라./ 내가 갖가지 환상의 숲에 펼쳐 놓은/ 매듭 많은 비밀한 그물을/ 너희들은 보지 못한다./ 프로메테우스. 어쩔까나,/ 이 혼돈과 어지러운 풍파를./ 너의 지혜의 보고를 활짝 열어 노렴.// 문명의 선구자여. 어둠을 밝힌 자여./ 그러나 장난꾸러기 창조자여./ 너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하려 하는가/ 폭풍이 부는 거리에서/ 이 티끌의 도가니 속에서/ 프로메테우스여, 너는 무슨 능력으로/ 너의 완결무결한 낙원을 이룩하려는가./ 너의 다시 없는 국가를?// `프로메테우스'/ 나는 움직인다. 나는 행동을 하려 한다./ 바람 속에 뛰어들겠노라./ 거칠고 캄캄한 것은 나의 영역이 아니어라/ 나의 몸은 밝다/ 무엇을 주저하리/ 프로메테우스여. 달리어가라./ 내 몸은 빠른 아킬레우스*/ 내 혓바닥은 순수한 불꽃이어라/ 나는 지혜 많은 칼타고*의 범과 같도다/ 나는 약진한다./ 나는 나의 이상을 빨리 실현하려 한다// 그러나 조바심하는 가슴이여/ 내 내부의 깊은 뒤설렘이여/ (정신은 질서 없이는 지속되지 않느니)/ 오오. 독수리여. 제우스의 사자여/ 나의 간을 갉아먹는 악독한 새여/ 너는 이제 나에게서 떠나야 한다.// 너의 날카로운 부리로 쪼은 내 몸의 흉터/ 얼마나 포악한 너의 박해가/ 나에게 이다지도 큰 시련을 주었던가/ 나는 안다. 내가 준 불의 어지러운 결과를/ 나는 비틀거린다. 나는 다시 일어선다./ 나는 파괴된 것을 건설해야 하리/ 나는 언제나 높고 빛나는/ 영원한 피라미드를 원한다.//
* 아레스: 그리스 신화의 군신(軍神).
* 바빌론: 서쪽 아시아에 있던 고대왕국 바빌로니아의 서울. 한때 인류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었다.
* 아틀라스: 어깨로 하늘을 떠받고 있는 거인. 지도의 신.
* 씰라: 호머의 오딧세이에서 오디세우스가 난파하여 떠돌아 다닐 때 지나던 험한 물목을 말함.
* 아킬레우스: 트로이 전쟁의 용장임.
* 칼타고: B.C 9세기께 페니키아인들에 의하여 건설되었던 최대 도시.

