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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일찍 찾아온 무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한여름 잠 못 들어 뒤척이던 어느 밤. 오후 내내 직방으로 내리쬐는 태양열로 한껏 달궈진 집안을 식히느라 한껏 틀어놓은 에어컨 바람이 서늘하게 느껴질 즈음 부스스 일어나 에어컨 스위치를 끄고 다시 침대에 드러누워 본다. 여전히 잠은 오지 않는다.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단숨에 들이키고 다시 자리에 눕는다. 서서히 술기운이 번져온다. 천장이 희뿌옇게 변하면서 꿈틀대기 시작한다.

온갖 상념들이 스멀스멀 기어 다니기 시작한다.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 은근히 속으로 좋아했던 계집아이 얼굴, 박경리의 ‘토지’ 속 월선이와 용이, 임이네, 메밀밭길을 휘적휘적 걸어가는 허생원과 동이… 수많은 얼굴들이 어지럽게 천장에 나타났다 사라진다. 한여름 밤의 꿈! 아, 맞아! 그런 게 있었지. 그 위대하신 셰익스피어가 쓴 네 청춘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 그 주인공 이름이 뭐였더라? 누가 누구를 좋아했었지? 근데 왜 사랑은 늘 그렇게 점순이는 갑돌이를 좋아하는데 갑돌이는 갑순이를 좋아하는 식으로 빗나가고 어긋나기만 하는 걸까… 서서히 눈꺼풀이 무거워져 온다. 가만! 휴대폰에 메시지가 온 모양이네? 이 밤중에 누가?!?

“어찌 지내시나요? 정말로 너무나 오랜만입니다. 이 주소가 맞는지 모르겠네요. 우연히 인터넷을 뒤지다가 이메일 주소를 알게 되었습니다. ( …) 저는 이럭저럭 지내고 있습니다. 처음이라 어떻게 쓸지 몰라 민망하네요. 솔직히 여러 가지 할 말도 있었던 것 같은데 생각도 안 나고… 옛 생각도 나다가 가버리고요. 참말로… 다음에 다시 소식 전하기로 하고 이만...”

정신이 아득해 온다. 이게 도대체 얼마 만인가? 30여 년 전의 기억들이 어지럽게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아! 그 얼굴… 그날 이후 한 번도 보지 못 한 얼굴. 그날 이후 날마다 마주하는 얼굴. 평생토록 나를 따라다니는 얼굴. 평생토록 내가 쫓아다니는 얼굴. 모차르트의 교향곡 40번을 들을 때면 아득하게 밀려오는 선율 속에 안개처럼 피어오르던 얼굴. 그 얼굴…

“리나씨… 리나! 정말 얼마 만에 불러보는 이름인지...? 소식 궁금했어요. 무척…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세월이 얼마나 빠른지… 벌써 30 년이라니… 보고 싶었어요. 많이…

하도 오랜만에 갑자기 연락이 닿으니 무슨 얘기부터 해야 할지 가닥이 잡히지 않네요. 밀린 얘기는 차차 하기로 하고 오늘은 이만…”

“참말로 이렇게 멜로라도 만날 수 있다는 것에 너무 감사하네요. 답장을 받고 처음은 멍했고, 조금 후 눈물이 핑 돌고, 그리고 얼마간은 숨을 가다듬고 했네요. 너무 그리운 시절이 아련히 떠오르네요. 그 서점과 레코드점 있던 자리를 지날 때마다 참으로 그리움에... 너무 많은 세월이 흘러서 참으로 너무나 아쉬운 지금입니다. (…) 정말로 저도 너무 많이, 참으로 많이 보고 싶네요. 눈물이 핑 도는 오늘입니다.”

“그래요. 이렇게 연락이 다시 닿았으니 고마운 일이지요. 보내온 이멜 한 줄 읽고 천장 쳐다보고, 또 한 줄 읽고 멍하니 하늘 쳐다보고... 그렇게 몇 번을 읽고 또 읽고 하며 하루를 보냈네요. (…)”

이메일을 보낸지 며칠이 지나도 답이 없다. 카카오톡에 이름을 치고 찾아본다.

“ ???”
“Hello! (이모티콘)”
“무슨 일 있어요?”
“없어요. 잘 지내시죠?”
“멜 답이 없어 걱정했어요.”
“아니에요.”
“그럼 됐어요. 나중에 멜 줘요.”
“멜을 쓰려고 하면 여러 가지 생각이 많아서… 그래서 못 쓰고 있어요.”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요?”
“어떻게 지냈다고 해야 하나? 그냥... 아무 생각없이 살았어요. 아니, 살아냈다고 해야 하나? 맞아요! 그말이 딱 맞네요. 살아냈어요.”
“리나! 밝고 건강하게 살아요. 행복해야 해요. 그러라고 우리가 그 오랜 세월동안 떨어져 지내야 했는데... “
“그래요.”
“우리 이제 이렇게 다시 연결이 되었잖아요. 우린 헤어진 적이 없어요. 그냥 떨어져 있었을 뿐...”
“떠나기 전에 한번쯤 다시 만날 수도 있었을 텐데... 이제... 세월이 너무 흘러버렸네요.”
(…)

“우리가 사무실 밖에서 처음 만났던 날 기억해요?”
“그 카페는 어렴풋이 기억나는데 어떻게 해서 거기 갔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해요. 전 요즘들어 옛날 일들을 많이 기억 못 해요.”

