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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조태일 시인

부흐고비 2021. 10. 19. 08:35

국토 서시(國土序詩) / 조태일
발바닥이 다 닳아 새살이 돋도록 우리는/ 우리의 땅을 밟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숨결이 다 타올라 새 숨결이 열리도록 우리는/ 우리의 하늘 밑을 서성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야윈 팔다리일망정 한껏 휘저어/ 슬픔도 기쁨도 한껏 가슴으로 맞대며 우리는/ 우리의 가락 속을 거닐 수밖에 없는 일이다// 버려진 땅에 돋아난 풀잎 하나에서부터 조용히 발버둥치는 돌멩이 하나에까지/ 이름도 없이 빈 벌판에 빈 하늘에 뿌려진/ 저 혼에까지 저 숨결에까지 닿도록// 우리는 우리의 삶을 불지필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숨결을 보탤 일이다/ 일렁이는 피와 다 닳아진 살결과/ 허연 뼈까지를 통째로 보탤 일이다//

다시 산하(山河)에게 / 조태일
1// 불꺼진 시간 위에서 이제 아픈 기억을 쓰다듬는 나의 산하./ 수목들은 이파리에/ 찢어진 지표(地表)를 펄럭이고 있지만/ 피비린 골짜기마다, 젖어 있는 시간은 뒹굴고 있지만/ 선언을 다한 지상의 탄우(彈雨)가 내리던/ 나의 조그만 산하여./ 아침 햇살 빗어 내리듯/ 일월(日月)의 가장 슬픈 인종(忍從)을 빗어 내리는/ 멀고 가까운 사랑을 뿌리며, 선사(先史)의 비는 내리고/ 쓸쓸히 돌아간 유골(遺骨)의 음성이 선량한 박수처럼/ 산하여, 나의 아픈 기억 위에 내리고 있다./ 넘쳐 흐르는 예감이 아닐지라도/ 나의 슬픈 산하여./ 씨 한톨의 내부에서 부서지는 세계의/ 오랜 사연을 철썩이면서/ 이젠 깨어날까?//

2// 산정에 올라서 나는 너의 치맛자락을 슬프게 붙들고 있다./ 장군(將軍)들의 아이들이/ 꿈의 징검다리를 건너가던 새벽 언제쯤이었던가./ 피 흘리며 뚝뚝 지던 시간의 동체를 문지르며/ 너의 옷자락으로 숨어들던 표성과/ 맹수들의 팔다리에 엉키던 신앙의/ 전언(傳言)은 무엇이었을까./ 탄피의 고요만이/ 피를 말리는 서정 위에 잠들어 있고/ 격한 메아리가 밀리던 바위 밑에서/ 눈먼 나의 새는 햇살을 쪼고 있다./ 그러나 산하여./ 나는 너의 형체를 기억할 수가 없다./ 나의 성장을 흔들며 울다 간 화조의 몸부림이/ 나의 언어를 흔들지라도/ 의실 구석마다 아로새겨진/ 진리의 턱수염을 거칠게 흔들지라도/ 너의 우울했던 나날/ 포성에 묻어간 너의 노래를/ 하여, 너의 색채를 기억할 수가 없다.//

3// 학동들의 발끝에서 묻어나는/ 결의(決意)의 아침/ 아직 살아남은/ 원인들을 달래며 아픈 기억을 씻는 풍물들./ 오래인 동면의, 타다 남은 가지마다 돌멩이마다/ 식욕들의 푸른 항변이 묻어 있다./ 가녀린 사슴의 뿔 위에 내리던/ 달빛 별빛들의 안부여./ 너로 하여 사는 세월이 감기게 감기게/ 나의 산하는/ 화답하는 풍물들을 보듬을 수 없을까./ 그리하여 산하는/ 이제 나의 독재 안에서 차라리/ 방황하게 하라./ 방황하게 하라.//

다시 오월에 / 조태일
오월은 온몸을 던져 일으켜 세우는 달.// 푸르름 속의 눈물이거나/ 눈물 속에 흐르는 강물까지,/ 벼랑 끝 모진 비바람으로/ 쓰러져 떨고 있는 들꽃까지,// 오월은 고개를 숙여 잊혀진 것들을 노래하는 달.// 햇무리, 달무리, 별무리 속의 숨결이거나/ 숨결 속에 사는 오월의 죽음까지,/ 우리들 부모 허리 굽혀 지켰던 논밭의 씨앗까지.// 오월은 가슴을 풀어 너나없이 껴안는 달.// 저 무등산의 푸짐한 허리까지/ 저 금남로까지/ 저 망월동의 오월의/ 무덤 속 고요함까지.// 오월은 일으켜 세우는 달/ 오월은 노래하는 달/ 오월은 껴안는 달/ 광주에서 세상 끝까지/ 땅에서 하늘 끝까지.//