유파리노스 송가(頌歌) / 신석초
들어라, 바다 한녘에 울려 퍼지는/ 이 유파리노스*의 노래를/ 불꽃 튀기며 대리석 부서지는 소리/ 화사한 꽃밭 일구는 쇠갈퀴의 고함 소리/ 기둥은 밋밋한 백합꽃 대궁으로 일어선다.// 눈부신 빛깔의 쌓임으로/ 층층이 솟아오르는 고층건물/ 놀라운 힘이 기하학으로/ 새 바벨탑을 세워 올린다/ 저곳엔 삼대처럼 공장이 늘어서고/ 또 저곳엔 꽃처럼 구름처럼/ 누대(樓臺)가 솟아오른다/ 오오 유파리노스의 머리 좋은/ 솜씨, 하늘을 깁는 손이어/ 유파리노스여 너의 손길에서/ 눈부신 칠보(七寶)의 숲은 떠오르고/ 너의 머리에서 반짝이는/ 뭇 별자리가 돋아난다./ 네 가슴팍은 메트로폴리스의 찬란한 원천이다// 네 도시는 장미꽃 천엽 속 같구나/ 비단 그물과 금고리가 서로 꼬리를 물고/ 물구나무 서는 뱀의/ 황금팔찌를 받들어 올린다/ 묵은 성 둘레로 너는 하늘 닫는/ 금발 화관을 둘러 씌우고/ 유리의 산 해무리 지는 골짜기로/ 무지개 선 안개문으로/ 석류 항아리의 진주 조개의/ 은빛 벌통들이 포개져/ 올라간다// 하늘은 온통 뒤덮인 바다/ 금속 돛배가 구름 늪을 누비며/ 바다는 아틀라스의 이마와 발끝을 둘러/ 뭍마다 쏜살 같은 가르마를 뻗어 놓는구나/ 구름녘과 보석의 섬으로/ 술 취한 디오니소스의 상선들이 떠 흔들리노라.// 아테네에서 로마에서 칼타고에서/ 무화과와 올리브의 향내 떠도는/ 이오니아의 섬에서/ 블론디의 벗은 살갗으로 물드는/ 플로리다의 해안에서/ 또는 거대한 유방이 솟아오르는/ 해지는 대륙에서/ 해뜨는 동양의 뭇 항구에서/ 물결은 쳐 밀려온다./ 바다는 밝고 세계는 하나다/ 일어서라, 콤파스 유파리노스의/ 다락이어/ 너의 무게는 휘청거리는 메뚜기의/ 긴 다리로 떠받쳐진다// 프로메테우스 너는 보는가/ 아슬한 이 기적의 매스[堆積]를/ 겹겹이 쌓아 오르는 바다 비늘/ 빛나는 이 노적을/ 인간의 호사스러운 손장난을/ 너는 보는가.// `프로메테우스'/ 나는 가지가지 망령들과 싸워야 한다/ 변덕스러운 파충류의 음탕한 활과/ 저 보석을 물린 섬과/ 무성한 금속성 갈잎들과/ 나의 섬을 물어뜯는 물결과/ 회오리바람과 나는 싸워야 한다/ 음산하고 안이한 것들은 모두 가라/ 너의 완성을 위하여 너의 영광을 위하여/ 나는 순수한 것 위에 너를 놓는다/ 나는 영혼으로부터 나타난다/ 오오 지고한 예술가/ 유파리노스여// 너는 나의 혼의 불꽃에서 시작한다/ 바람 부는 도끼, 바퀴를 깎는 대목*이어/ 너의 제일 빛나는 연장은 너를 아는 일이다/ 네 자신을 돌아보라/ 너의 천재 너의 반짝이는 섬광/ 너의 기묘한 앵무 언어는/ 소멸하기 쉬운 물거품이다/ 나는 너의 안개를 거부한다/ 그러나 유파리노스여, 네가 파괴하고 또 건설하는 동안/ 찬란한 이 순간을 찬양하라// 너의 창조 새로운 변화를/ 이 다채로운 꽃의 형성을/ 구가하라.//
* 유파리노스: 그리스의 무명 건축가. 발레리의 『유파리노스』 대화편이 있음.
* 바퀴를 깎는 대목: 『장자(莊子)』에 나옴.

이상곡(履霜曲) / 신석초
온 산 붉은 나뭇잎/ 세월도 늙어/ 찬란한 익음으로 물들어/ 꽃 같은 노을이 내리는/ 나뭇잎.// 나뭇잎 이리도 찬란한/ 골짜기에/ 서릿바람은 불어 와서/ 쓸쓸한 석양 물 기슭에/ 갈꽃 허연 물/ 은실머리를 흔드누나.// 어디서/ 자지러지게도 고운 것이 찾아와서/ 날 나뭇잎 지는 오솔길로/ 이끌어냄이어./ 흰 달빛 아래 서릿발 서걱이며/ 밟고 지내감이어.// 세월이 늙는 조용한 이 산속에/ 내 한 가닥 구름으로나/ 한 잎 나뭇잎으로나/ 있으려 했더니만// 어디서/ 남몰래 서릿바람은 불어 와서/ 내 가슴을 뒤설레고 가는 것이어./ 뒤설레고 가는 것이어.//

어느 날의 꿈 / 신석초
그대가 내 옛 마을에 오고/ 내가 큼직한 용마름이 보이는/ 내 옛 집으로/ 그대를 맞아들였네// 집안은 온통 잔칫날처럼/ 사람은 백결 치듯하고/ 넓은 뜰에는 꽃이 환히 피어 있었네// 이른 아침나절에/ 그대가 잠든 당(堂)앞 호숫가에서/ 내가 작은 마상이를 씻고 있었네.// 그대를 깨워 일으키려는/ 내 막내놈을 제지하고/ 그대로 하여금 늦잠을 자게 하였네.// 그대가 잠든 당(堂)앞 호숫가에서/ 밑바닥이 환히 들여다보이는/ 맑은 호수 물에서// 내 손이 뒤척이는 작은 거룻배에/ 깨끗한 모래알이 담겼다가/ 살레살레 씻겨 나갔네.//