“우리가 새로 생긴 부서에 발령받아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땐데 그 날 점심시간에 리나씨가 카세트로 음악을 듣고 있었지요. 어쩌다가 옆에 있던 다른 사람들 몇 몇이 지금 듣고 있는 곡이 뭔지 아느냐?는 둥 그런 잡담를 하던 중 내가 이어폰으로 잠간 들어본 후 ‘모차르트 40번이지 아마?…’ 하고 시큰둥하게 툭 던졌지요. 그 때 리나씨 얼굴에 ‘어! 생긴 건 볼품없이 비쩍 마른 사람이 클래식을 아네?!?...’ 하는 듯한 표정이 얼핏 스쳤어요.”

“그랬어요? ㅎㅎㅎ 그래서요? ”
“그 날 낮에 다른 일로 리나씨가 기분이 별로인 일이 있어서 내가 퇴근 길에 어디 가서 칵테일 한 잔 하겠냐고 했죠.”
“아! 그러니까… 우리 사일 맺어준 건 모차르트인 셈이네요. 모차르트 40번!”
(…)

“슈베르트에요. 난 오늘 이 곡 여러 번 듣고 있어요. ‘네 손을 위한 피아노 환상곡 F단조’. 피아노 한 대로 남녀 두 사람이 함께 연주한 곡이에요.”
“세번째 듣고 있어요. 아름답고도 쓸쓸한 곡이군요. 우리 삶의 모습처럼… 들을수록 매력이 있을 것 같네요. 참말로 이렇게 카톡을 하게 될 줄을… 참말로 이런 일이 생길 수가… 삼십 년 만인데… 이 건 말도 안 되는 상황. 계속 카톡 한 것 같은 느낌…”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있는 거지요. 그래서 박경리 선생은 시 <삶>에서 ‘(…) 슬픔도 기쁨도 왜 이리 찬란한가?’ 라고 했나 봐요.”
“찬란한가!?!... 우리의 젊은 날은 찬란했었는지?… 그와 비슷은 했었는지?…”
“모르겠어요. 나이가 들어가면서 모든 걸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그렇게 남은 생을 사랑하면서 살려고 해요.”

“어제 공원길을 산책하다가 찍은 사진이에요.”
“프리지어 같기도 하고... 공원이 가까이 있나 봐요.”
“봄 내내 민들레가 흐드러지게 피었다가 사라진 자리에 이렇게 이름 모를 들꽃들이 피어 있네요. 자세히 보면 벌들도 몇 보이고… 시간이 지나 이 꽃들이 지고 난 자리에는 또 다른 꽃들이 피어나겠지요. 저 작은 꽃들 속 어딘가에 있는 그 벌이 많은 사람들의 눈에는 얼른 보이지 않듯이 우리 삶 속 어딘가에 늘 숨어 있는 조그만 행복의 실마리들을 우린 미처 깨닫지 못하고 흘려버릴 때가 많은 것 같아요. 지금 이 순간… 얼마나 행복하고 소중한 순간인지 나중에 또 한참 세월이 흐른 후에 깨닫게 되겠지요.”

“예 맞아요. 우리는 지금 현재가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고 더 소중한 것 더 좋은 것만 찾다가 항상 지금을 잃어버리죠. 그래서 늘 외롭고 허전하고 괴롭고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더 좋은 것은 아무 데도 없어요. 지금만 있을 뿐. 지금이 가장 중요한 순간이죠.”

불현듯 어디선가 교향곡 40번 선율이 애원하듯, 하소연하듯 흐르다가 어느새 환상곡 F단조로 바뀌어 있다. 3악장 절정을 넘어 다시금 제1주제가 가을 나무 우듬지끝에 매달린 그리움처럼 조용히 흔들리며 밀려온다.

“우린 지금 몇 악장쯤에 와 있는 걸까요?“
“3악장? 4악장 초? 훗날 또다시 한참 세월이 흐른 뒤 언젠가 이 곡을 들으며 미친 듯이 울어버릴 날이 있올 듯 합니다.”

“카톡!” 소리에 퍼뜩 눈을 뜬다. 아침 햇살이 창으로 파고든다. 유난히 붉게 물든 단풍잎 하나가 공중을 빙그르르 돌면서 떨어진다. 아! 어느새 또 가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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