소나기의 혼(魂) / 조태일
이렇게들 살다가 저렇게들 살다가/ 사람은 그렇게들 살다가/ 자손들일랑 땅에 남겨두고/ 보이지 않는 혼(魂)이 되고/ 혼은 거듭 살아서/ 하늘로 솟아올랐다가/ 마른 하늘로 목이 타면/ 구름 속으로 사알짝 끼어 들었다가/ 땅 위의 일들을 그리워하다가/ 언짢아하다가 드디어/ 구름을 충동질하다가// 벼락 한 방이면 작살날 애들이/ 번개 한 방이면 눈멀 애들이/ 꼴도 좋게 육갑지랄들 한다, 어쩌고/ 한바탕 칭얼대다가 까무라치다가/ 구름 속에서 그렇게 살다가 보채다가/ 죽어서 쏜살같이 소나기가 되고/ 소나기는 거듭 살아서/ 땅 위에 길게 꽂힌 깃발이 되고/ 참 오랜만에 듣는 소문이 된다./ 믿어 의심치 못 할 아우성이 된다.//

아침 선박 / 조태일
Ⅰ// 아침 바다는 예지에 번뜩이는 눈을 뜨고/ 끈기의 서쪽을 달리면서// 시대에 지치지 않고, 처절했던 동반의 때에/ 쓰러진 시간들을 하나씩 깨워 일으키고/ 저 넘쳐나는 지평의 햇살을 보면/ 청명한 날에 잠깨는 출항.// 세수를 일찍 끝낸 여인들은/ 탄생을 되풀이한 오랜 진통에/ 땀배인 내의를 벗어 바다에 던지고/ 파이프에 남자들은, 두고 온 시대를 열심히/ 피워 문다.//

2// 철저한 자유를 부르면서/ 흐느끼는 심연, 그 움직이는 고요,/ 가파른 정오의 한 때를./ 이해만이 남고, 오직 진행이 있을 때 당황하던 파도를,/ 식욕을 거느린 별들이 주워 들고 멀리 떠났다./ 험한 해협엔, 그러나/ 의지를 철썩이는 잔잔한 파도의 무료./ 밤세워 해변을 지키던 새의 *녹은 남고./ 순수의 깊이에서 일어서는 서적들의 눈부신 항변.// ―아직 침실에 누워 있는 자들도 한번은 떠날 것이다./ 휴식의 때가 오면 패배의 옷자락을 가다듬을/ 꼭 가다듬을/ 늙지않는 아우성, 동족을 꺼려하는 쓸쓸한 시선들도/ 한 번은 떠날 것이다.//

3// 우리에게 주어진 한개의 원인은,/ 서성이는 곳에 쓰러지지 않는 거만한 거부./ 타협이 없는 거리를 글세,/ 걸어갈 수 있을까?// 신앙은 놓이고 길을 가는 의문의 날에/ 찾아 온 제삼의 치맛자락에 매달린 식탁./ 어지러워라 어지러워라/ 천둥이 울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확고의 식탁은 없을까?// 쟁취의 이빨을 내놓기 전/ 낮에도 눈이 감긴 암초의 눈을 뜨게 할 순 없을까?// 겨울을 빠져나온 꽃들이 찾아가/ 피어날 꽃나무는 없을까.// 계절이 없어 과일들은 익질 못한다.//

4// 획득의 눈이 내리고 있다./ 학동들의 꿈길에서 얻어진,/ 멀고 먼 나라의 가까운 은혜가 흩날리고 있다./ 아침 인사를 받으면서 물러 않은 산./ 아침 인사를 받으면서, 오후가 되더라도 피로하지 않을/ 하이얗게 움직이는 선박이 있다.// 우리 젊은, 우울한 선장에겐 무엇을 바칠까?/ 우리의 모국어를,/ 우리의 손으로 만들어진 나침반을,/ 우리의 눈에 맞는 색깔의, 저 지평을 향해 펄럭일/ 기를 바쳐야 한다.//

눈깔사탕 1 / 조태일
어찌하여 어찌하여 살아오는/ 내 인습(因習)의 지저분한 족보(族譜)에서/ 굴러다니는 몇 개의 눈깔사탕,/ 미쓰야, 미쓰야, 심심하겠다/ 어서 어서 줏어 먹어라./ 줏어 먹고 건국을 해야지 건국을.// 당신들과 나의 세월도 아닌/ 타인들의 세월 속을 굴러다니느라/ 다 녹아났네, 다 녹아났네./ 고구려(高句麗) 병정들의 천년 후를 내다보던/ 백제(百濟) 처녀들의 천년 후를 내다보던/ 눈망울이었을까 나도 몰라.// 가난 속을 한 속을 굴러 다니다가/ 아아 가난해진 눈빛이여 빛이여,/ 빗발 속에 어른대는 지도,/ 지도 속에 번지는 산하여, 언어여./ 미쓰야, 미쓰야, 억울하겠다/ 어서 어서 나의 산하 나의 언어의 빛깔을 줏어 먹어라./ 어느 뜨거운 모성(母性)을 엮어 울을 치고/ 어느 때도 보지 못했던 공화국을 잉태해야지.// 어찌하여 어찌하여 또 살아 갈/ 내 인습의 어지러운 족보에서/ 굴러 다니는 몇 개의 눈깔사탕.//