여명(黎明) / 신석초
밤은 지새노라. 긴 한 밤/ 차운 어둠으로 밤은/ 가노라./ 장미인 양 피어지는 나의/ 옷자락이/ 잠든 희미한 네 영혼을 안고/ 내 손은 아리따운 백합으로 어리어/오만한 네 이마를 어루만진다/ 오오, 광명의 아들 프로메테우스여./ 잠을 깰 때가 왔노라/ 일어나렴아/ 어지러운 슬픈 모이와/ 무료(無聊)와 한 많은 구속의/ 자리에서/ 프로메테우스 네 몸을/ 일으켜/ 저어 드높은 산맥을/ 내리라.// 너는 네 육체로 돌아왔노라./ 너는 자유를 얻었노라./ 비약하지 않으면 안 되리./ 빠른 동작과 불타는/ 의식으로/ 네 무상(無上)한 영역을 잡아라.// 프로메테우스여./ 네 팔과 다리를 내밀라./ 크고 보드러운 수목과/ 소생하는 아침의/ 황량한 안개 낀 광야로/ 너의 영광과 너의 꿈꾼/ 비밀하고도 새로운/ 가지가지 이상 건축을/ 세우기 위하여.// 어느덧 밝음을 고하는/ 나팔 소리 날카롭게/ 빈 창공을 건네노라/ 잿빛 구름 떠도는 골짜기에/ 희학(戱謔)하는 천사의 무리들/ 저마다 나래를 펴고/ 지저귀는 새들 어지럽게도/ 그를 시새노라/ 이럴 때 무리로 벌어지는/ 나의 꽃잎이/ 내오(內奧)한 벗은 우주를 낳는다.// 우주는 나의 산산한 주옥 속에/ 숨김 없이 형체를 드러내고/ 기세를 찾은 모든 생물의/ 무리들의 떠들며 움직이는/ 발소리/ 수많은 금강석이 쏟아지는/ 소리 속에 그 속에/ 갖은 관념의 물결은 치노라.// 아아. 바람이 불려는도다./ 프로메테우스여. 달리어가거라./ 저어 수풀 저어 부산한 물결 속으로/ 저어 섬과 섬 어지러운 저자/ 황금빛 표피(豹皮)가 드날리는/ 속으로/ 그래 널 그 속에 숨이게/ 하여라.// `프로메테우스'―/ 나는 일어나노라. 멸망으로부터/ 오랜 오뇌로부터/ 나는 되살아났노라 나는 부신/ 눈으로 세계를 보노라/ 아아. 무슨 숙명의 장난에/ 나는 이끌렸던가?/ 나는 내 몸에 얽힌 사슬을/ 풀고/ 내 사지를 길게 뻗어 보노라/ 난 이제야 나로 돌아왔노라// 난 본디 불이로라/ 오오, 황취(荒鷲)여 나는 모든 것을/ 태우려 하노라/ 모든 것을 불사르려 하노라./ 눈물과 영탄을 버리리/ 하잘것없는 이 관념 형태를/ 두들겨 부숴라/ 나는 자유로운 몸으로 지새는/ 나의 영토를 내리려 한다.//

추호(秋湖) / 신석초
무심코 휘저은 한 물결이/ 일만 물결로 번져 간다/ 아늑하고 은밀한 이 호수에/ 한 마리 백조도 와 목욕 감지 않은/ 이슥한 이 물가에/ 잠자는 내 아내의 눈썹/ 여울 속 하늘에 뜬 흰구름도/ 아무 말이 없어라.//

심추(深秋) / 신석초
손 대면 꽃물 들 듯한 나뭇잎들.// 연 사과 같은 태양의/ 눈부시게 쏟아지는 금가루/ 천산(千山)에 가을은 짙어 가고.//

