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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점심을 먹으러 죽집에 갔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한창인 요즈음에는 식당이 한가해지는 시간에 찾는다. 식당 안에는 중년 남성 한 사람뿐이었다.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주문하고 식사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그 남성의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전화 통화하는 소리였다. 다소 격앙된 어조에 육두문자가 섞여 나왔다. 계속 듣고 있자니 기분이 언짢았다.

말소리는 언제 어디서나 들려온다. 대화 자제를 권고하는 사회 분위기임에도 마찬가지다. 침묵이 미덕이 된 지금, 나에게는 언제 들어도 기분 좋은 말소리가 있다.

“안∧녕∧하∧십∧니∧까? 류∧0∧0∧입∧니∧다.”

갑작스러운 추위로 마음이 스산해진 아침, 첫 환자의 음성이 대기실에 울려 퍼졌다. 독특한 억양이었다. 특정 지역의 사투리가 아니었다. 느릿느릿, 아슬아슬 이어졌지만 한음 한음에 힘이 넘쳤다. 진료실 안에 있던 나는 지적 장애인이거나 치매 노인일 거라고 지레짐작했다. 마음의 준비를 했다. 진료실 문이 열리고 70대 노인이 들어오셨다. 이럴 수가! 예상이 빗나갔다. 예술가의 향취가 물씬 풍기는 노인이었다. 검은색 헌팅캡 모자 밑으로 단정하게 빗겨 내려진 반백의 머리카락, 날씬한 몸에 받쳐 입은 감색 코트 위로는 긴 목을 휘감은 자주색 체크 무늬의 목도리가 멋지게 꼬리를 내리고 있었다. 깊은 눈가주름에는 살아온 세월의 길이가 드러났지만, 눈길은 부드러웠다. 밝게 웃으며 나에게 묵례하시더니, 의자에 앉으셨다.

노인은 배뇨장애로 오셨다. 뇌졸중 후유증으로 운동성 실어증(motor aphasia)이 온 상태였다. 이 경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지만, 말소리를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 지인의 소개로 왔다고 알리려는 듯, 큰 소리로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부르셨다. 진료 중에 내 말은 거의 알아들으셨지만, 자기 생각을 말로 표현하지 못해 답답해하셨다. 그때마다 미안한 듯 살짝 드러내는 미소에서 그가 해맑은 영혼의 소유자임을 느낄 수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내가 노인의 상태를 짐작해서 질문하면, 노인은 고갯짓으로 하시거나, “예, 아니요.”로 짧게 답하셨다. 그것으로 부족해서 말로 나타내야 할 때는 눈을 말똥거리며 한참을 생각하다 겨우 대답하셨다. 대개 이런 환자들은 주눅이 들거나 부끄러워서 아예 말하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노인은 달랐다. 한 마디라도 더 말하려고 애쓰셨다. 그것도 큰 목소리로. 나는 노인의 말소리에서 무한한 긍정의 힘을 보았다. 그때만 해도 나는 노인이 왜 그렇게 크게 말하려고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순응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노인이라 보기 좋았다. 진료가 끝나자 노인은 일어서면서 큰 소리로 인사하셨다. 준비해 둔 말인지 한결 수월해 보였다.

“안∧녕∧히∧ 계∧십∧시∧오.”

노인에게 말은 기쁨이었고, 기쁨은 희망이었다. 평소 건강을 자신했고, 음주가무(飮酒歌舞)를 즐겼다던 노인. 평소와 다름없이 지내던 어느 날, 갑자기 어질해지면서 팔, 다리에 힘이 빠짐을 느꼈다. 곧이어 정신을 잃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깨어나니 병원이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부인이 눈에 들어왔다. 힘껏 불렀다. 그런데…,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다시, 또다시 불렀다. 여전했다. 눈앞이 캄캄했다. 벼랑 끝에 다다른 심정이었다. 그대로 뛰어내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며칠이 지나자 팔, 다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음을 고쳐먹었다. 재활에 매진했다. 드디어 말문이 터졌다. 비록 한 음절뿐이었지만 노인에게는 소중했다. 무언가에 대한 소중함은 그것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된다. 소중함 뒤에는 간절함이 있다. 노인의 간절함은 한 음절을 한 단어로 만들었고, 한 단어는 곧 한 문장이 되었다.

노인은 매달 내원하셨다. 나는 대기실에서 들려오는 특유의 인사말로 노인이 오셨음을 알았고, 늘 같은 인사말을 들으며 노인과 헤어졌다. 그날은 노부인과 함께 오셨다. 노부인이 환자였다. 노부인의 거동이 불편하지 않으셨는데도 굳이 동행하신 걸 보고, 금슬 좋은 노부부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이유는 따로 있었다. 자리에 앉은 노부인은 자신의 증상을 말씀하기 시작했다. 급성 방광염이 의심되었다. 노부인에게 궁금한 점을 질문드렸다. 노부인은 대답은 하지 않고 바로 노인을 쳐다보셨다. 노인의 입에서 큰 말소리가 튀어 나왔다. “언∧제?” 노부인은 알아들으셨는지 고개를 끄덕인 후 대답하셨다. 노부인은 청각 장애인이었다. 몇 해 전에 귓병을 앓은 후, 청력을 잃었다고 하셨다. 그날의 진료는 그런 식으로 진행되었다. 그게 부족하면 노인의 눈짓, 몸짓이 더해졌다. 노인은 일종의 통역자였다. 노인이 말하려고 애쓰시는 것을 보고 있으려니 안쓰러웠다. 내가 큰 소리로 말해보았지만, 노부인은 알아듣지 못하셨다. 마치 오랜 부부 사이에서만 통하는 그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노인이 평소 큰 소리로 말하려고 노력하신 이유를. 노인은 노부인의 귀가 되려 하신 것이다.

두 장애인을 상대로 한 그날의 진료는 평소보다 오래 걸렸다. 하지만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노부부에게서 받은 색다른 에너지에 마음이 벅차올랐다. 진료를 마치자, 노인은 한동안 머뭇거리며 생각하시다가 또박또박 말씀하셨다. 전에 들었던 그 인사말이 아니었다. 투박한 노인의 말소리는 사랑하는 연인에게 속삭이는 귓속의 밀어만큼이나 감미롭게 들렸다.

“귀∧는∧ 잘∧ 들∧리∧거∧든∧요.”

말하기가 발산이라는 양(陽)의 표상이라면, 듣기는 수렴이라는 음(陰)의 표상이다. 음양은 개별적이고 상반되지만, 균형을 이루고 융화되어야 한다. 흔히 부부 사이를 음양에 비유하곤 한다. 이제는 항시 붙어 다니며 서로의 귀가 되고, 입이 되어 살아간다는 노부부. 장애가 생긴 후 사이가 더욱 돈독해졌다는 노부부. 장애는 각자에게는 불행이지만, 새로운 부부 관계의 시작이기도 했다. 그날 나는 아름답고 오묘한 음양의 조화를 저 노부부에게서 보았다.


장석창 프로필 : 에세이문학•한국산문 등단, 보령의사수필문학상 대상, 한미수필문학상 대상, 보령의사수필문학상 금상, 저서 <아픔은 당신 탓이 아닙니다>(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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