눈깔사탕 2 / 조태일
나의 가슴 안 가장 쓸쓸한 곳으로/ 비 내리듯 비 내리듯 내리는 불만의 처녀들./ 그들은 어느 때나 식욕을 느끼고/ 무엇에 있어서나 그들은 맹목적이다./ 생활에 관해선 신경질적이고/ 공화국의 일에 관해선 무관심하고/ 그러나 나의 파리한 육체에 관해선/ 잔인한 짐승의 습성으로 항상 내란을 일으킨다.// 그래, 조용히 말할 수 있는 장소가 있다면/ 그래, 조용히 흐느낄 수 있다면/ 상품 주듯 상품 주듯/ 눈깔사탕을 주고 싶다./ 눈깔사탕을 받아 먹어라./ 적당히 뜨거운 타액으로 녹아 내리리라./ 거기 난해한 공화국은 분해되어 흐를 것이고/ 나의 육체는 늠름하게 흐를 것이다./ 생활은 그냥 찌꺼기로 남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의 가슴 안 가장 쓸쓸한 곳은/ 어쩔 수 없는 너희들 함성으로 충만할 것이다.//

눈깔사탕 3 / 조태일
무엇에나 할 것 없이 신경질적인 나의 순처녀는/ 눈깔사탕을 받아들자 히히히 호호호 웃더니만/ 별안간 건국하는 방법을 감득했는가/ 꺼이꺼이 울음 울었다.// 남자들이 눈깔사탕을 한 개씩 가지고/ 멀고도 가까운 시간의 기슭을 더듬으며 떠나니/ 여자들도 쫄랑쫄랑 따라나섰다./ 어느 무덥고 긴 여름날,/ 남자와 여자들은 꿈의 벌판에서 언어를 잃고 누워 있었다./ 그러다가 그러다가 눈깔사탕이 녹아 내릴 때/ 하, 옆에서 녹아 내리던 어린 시간들/ 그들도 녹아 내렸다.// 바람도 붉게 물드는 내 혈맥의 어귀에서/ 남자들은 눈깔사탕 빛깔의 속옷을 벗었다./ 여자들은 눈깔사탕 빛깔의, 남자의 음성 빛깔의/ 붉은 스커트를 벗었다.// 그 다음날 다음날부터는/ 나는 한 개의 슬픈 악기가 되었다./ 시의 이랑을 불어가는 바람 소리랄까,/ 민중의 가슴패기에서 펄럭이는 지폐의 그런 소리가 잘도 나는.// 그리하여 그 다음날 다음날부터는/ 식욕이 없어도 살아가는/ 음악이 없어도 살아가는/ 그런 저런 남자가 되어버렸네./ 저렇게 꺼이꺼이 우는/ 순처녀만으로 살아가겠네.//

난로회(煖爐會) 1 / 조태일
1// 떨리는 세계를 말하면서/ 황폐한 식탁의 무게 밑에 깔리운 지성./ 성욕에 찬 새들은 노래를 부르고/ 재빠른, 누구나 할 것 없이 따라간 연대를/ 잔에 따르면서/ 성난 여인을 마시고 천(千)의 육체를 마시고/ 누워 버린 사람들./ 피부에 솟아난 식욕과/ 오랜날을 찾아 헤매던 안타까운 사랑을 훔쳐간/ 모호한 이웃의 손들이여/ 친친 감겨 오는 시간, 움직일 수 없는 육체의 고요에서/ 그지없이 뜨거운 장소에서 벗어나라./ 벗어나라, 황홀한 쟁투(爭鬪)여.//

2// 남루한 의식의 비탈을 내려가 본다/ 앉아 있는 여인./ 겨울새는 옆에서 무수히 날으고/ 떠나간 남자들의 타다 남은 유혹./ 난로가 흔들리면 부끄러웠던 과오들./ 일렁이는 화기(火器)에서 죽어간 젊은 시간들./ 여인의 빈틈없는 피부에 걸려 있는/ 잔인한 별가(別歌)여, 흐느끼는 외로운 즈로즈여.//