낙엽(落葉)의 장(章) / 신석초
1// 서릿바람이 산뜰을 휩쓴다./ 낙엽이 낙화처럼 흩날린다./ 낙엽이 산뜰을 덮는다.// 나뭇가지 사이로 파란/ 하늘이 터져 온다/ 산뜰이 갑자기 너그러워진다.// 붉은 노을이 산정의/ 푸른 기와 위에 번득인다./ 뜰 아래 단풍이 홀로/ 곱게 곱게 불탄다.// 2// 낙엽이 가득한 산뜰에/ 주인이 홀로 거닌다/ 머릿속의 사념이 푸른/ 바다 물결처럼 출렁인다// 머리 위에 흰구름이 돈다./ 산사의 종소리가 운다./ (종소리는 가깝고 차게 떨어진다)// 주인은 말없이 국화꽃을 들여다본다/ 국화빛이 유난히 푸르다.//

낙와(落瓦)의 부(賦) / 신석초
가을 황혼에,/ 쓸쓸한 폐허를 걸어서/ 나는 혼자 헤매이도다./ ―무한히 열린 창공에 물들어서.// 슬픈 국화꽃/ 태양 아래(나는 천상의 술을 마시고)/ 꽃잎같이 흩어져 구르는/ 푸른 파편들을 밟고 가도다.// 서녘 바람은 마른 나뭇가지에 깃들이는/ 작은 새들을 고독히 하고.// 어느덧 달은 이슬에 젖어,/ 내 발밑에 비명하는 깨진/ 보석을 비추이도다.// 오오, 눈앞에 흩어진 낙엽들이여,/ 영화의 무덤 위에 불가항력의/ 조각들이여!// 멸망하기 쉬운/ 시간은 물과 같이 흐르고,// 어디선 애끊는 적(笛)소리/ 저 멀리 들려오도다.//

비취단장(翡翠斷章) / 신석초
너 자신을 알라.―소크라테스//

슬프다, 바람 숲에 구르는 옛날의 옥석(玉石)이여/ 비취, 보석인 너 노리개인 너여/ 아마도 내 영원히 잊지 않을 너만의 자랑스러운/ 영화를 꿈꾸었으련만/ 뜬 세상에 어지러운 오뇌를 안고/ 거칠은 쑥대 구렁을 내가 헤매느니/ 적막한 깊은 뜰을 비추이는 푸른/ 달빛조차 어이 흐려 있는다.// 푸른 기왓장 흐트러진 내 옛 뜰에/ 무정한 꽃만 피어 지고/ 쓸쓸한 파멸 속에 너는 굴러서/ 창백한 때의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볕살을 헤인다.// 아아, 이슷한 오경 밤에/ 그므레 타는 촛불 옆에/ 홀로 누워 잠 못 이루는 여인의/ 희고 나릿한 백설 같은 목덜미/ 숱한 머리쪽은 풀어져 물결치는/ 베개 위에 찬 달 그리메/ 애달픈 꽃잎을 그려라.// 비취. 오오, 비취. 빛나는 옥석(玉石)이여/ 내 전신(轉身)의 절 안에 산란한 시간의 발자취/ 다비의 낡은 흔적이 어릴 제/ 너는 매혹하는 꽃 같은 손길에 이끌리어/ 그지없는 애무 속에도 오히려 불멸하는 빛을 던진다.// 나는 꿈꾸는 몸뚱이를 안고/ 소슬한 대숲 바람결에/ 솟아오르는 허무한 욕구를 사르면서/ 혼자서 헐린 뜰을 내리려 한다/ 저곳엔 시들어지는 고운 난꽃 한 떨기/ 또, 저곳엔 깨끗한 댓돌 위에/ 꿈결같이 떠오르는 영원한 처녀의 자태……// 어쩔까나/ 나의 난심을/ 내 어지러운 갈레는 마음을/ 비취. 내가 옛 동산을 가고 또 오는/ 내 몸 고달픈 시름의 넌출을/ 인간의 얼크러진 갈림길로 알고서/ 고독한 푸른 옥에 몸을 떨며/ 슬픈 리라의 가락을 탈까나// 비취. 오오, 비취. 티없는 네 본래의/ 빛깔이야 부러워라/ 저, 심산 푸른 시냇가에 흩어지는 부엿한 안개 떠돌아서/ 창천은 흐득이는 여명의 거울을 거누나/ 아아, 오뇌를 알은 나/ 영겁을 찾는 나/ 비밀한 유리 속에 떠서 흔들리는 나여. 너를 불러라./ 빛과 흠절의 수풀 위에 찬 보석이여./ 나여. 정신이여/ 멸하지 않는 네 밝음의 깊은 근원을 찾아라…….//

