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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버스정류장 / 문경자

부흐고비 2021. 8. 9. 09:15

정류장도 많이 변했다. 지붕이 달린 바람막이로 대기실을 잘 갖추었다. 단순히 버스가 정차하여 승객을 태우는 것뿐만 아니라 팻말과 노선의 알림이나 노선이 표시된 지도가 부착되어있다. 그 뿐만 아니라 예쁜 아가씨의 안내 방송은 상큼한 분위기까지 되살아났다. 몇 년 전만 하여도 가고자 하는 노선을 알 수가 없어 옆 사람에게 길을 묻기도 했다. 잘 알고 가르쳐 주는 사람도 있는 반면 너무 엉뚱한 곳을 잘못 알려줘서 곤혹을 치른다. 그럴 때 마다 버스를 갈아 타고 몇 정거장을 더 가서 내리곤 했다. 시골에서 모처럼 올라 오신 시부모님을 모시고 가락동 시누네 집을 찾아 갈 때였다. 길을 몰라서 걱정은 되었지만 대충 짐작은 갔다. 분명히 여기가 맞는데 하고 내렸다. 버스가 떠나고 난 후에 잘 못 내렸다는 것을 알았다. 시부모는 얼마나 동기간에 왕래가 없었으면 정류장 하나도 제대로 알지 못 하느냐 하고 꾸짖었다. 연애하던 시절 청량리 어느 정류장에서 남자와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정류장을 찾지 못해 거리를 헤매다 많은 시간이 지나고 도착하니 남자의 모습은 그림자조차 사라지고 말았다. 혼자 힘없이 걸었던 일도 있었다. 가끔 청량리 쪽에 가면 시시한 옛 기억이 난다. 지금도 가끔 실수가 반복되기도 한다. 그럴 때면 혼자 빙긋이 웃으면서 나는 바보인가 봐 하고 슬며시 아무 죄도 없는 버스정류장을 흘겨본다.

정류장에 잠깐 앉아 있으면 플라타너스 잎이 햇살에 반짝인다. 노랑나비가 꽃을 찾아 날아가는 한가로움도 본다. 화단에 심어 놓은 백일홍이 지나가는 바람에 살랑거린다. 하나 둘 쉬었다 떠나가는 사람들을 맞이하는 곳 매일같이 다른 사연으로 색칠을 한다. 분홍색 빨간색 노랑색 검정색 흰색 등 새겨진 사연들을 차곡차곡 접어서 정류장 버스 안에 실어 보낸다. 아지랑이 같은 아련한 생각이 영화 필름처럼 술술 풀려나오는 곳이기도 하다. 사막의 낙타 등을 닮은 버스의 몸통에는 영화, 학원, 결혼 광고 등 재미있는 캐릭터가 새겨져 있어 눈길을 끈다. 버스 안은 시원하고 의자도 편안하니 앉기만 하면 졸렸다. 새털같이 가벼운 눈꺼풀한테는 천하장사도 못 이긴다 하던 시아버지 말씀이 귓전에 물레바퀴처럼 맴돌았다.

술을 좋아하는 시아버지는 오일장에 가는 일이 유일한 나들이다. 읍에서 장을 보고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리는 시간도 꽤나 길었다. 대충 꾸며 놓은 곳이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막걸리 냄새, 담배연기로 찌들고 나쁜 손들이 가끔은 주머니 속을 들락거렸다. 옆집에 사는 순이 엄마는 채소를 팔아 고등어 한 손을 사고, 영순네 아버지는 제사에 쓸 간조기를 누런 포대 종이에 싸서 간신히 들고 몸을 비틀거렸다. 시아버지는 오랜만에 어머니 부탁을 받고 지푸라기에 묶인 먹 갈치 두 마리 사서 동네로 가는 버스가 오기만 기다렸다. 정류장은 시골에서 유일하게 소통 공간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옆 마을로 시집간 딸 소식이며 사돈 팔촌까지 안부를 물어다 주는 배달부 역할을 하는 곳. 효자 노릇까지 단단히 하였다.

동네마다 팻말이 서있는 것도 아니다. 전빵이나 주막집 앞이거나 도로주변 아니면 마을 입구가 주차장이다. 혹시라도 잘 못 내려 다시 차를 부르면 자갈길을 가던 버스는 잠깐 기다리다 태워 주기도 한다. 길이 구불구불하여 신작로를 달리는 버스는 우리동네 정류장까지 오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시아버지는 술에 취하여 빈 손으로 집에 돌아 왔다. 정류장에 내려 볼일을 보고는 물건을 그대로 두고 왔다. 어머니는 노발대발 무서운 얼굴이 푸릇푸릇했다. 남편은 같이 가서 찾아와야 한다며 길을 나섰다. 뿌옇게 달빛이 내리는 시골의 길은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논두렁에서 우는 밤 벌레 소리가 외롭게 들렸다. 내가 그때 정류장에 마중을 나가지 않았더라면 이 산골로 시집을 와서 고생은 하지 않았을 텐데 부질없는 생각에 뿌연 하늘만 올려다본다. 그곳에 도착하니 희미하게 보이는 물건이 눈에 띄었다. 시아버지가 두고 온 먹 갈치는 푸른 달빛을 받아 번득이고 있었다. 동네 사람들의 이야기며 애환이 깃든 정류장은 비린내와 고개 숙인 달맞이 꽃 향기가 범벅이 되어 비릿하게 퍼졌다.

옛날의 그 정류장은 보 잘 것 없어 보였다. 거미줄과 집 매매, 땅 매매, 사람 찾는 광고지가 찢어진 채로 장식을 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삶을 이야기하고 꿈을 실어 나르던 정류장 사람도 퇴색하고 명을 다하여 한 조각 구름이 되어 오늘도 그 위를 떠다닌다. 지금은 동네 입구에 거창의 특산물인 사과 모양을 만든 지붕아래 앙증맞은 의자가 놓여 있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한 명도 없다. 젊은 세대는 승용차, 연세 든 어른들은 겨우 지팡이에 의지하는 현실이다. 친정아버지도 시집 간 딸을 데려다 준 옛 정류장에서 작별 한 후로 한 번도 찾아오지 못했다.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 오랜 세월도 인생도 쉬어 가는 정류장에 머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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