3// 이 아침의 늦어 버린 기상(起床)./ 눈을 뜨면 황금의 환상(幻想)들/ 여인은 머리를 빗으면서 엉킨 시간들을 빗으면서/ 서서히 일어서고 있었지.// 어느 때이고 출렁여 오는 망각의/ 아래 아래, 퍼져 버리는 노래./ 밤새 매달린 창변(窓邊)의 음성들./ 저쪽에서 비척거리는 아침이 오고/ 태양 아래 비껴가는 시간들.// 떠나가게 하라/ 저 광휘(光輝)의 빗발치는 곳에/ 나는 나를 눕히게 하라.//

난로회(煖爐會) 2 / 조태일
우리들의 방은 음악이었다./ 기어드는 햇살을 막고/ 낮은 음정(音程)으로 펄럭이는 커튼./ 음악의 골짜기마다 아로새겨진/ 발가벗은 도덕과/ 괴로와하는 육체의 혁명은/ 다시 일어나고 있었다./ -두려운걸요./ -당신의 노란 스카프가 좋군./ 세계는 어느덧 우리들의 팔다리에서 타오르고/ 몇 권의 서적들은, 저기 저렇게 박수를 치면서/ 맹목(盲目)의 진리를 잡아먹고 있었다./ 잡아먹고 있었다./ 한 잔의 커피와 진한 입술의 겨울날/ 사실, 젊은 연인들은 휘파람을 불면서/ 난로곁을 비껴가고 있었다.// 우리들의 방은 나체였다./ 창가에서 시간은 부끄러운 듯/ 멈춰 있고/ 나는 여러 번 동안이나 미쳐 있고/ 눈이 내리는 방의 어느 곳에서나/ 혁명은 일어나고 있었다./ 자고 일어나면 막연히 나부끼는 인민들의 어디에서나/ 쌈 싸우는 주택들의 어디에서나/ 미워하는 것들이 있었다./ 어린 문장들이 나의 육체를 감쌀 때/ 드디어 나는, 사랑을 배웠었다.// 육체의 모호한 부분을 기어다니는 음악은/ 흐트러진 머리카락에 위태로이 걸려 있고/ 신(神)은 귓전을 기어다니다가/ 당신의 피부색만큼 짙어지고/ 한모금 담배연기 속에서 나는/ 당신의 지혜 속에 묻혀 있었다.// 우리들의 이마와, 입술의 어디쯤일까/ 시간은 발가벗었고./ ―눈이 내린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미칠 수 있어요, 저 눈보라처럼./ -암, 미쳐야지. 미쳐야지./ 내의마다, 불안한 신(神)들은 눈을 뜨고/ 어머니들은 추운 겨울날/ 나와 당신의 영혼을 어루만지는/ 아아 시(詩)가 하이얗게 흩날리는/ 겨울거리,/ 나는 사랑의 독재자였다.//

식칼론(論) 1 / 조태일
창 틈으로 당당히 걸어오는/ 햇빛으로 달구었어!/ 가장 타당한 말씀으로 벼리고요.// 신라의 허황한 힘보다야 날카롭고/ 정읍사의 몇 구절보다는 덜 애절한/ 너그럽기는 무등산 허리에 버금가고/ 위력은/ 세계지리부도쯤은 한칼이지요.// 흐르는 피 앞에서는 묵묵하고/ 숨겨진 영양 앞에서는 날쌔지요./ 비장하는 데 신경을 안 세워도 돼,/ 늘 본관의 심장 가까이 있고/ 늘 제군의 심장 가까이 있되/ 밝게만 밝게만 번뜩이면 돼요/ 그의 적은/ 육법전서에 대부분 누워 있고……/ 아니요 아니요/ 유형무형의 전부요.//

식칼론(論) 2 / 조태일
뼉다귀와 살도 없이 혼도 없이/ 너희가 뱉는 천 마디의 말들을/ 단 한 방울의 눈물로 쓰러뜨리고/ 앞질러 당당히 걷는 내 얼굴은/ 굳센 짝사랑으로 얼룩져 있고/ 미움으로도 얼룩져 있고// 버려진 골목 어귀/ 허술하게 놓인 휴지의 귀퉁이에서나/ 맥없이 우는 세월이나 딛고서/ 파리똥이나 쑤시고 자르는// 너희의 녹슨 여러 칼을/ 꺾어 버리며 내 단 한칼은/ 후회함이 없을 앞선 심장 안에서/ 말을 갈고 자르고/ 그것의 땀도 갈고 자르며/ 늘 뜬 눈으로 있다/ 그 날카로움으로 있다.//