상아의 홀(笏) / 신석초
이 홍옥의 잔등이/ 어쩌면 상아의 홀이러라./ 매혹하는 대리석 한 조각/ 너의 벗은 등허리로/ 환한 반달이 떠오른다.//

뱀 / 신석초
뱀은 빛나는/ 황금의 너울을 쓰고/ 미풍에 나부끼는/ 꽃밭으로 흐느적거리다// 뱀은 비늘의/ 은밀한 간살마다/ 구름장 떠도는/ 근심스러운 피 빛깔을 흘레다// 오오 붉은 양귀비꽃 옆에/ 마성(魔性)의 한 덩어리여/ 네 누운 매무새/ 느므림은 곁할 수가 없어라// 애매한 가지/ 침의(寢衣)로 두른 질탕한 허리/ 푸른 띠 흐르는 요염한/ 꾀 많은 꿈트리// 미궁으로 얽는/ 꿈의 또아리 속에서/ 넋은 불타는/ 위태한 탄력을 싸다// 몸은 구슬픈/ 구렁이의 타―ㄹ/ 거짓하는 그물의/ 심연으로 꿈은 꺼지려든// 몸은 슬픈데/ 넋은 어지러이/ 빛난 넌출을 감아서/ 지혜 놀음하는 저자로 헤매다.// 뱀은 꿈어리는/ 수수께끼의 넌출/ 저자에 서린 불꽃 혀 둘러/ 총명한 `아이들'을 꼬이다// 꼬여라, 그늘의 사자(使者)./ 붉은 꽃술 속에서/ 신은 와서 취하고/ 신 없는 하늘로 비틀거리다// 누리 없는 꿈/ 둘레 없는 누림/ 신은 네 하늘에/ 오색 영롱한 무지개를 그리다.// 빛과 그리메와/ 매혹의 영구한 모이로/ 뱀은 서린 자리에/ 슬픈 전설을 남기면서―//

신라고도부(新羅古都賦) / 신석초
1// 멀리 달려온/ 구름 벌판/ 밭틀에 구르는/ 낡은 기왓장/ 십팔만 호/ 옛 서울은/ 가뭇없는 꿈일레라.// 소슬한 가을 바람/ 호젓한 길가에/ 묻힌/ 신라 왕궁의 화초와/ 삼한(三韓) 의관들.// 저녁 안개 서린/ 아리나리강 찬 마을에/ 먼 개 짖는 소리/ 들리고// 무덱무덱/ 섬처럼 떠오는/ 고대 왕릉에/ 소리개 날아/ 떠돌아 우니노라…….// 2// 서라벌 옛 도읍/ 가을 으스름/ 푸른 연기 자욱한/ 미추왕릉에/ 솔바람 차다.// 멀리 돌아가는/ 동해 구름/ 구름엔 어린 삼천리/ 신라 천년 꽃구름도/ 꿈에 들어 스미노라.// 적막한 요석궁반에/ 지나는 나그네/ 푸른 옷깃에/ 낙엽이 지노라.// 아아, 인사(人事)는 변하여/ 그지없어라./ 벽해 상전이 되어/ 옛것이 가고 오지 않으니…….//

천마도(天馬圖) / 신석초
천마야, 달려가거라/ 동해의 하늘로/ 한 조각 마른 자작나무/ 껍질의 하늘로/ 오색 인동(忍冬) 무늬의 하늘로/ 먼 구름으로/ 먼 아미타불의 하늘로// 거기엔 무엇이 있을까나/ 거기엔 밝음이 있었을까나/ 삼국의 풍운의 그 구름의/ 성을 뚫고 나갈/ 무슨 찬란한 말씀이라도/ 있었을까나.//

 