식칼론(論) 3 / 조태일
내 가슴 속의 뜬 눈의 그 날카로움의 칼빛은/ 어진 피로 날을 갈고 갈더니만/ 드디어 내 가슴살을 뚫고 나와서// 한반도의 내 땅을 두루 두루 날아서는/ 대창 앞에서 먼저 가신 아버님의 무덤속 빛도 만나 뵙고/ 반장집 바로 옆 집에서 홀로 계신 남도의 어머님 빛과도 만나 뵙고/ 흩어진 엄청난 빛을 다 만나 뵙고 모시고 와서/ 심지어 내 남근(男根) 속의 미지의 아들 딸의 빛도 만나 뵙고/ 더욱 뚜렷해진 무적(無敵)의 빛인데도, 지혜의 빛인데도/ 눈이 멀어서, 동물원의 누룩돼지는 눈이 멀어서/ 흉물스럽게 엉뎅이에 뿔돋친 황소는 눈이 멀어서/ 동물원의 짐승은 다 눈이 멀어서 이 칼빛을 못 보냐.// 생각 같아서는 먼 눈 썩은 가슴을 도려파 버리겠다마는,/ 당장에 우리나라 국어대사전 속의 `개헌(改憲)'이란/ 글자까지도 도려파 버리겠다마는// 눈 뜨고 가슴 열리게/ 먼 눈 썩은 가슴들 앞에서/ 번뜩임으로 있겠다! 그 고요함으로 있겠다!/ 이 칼빛은 워낙 총명해서 관용스러워서.//

식칼론(論) 4 / 조태일
내 가슴 속의 어린 어둠 앞에서도/ 한번 꼿꼿이 서더니 퍼런 빛을 사방에 쏟으면서/ 그 어린 어둠을 한칼에 비집고 나와서/ 정정당당하게 어디고 누구나 보이게 운다./ 자유가 끝나는 저 쪽에도 능히 보이게/ 목소리가 못 닿는 저쪽에도 능히 들리게/ 한 번 번뜩이고 한 번 울고/ 번개다! 빨리 여러 번 번뜩이고/ 천둥이다! 크게 한 번 울고/ 낮과 밤을 동시에 동등하게 울리고/ 과거와 현재와 까마득한 미래까지를/ 단 한 번에 울리고 칼끝이 뛴다./ 만나지 않는 내 가슴과 너희들의/ 벼랑을 건너 뛰는 이 무적의 칼빛은/ 나와 너희들의 가슴과 정신을/ 단 한번에 꿰뚫어 한 줄로 꿰서 쓰러뜨렸다가/ 다시 일으키고 쓰러뜨리고 다시 일으키고/ 메마른 땅 위에 누운 나와 너희들의 국가(國家) 위에서/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끌어다 놓고/ 더욱 퍼런 빛을 사방에 쏟으면서/ 천둥보다 번개보다 더 신나게 운다/ 독재보다도 더 매웁게 운다.//

식칼론(論) 5 / 조태일
왜 나는 너희를 아슬아슬한 재치로나마 쉽게 못 사랑하고/ 너희가 꺼리며 침까지도 빨리 뱉는/ 내 몸뚱아리까지도 아슬아슬한 재치로나마 쉽게 못 사랑하고/ 도둑의 그림자가 도둑의 그림자가 사알짝 덮치듯,/ 그렇게나마 못 만나고,/ 너희들이 피하는 내 땅과/ 내가 피하는 너희들의 땅은/ 한번도 당당히 못 만나는가/ 땅속 깊이 침묵으로 살아서/ 뼉다귀가 뼉다귀를 부르는/ 저 목마른 음성처럼,/ 땅 속 깊이 아우성으로 흐르는/ 저 눈물같은 물줄기가/ 물줄기를 만나는 끈기처럼/ 만나지 못하고 왜 사랑하지 못하는가./ 내 홀로 여기 서서/ 뜨드득 뜨드득 이빨 갈 듯이/ 내 정신만을 가는가/ 내 외로운 살결은 살결끼리 붙어서/ 시간을 가는가, 아아 칼을 가는가.//

어머니를 찾아서 / 조태일
이승의/ 진달래꽃/ 한묶음 꺾어서/ 저승 앞에 놓았다// 어머님/ 편안하시죠?/ 오냐, 오냐,/ 편안타, 편안타.//

어머님 곁에서 / 조태일
온갖 것이 남편을 닮은/ 둘쨋놈이 보고파서/ 호남선 삼등 열차로/ 육십 고개 오르듯 숨가쁘게 오셨다.// 아들놈의 출판기념회 때는/ 푸짐한 며느리와 나란히 앉아/아직 안 가라앉은 숨소리 끝에다가/ 방울방울 맺히는 눈물을/ 내게만 사알짝 사알짝 보이시더니// 타고난 시골 솜씨 한철 만나셨나/ 산 1번지에 오셔서/ 이불 빨고 양말 빨고 콧수건 빨고/ 김치, 동치미, 고추장, 청국장 담그신다./ 양념보다 맛있는 사투리로 담그신다.// - 엄니, 엄니, 내려가실 때는요/ 비행기 태워 드릴게./ 이북으로 끌고 가면 어쩌게야?// 옆에서 며느리는 웃어쌓지만/ 나는 허전하여 눈물만 나오네.//

어머니의 처녀 적 / 조태일
어머니는 처녀 적부터/ 일본 사람이 경영하는/ 생사 공장의 여공이었다// 누에가 걸쳤던 새하얀 비단실 뽑아 올리면/ 펄펄 끓는 물 위에/ 기름 번지르르한 노오란 번데기가/ 다투어 둥둥 떠올랐다// 해는 왜 그리 길고/ 배는 왜 그리 고픈가/ 현장 감독의 눈을 피해 졸고/ 졸면서 번데기로 배를 채웠다// 힘없어 애 못 낳는 여자/ 한 말만 먹으면 애를 낳고 만다는/ 그 번데기 때문인지// 열일곱에 서른다섯 노총각 스님에게/ 업혀 와서 칠 남매 낳으신 뒤에도/ 어머님은 생사 공장의 여공이었다/ 6ㆍ25가 끝난 한참 후에까지//

이웃의 잠을 위하여 / 조태일
내 이웃의 잠을 위하여/ 내 가족의 편한 꿈을 위하여/ 하늘까지 솟아 버릴까./ 목청에 겨워서 솟아 버릴까./ 사십평생을 피맺힌 목소리로 지워 버릴까.// 하루 종일 나를 지배했던/ 더러운 더러운 몸뚱아리를 이끌고/ 옥상에 올라서/ 달과 별들을 쳐다본다.// 어둠 속에서만 빛나고/ 술 취한 자의 머리 위에서/ 더욱 빤짝거리는 빛덩어리들을 바라보며/ 두 다리를 동동거린다./ 온몸을 떨어 본다./ 목쉰 소리로 불러 본다./ 내 어렸을 적의 전쟁놀음,/ 장난감 총을 들고 병졸들을 이끌어// 냇가를 건너 들판을 가로질러/ 가상의 적지인 부락을 점령하고/ 지붕에 올라 점령당한 부락을 보았지./ 하늘을 보고/ 병졸들의 함성을 들었지./ 그리고 신나 하는 얼굴들을 보았지.// 나는 옥상에 올라/ 사십평생의 말 다 뱉아 버리고/ 하늘로 솟아/ 오천만 개의 손을 잡으리라./ 오천만 개의 가슴과 만나리라./ 기막혀 하는 이웃의 잠을 위하여/ 슬퍼하는 가족의 꿈을 위하여.//

죽음 / 조태일
시 쓰는 사람이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감상일 수도 있다./ 시 쓰는 사람이 삶을 생각하는 것은/ 언어도단일 수도 있다.// 시인도 한 번 살고 한 번 죽는다./ 죽음을 두려워하면/ 산다고 하지만 살아서/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죽는다.// 딱 한 번 죽음이라야/ 그것이 삶이다.// 죽음을 피하던 장사 어디 있던가./ 책임 있는 죽음이든/ 책임 없는 죽음이든/ 죽는 죽음을 누가 말려서/ 살아나는 죽음을 우리는 보았던가.// 나 한 사람의 죽음은/ 수천 사람의 소생일 수도 있거늘/ 나 한 사람의 삶은 너무 넓게 차지해서/ 수천 사람이 비좁아할 수 있거늘.// 지금은 감상이든 언어도단이든/ 죽음을 한번쯤 생각해 볼 때,/ 겨울이 더 깊이 오기 전에.//

칠행시초(七行詩抄) / 조태일
1// 산 너머 무덤이, 흩어진 연대를 받치며/ 일제히 일어 서고 있을 때 선택되는 과오들./ 내실에선 헤일 수 없는 생명이 또한 보류되고/ 산자락 덮고 이 밤을 새울 풀잎들이 다스리는 고요/ 헐렁이는 육체들 사이, 빠져 가는 시간들/ 좀더 가까이서 무엇을 노래할 것인가,/ 우리는 항상 무덤 위에 떠 있다.//

2// 하혈(下血)이 심해 울어 울어 지내 오신다는 어머니의/ 날 정해 두고 서방님 맘 아니 들어 울어 울어 지낸다는 가시내의,/ 내 완강한 손을 흔들어 방을 흔들어 버린 소식./ 이 영어(囹圄)의 가장 아픈 때를 보아/ 기어드는 햇살 속에 누워 있는 시신(屍身)./ 옆에서, 그 피, 그 맘 훌훌 마시고/ 몽롱한 눈을 뜨니 아 하문(下門)에 다다른 내 의식.//