수렵도 / 신석초

이것은 백마, 이것은 오초마/ 이것은 용마/ 마상(馬上)의 사람은 모두 점잔도 하다/ 손엔 화살을 들고/ 어깨엔 살통을 메었으나/ 모두 감투를 쓰고/ 도포처럼 생긴 옷을 입었다/ 벼랑 밑으로 느슨히 말을 몰아/ 서로 돌아다 보며/ 무슨 대화를 하느뇨/ 평화롭고도 점잔한 사냥꾼들/ 그대들의 짐승은 어듸 있느뇨/ 우리는 모른다/ 그저 미지의 숲을 가는 일밖에.//

 

불국사탑(佛國寺塔) 1 / 신석초
불국사 깊은 뜰에/ 사람은 없고/ 탑만 홀로 서 있노라.// 구슬같이/ 꽃같이/ 씻은 거울과도 같이// 불국사 너븐 뜰에/ 사람은 가고/ 탑만 절로 빛나노라// 눈부신 고운 형태/ 한 점 속된 티끌도/ 쓸었에라// 돌을 깎아서/ 보물로 만드는 사람의 조화를/ 신(神)도 아지 못하리라// 저 임아 천고 원한을/ 말치 말아./ 사람은 가도 탑은 남아/ 영구히 빛나노라.//

불춤 / 신석초
동트는 숲 속에서 보랏빛/ 우라노스*의 고요 속에서/ 페닉스*는 불타는 보석의 나래를 펴고/ 날아오른다. 하늘로/ 솟아오른다. 한 잎의 불꽃으로./ 찬란하게 벗은 몸뚱어리가/ 황금가지로 늘어지고/ 눈부신 백합꽃 수낭이로 뻗어/ 꽃으로 되어 화살로 되어/ 봉화로 되어/ 타오른다./ 삼십삼천*의 울려퍼지는 종소리/ 삼십삼천 욕계 구만리로/ 웅웅거리는 종소리/ 성처녀의 신비로운 두 팔이/ 붉은 명정을 휘날리고/ 욕망의 갈기를 발기발기 찢으며/ 바람 속 꽃잎으로 부서져/ 여울에 져서 무수한 꽃잎이 흘러가듯/ 머나먼 물굽이로 흘러/ 하늘 밖에 나래 치고/ 샛바람 속에 나래가 무리지고/ 꽃무등 서고 도약한다./ 한 떨기 어여쁜 장미꽃 송아리로/ 받쳐 이어/ 솟아오른다. 솟아오른다./ 불구슬로/ 불꽃으로/ 오, 불멸하는 것, 눈부신 살/ 광명의 구두사(九頭蛇)여./ 번쩍이는 성(性)의 오, 번개,/ 프로메테우스의 누나여./ 너의 번개로 내 내부의 우주는 술렁이고/ 너의 놀라운 날음으로/ 내 나비의 혼은 되살아난다./ 창조의 희망이 네 부리에서 시끄럽게 짖어대고/ 생각하는 이파리는 모두 날개를 펴/ 꽃 핀 하늘로 올라가는구나./ 너는 빛나는 선회를 하며/ 황금빛 네 손가락이 꿈꾸는 기슭에까지/ 나의 숨결을 이끌어간다./ 작열하라. 타라. 불타올라라./ 헤스티어*의 긴 머리채/ 휘황한 비단실 타래가/ 뭉게뭉게 뭉게구름으로 뒤틀어 내리다가/ 다시 아슬한 꽃봉오리로 솟아오른다./ 하늘은 타 버리는 혼 속에서/ 전신을 다해 창백한 빛깔을 외치는구나./ 나는 너의 금강석의 회오리바람 속에서/ 미래의 연기를 마시려 한다./ 불타라. 타라. 타라.//
* 우라노스: 광대한 우주 공간.
* 페닉스: 이집트 신화에 나오는 신비로운 새. 아라비아사막에 서식하는데 500년 또는 1,500년 만에 신단 위에 날아와 스스로 불에 타 죽고 다시 그 재 속에서 새끼 새가 되어 재생한다 함. 불사조.
* 삼십삼천: 불교의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의 삼십삼천(三十三天).
* 헤스티어: 화로(火爐)의 신.