3// 서울의 보도 위엔 연애선수들의 흥겨운 보행/ 은행창구엔 가난한 눈들이 부서지고 있다./ 얼마나 흐느꼈을까, 이 나의 모의(謀議)는./ 멀리서 돌아 가고 가까이서 죽어 가는 이 한때를 기다려/ 떠나게 하라, 수습할 수 없는 이 나의 육체를./ 가난이 조용히 숨죽여 오던 방 안에서/ 떠나게 하라. 항상 불륜의 내 시도를.//

탁과 억 사이에서 / 조태일
탁 자는 우리 민족의 언어입니다./ 억 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탁 자와 억 자가 신문에 나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한 해 동안 끊기로 했던 술을/ 됫술, 말술로 나는 마시기 시작했죠.// 술을 마신 뒤에도 잠이 오지 않습니다./ 이 탁 자와 억 소리가 내 방을/ 기어다니기도, 천장에 매달리기도 해/ 여간 무서운 것이 아니지요.// 밥 먹을 때도 탁과 억 소리가 씹힙니다./ 길을 가도 탁과 억 소리가 차입니다./ 시를 써도 탁과 억 자만 씌어집니다./ 책을 봐도 온통 탁과 억 자뿐이죠.// 아무래도 중병입니다./ 배울 만큼 배웠어도 다른 어휘는 모르고/ 탁 자와 억 자만 내 머리 속에 가득하죠./ 정신병동에서/ 정신병을 앓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탁?/ 억?/ 탁억탁억탁억탁억, 억탁억탁억탁억탁/ 야산의 수풀 같기도 하고/ 탁억탁억탁억탁억, 억탁억탁억탁억탁/ 양영자와 현정화가 탁구 치는 소리 같기도,/ 김완과 유남규의 탁구 치는 소리 같기도 하고// 민주 정치와 독재 정치가 뒤얽혀/ 싸우는 꼴 같기도 합니다./ 거듭 태어나라, 태어나라/ 신께서 우시면서 간곡히 말씀하시는/ 간단하면서 단호한 어조 같기도 하죠.// 탁!/ 억?/ 탁! 억? 탁! 억? 탁! 억? 탁! 억?//

연습(演習) 1 / 조태일
나는 내 방을 슬프게 장악하는 병정(兵丁)./ 내 시간이 흔들리면, 처량하게 흔들리면/ 계절의 밑둥이에 앉아 있는 우울./ 내 솥끝에서 열려오는 순진의 방, 걸려 있는 내 집념./ 멋대로 움직이는 육체 아래/ 우거진 감정을, 불신의 아침을/ 나는 언제쯤 지성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나는 울어 버릴까./ 시 속에서 살해해 버릴까./ 차라리 슬픈 지역이라서/ 차라리 아름다운 패지(敗地)라서/ 끝없이 용해(溶解)되는 나, 떠나는 목소리들./ 사자(死者)들의 아랫도리를 지나서/ 내 피가 외롬에 떨고 있는/ 밤의 아랫도리를 지나서./ 자유가 무성케 자란 무능을/ 나의 친한 학동들이 성의껏 유괴한/ 태양을 굴리며 떠나가는 목소리들.// 타인의 시간이 흔들리면, 처량케 흔들리면,/ 나의 울분은 세계를 장악하는 병정.//

우울한 방(房) / 조태일
1// 지치지 않고 타협도 멀리, 피를 쏟으며/ 가는 시간 위에 우리를 눕혀/ 방을 살아라 한다.// 신(神)에게 유괴된 방/ 동편의 창이 하나씩 닫혀지고 있을 때/ 탈영한 몇 알 햇살은/ 창 밖에 서성인다.// 쌓아 온 범죄들 사이 우울한 지혜./ 두고 간 발언들은 구석에서 일제히/ 일어서며 충돌, 결국/ 우리들 위에 쓰러진다 쓰러진다.// 어둠은 대낮을 재우고 그늘이 늘어진/ 설합 속에 보유됐던 아우성, 그리고 눈부신 사고./ 내 곁에서 나란히 잠을 찾을까?/ 시민은 각자 잠을 찾을까?//

2// 우리가 여기 온 까닭은…… 가만히 눈감아 보니/ 신탁(信託)을 베고, 흔들리는 곡선의 지친 쾌감,/ 그래서 결실,/ 옆에서 시간들은 부끄럽게 성숙했다.// 그리하여 그 부끄러운 침실의 시간들은/ 어디로 우리를 인도할 것인가./ 타협도 멀리 가고만 있다.// 우주의 한쪽, 자꾸만 잃어가며 잃어가며/ 거대한 평화를 승리(勝利)를 시민들은/ 붙잡질 못한다.// 거리 위를 산책하는 평화의 기폭들./ 한량(限量) 없이 뱉아 놓은 주택들 사이/ 감정들에게 침몰당하고/ 수인(囚人)의 일순(一瞬)이 난해한 무릎 밑에서// 피로한 용단을 내리고/ 쓸쓸히 외유의 길을 떠났다.//