매혹(魅惑) 1 / 신석초
바람이런가/ 숨결이런가/ 내 마음 천길 물 속처럼/ 잠잠한데/ 내 안의 구석진 기슭에/ 훌쩍이는 이 갈대는/ 무엇인가// 노을이런가/ 달빛이런가/ 내 안의 먼 여울 속/ 물살져 쏟아지는/ 이 보석 조각들은/ 또 무엇인가// 잠 못 이루는/ 하늘의 호수 속으로/ 가만히 부르는 소리/ 한 마리 백조가 날아와/ 깃드는// 꿈결처럼 젖어드는/ 고운 꽃이파리/ 애끊는 여울에/ 구슬의 떨림이/ 이처럼 사무치는구나.//

매혹(魅惑) 2 / 신석초
내 내부의/ 저문 늪가에/ 황금빛 노을은/ 내리고// 잔잔한 노을 속에/ 꿈결에/ 다가오는/ 고운 꽃이파리// 잡으면 바스러져/ 허망한 꿈의 여울로/ 사라져/ 없어지리// 아아 나는/ 너의 매력에 이끌려/ 몸을 떨고/ 안간힘을 쓰며// 너의/ 잿빛 무덤 위에/ 쓰러져/ 나는 죽는다.//

검무낭(劒舞娘) / 신석초
꽃송아리 달아/ 전립(戰笠), 검은 머리 위에/ 비뚜름히 숙여뜨리고// 늘어진 버들가지……/ 긴 치마, 쾌자, 곁들여 입고/ 은장도, 두 손에 갈라 들고// 건드러지게 돌아가는/ 몸매, 꿈결에 흔들려서/ 쾌자, 반쯤 흩날리고// 자알 잘 흔드는 장도/ 공연히 죽을 둥도 모르는/ 매력의 잎만 떠돌게 하누나.//

도산(陶山) / 신석초
낙동강 상류 물 푸르고 모래 희고/ 연기나무 어린 별구(別區) 속에/ 꽃처럼 환히 동부(洞府)가 열렸나니./ 퇴계생(退溪生)이 이곳에 조그만 초막집을 지어놓고/ 만권도서 쌓아놓고/ 도산십이곡을 읊으며/ 나라에 큰 학문을 열어놓았나니./ 늦은 봄 낙화지는 석양 무렵에/ 후생이 와서 상덕사(尙德祠)에 절하고/ 천운대 흰구름 떠가듯이 그냥 총총히 떠나가누나./ 고인(古人) 가던 길을 지금이라 못 갈소냐./ 말씀이 하 심오하고 세월도 하 그리 멀었어라./ 서원 앞에 두 그루 매화나무/ 매화는 벌써 지고 뜻 속의 사람을 보지 못하니/ 예 듣던 강마을 그림인 양 밝구나// 광릉(光陵)에서 / 신석초
시월달에/ 광릉엘 오니/ 단풍이 흐드러지게 피어/ 환한 꽃밭 속이데/ 빨간 단풍잎 한 잎을 따서/ 구름에 띄워 보았네.// 다시 광릉에 오니/ 단풍은 바람과 함께 지데./ 상강(霜降)에 쌓인 가랑잎 밟으며/ 오솔길 걷는 멋을/ 내가 처음 알았네.//

궁시(弓矢) / 신석초
반달 같은 활 시위를/ 당겨 한 번 힘껏 쏘으면/ 휘영청 하늘에 가이없이/ 뵈지 않는 물결이 이느니,// 오오, 활이여! 네, 나는/ 황금의 아리따운 살로써/ 내가 가진 사념의/ 묘망한 구름을 쏘게 하여라.// 화살이 가서 찌르는/ 그 과녁을 남은 몰라라,/ 아무도 그 비밀한 곳을 몰라라.// 그래도 바람이 가는 이 사이,/ 빠르고 빛난 움직임이/ 잠들기 쉬운 내 몸을, 깨워도 있으리.//

규녀(閨女) / 신석초
네가 비밀한 장막 드리우고,/ 꽃과 같은 규방 속에서/ 내 여인이여! 너는 네 가슴에다/ 무슨 허무의 심사를 그리는가?// 깊고, 그윽하고 범할 수 없는/ 무구한 사원 속으로 너는 지니리라,/ 영원의 달, 푸른 모이와/ 스란 속에 네 아리따운 열매를…….// 오오, 규녀(閨女)! 감추인 옥석(玉石)!/ 후원에 핀 난꽃 한 떨기여!/ 네 숨음은 탄하기 어려워라.// 네 몸은 익어 타는 듯하여도/ 네 혼은 깊은 뜰 안에 있어/ 지샘이 가져오는 숲들을 헤매게 하누나.//

금사자(金獅子) / 신석초
금사자야/ 금빛 바람이 인다/ 해바라기가 피었다.// 하늘 아래 둘도 없는/ 너의 황금 갈기/ 휘황한 너의 허리// 주홍색 아가리를/ 딱딱 벌리고/ 조금은 슬픈 듯한 동굴 같은/ 눈을 하고// 맹수 중에/ 왕중왕(王中王).// 꽃 펴 만발한/ 싸리밭에/ 불붙은 태양의 먹이// 네 발로 움켜잡고/ 망나니로 뒹군다/ 땅 위에.// 고려 천년/ 화사한 날에/ 해바라기가 피었다./ 금빛 노을이 뜬다.//

돌팔매 / 신석초
바다에, 끝없는/ 물ㅅ결 위으로,/ 내, 돌팔매질을 하다./ 허무에 쏘는 화살셈 치고서.// 돌알은 잠ㅅ간/ 물연기를 일고,/ 금빛으로 빛나다/ 그마, 자취도 없이 사라지다.// 오오, 바다여!/ 내 화살을/ 어디다, 감추어 버렸나,// 바다에,/ 끝없는 묻ㅅ결은,/ 그냥, 가마득할 뿐......//

고풍(古風) / 신석초
분홍색 회장저고리/ 남끝동 자주고름/ 긴 치맛자락을/ 살며시 치켜들고// 치마밑으로 하얀/ 외씨버선이 고와라.// 멋들어진 어여머리/ 화관 족두리에/ 황금 용잠 고와라.// 은은한 장지 그리메/ 새 치장하고 다소곳이/ 아침 난간에 섰다.//

삼각산 옆에서 / 신석초
이 산 밑에 와 있네./ 내 흰 구름송이나 보며/ 이 곳에 있네.// 꽃이나 술에/ 묻히어 살던/ 도연명(陶淵明)이 아니어라.// 어느 땅엔들/ 가난이야 없으랴만/ 마음의 가난은 더욱 고달파라.// 눈 깨면 환히 열리는 산/ 눈 어리는 삼각산 기슭/ 너의 자락에 내 그리움과/ 아쉬움을 담으리.// 소스라쳐 깬 하늘 같은 것/ 출렁이는 바다 물결 같은 것/ 깊고 또 높은 것이여.// 이 산밑에 와 있네./ 내, 흰 구름송이나 보며/ 이곳에 있네.//

 



신석초(申石艸, 1909년~1975년) 시인
충남 서천에서 출생, 본명은 응식(應植)이다. 1929년 경성부에서 시인으로 첫 등단한 그는 이후 1931년, 일본 유학하여 일본 호세이 대학 철학과에서 배웠으며, 1935년 신병으로 중퇴하고 귀국, 한학(漢學)의 스승인 정인보의 소개로 이육사와 사귀게 되었다. 그때 육사 선생이 신석초와 교류하면서 가져간 시작품 <비취단장(翡翠斷章)> <바라춤 서사(序詞)>, <뱀>, <검무랑>, <파초(芭蕉)> 등 시 작품들이 육사를 통해 1935년부터 1940년까지 동인지 《자오선》· 《시학》· 《문장》 등에 발표됨으로써 시단에 알려졌다. 주요 작품으로는 장시 <바라춤>, <낙와(落瓦)의 부(賦)>, <불춤>, <어떤 가을 날에>, <만사(輓詞)> 등이 있다. 시집으로 《석초시집》, 《바라춤》, 《폭풍의 노래》, 《수유동운(水踰洞韻)》등이 있다. 1965년 한국시인협회장을 역임했으며, 1969년 예술원상을 수상하였고 1970년에서 1971년까지 신민당 문화예술행정특임위원 직위를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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