3// 방에 남은 것이란/ 술잔을 들면 술잔 사이에서/ 처절히 깨지는 오늘 안에/ 부족한 사랑과 자유 몇 개와/ 성난 여인이 있다./ 밖에서 서성이는 햇살, 아직 가능은 외면하지 않았다./ 쓰러진 아우성을 세우고 창을 향하여 돌진하는 때/ 골목에서 얻은 여인은 골목에 버려야지/ 천정이 뚫리면 내리는 은혜는 소중히,/ 그러나 모든 걸 잊어야지.// 외유의 길을 떠난 것들 잠시/ 휴식처를 찾았을까./ 끝내 행방을 모르고 밝아 오는 아침까지/ 나는 잠을 찾을까./ 시민은 각자 밤을 찾을까.// 지치지 않고 타협도 멀리, 피를 쏟으며/ 가는 시간 위에서/ 방을 살아라 한다.//

숲과 환(幻) / 조태일
내 의견의 이랑에서/ 치마를 걷어 올린 용진(勇進)의 숲./ 새들은 날개에 가난한 연가를 달고/ 부끄럽게 따라 다니는 바람난 음성들./ 재빠른 팔다리에 맹수들은/ 일월(日月)을 매달고 영겁을 출렁이고/ 뒤따르는 창(槍)끝, 비끼면서 울렁이는 숲./ 사이에 망각의 나라로/ 거칠게 흐르는 산(山)물/ 번쩍이는 어족들.// 숲에 기대어 열심히 펄럭이는 하체의/ 아름다운 실감의, 아 능동의 장소에서/ 의지 안에 솟아난 과오의 끝을 지나서/ 세계인의 늠름한 이마를 건드리는/ 우울한 내의(內衣)의 내란(內亂)들.// 비로소 상처의 눈을 뜨는 처녀들은 아는가,/ 뱀의 황홀한 알몸의 신앙과, 잔인한 끈기를./ 생성의 살해의, 격렬한 힘이 분배되고/ 다수의 인격이 유괴되는/ 만인(蠻人)들의 머리 위에 걸려 있는 도덕을.// 대중의 끊임없는 응시를 빠져 나온/ 책갈피의 치열한 사건을 시간을/ 서울의 타인들이여, 뽑아들고/ 신의가 빠져나간 치맛자락을 흔들어 버려라./ 그리하여, 나의 숲을 시(詩)를/ 항상 나의 독단(獨斷)인 주택 위에서/ 사랑하라. 사랑하라./ 서울의 이웃들이여,/ 여기는 불붙는 나의 숲,/ 나의 모퉁이에서 서성여라.// 내 의견의 이랑에서 타오르는 천국/ 기어오는 음악이 돌진하면,/ 감화받는 언어와/ 숲에 기대인 하체의 쓸쓸한 항변.//

시인(詩人)의 방랑 / 조태일
내 발바닥에 불이 붙었다./ 발바람이 있어 잘 탄다.// 내가 찾는 땅을 어서 찾아가서/ 무릎 꿇고 긴긴 입맞춤을 하리.// `구름에 달 가듯이' 갈 수 없어서/ 혼비백산하듯, 번개불에 콩볶듯/ 우당탕 뛰며 달린다.// 내 발바닥에 불이 붙었다./ 신난다. 신난다.// 제군,/ 폭탄 떨어지고 빗발치는 탄환 속에서/ `구름에 달 가 듯이' 가 보아라./ 어정어정할 때가 따로 있지.// 뛰다 뛰다 지치면/ 휴식이란 것이 있지.// 폭탄 떨어진 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가쁜 숨 몰아쉬며/ 두고 온 가족이며/ 내팽개친 책들을 생각하다가// 포성이 울리면 울리는 쪽으로/ 또 뛰고 또 뛴다.// 벌떼처럼 몰린 친구들을 만나/ 가쁜 입술로 긴긴 입맞춤을 하리.// 내 발바닥에 불이 붙었다./ 물을 피해 잘도 뛴다./ 잘 탄다, 신난다.//

내가 아는 시인 한 사람 / 조태일
세상엔 벽에 걸 만한/ 상상의 그림이나 사진들도 흔하겠지만/ 내가 아는 시인의 방 벽에는/ 춘하추동, 흑백으로 그린/ 녹두장군 초상화만 덜렁 걸려 있다// 세계의 난다긴다하는/ 예술가며 정치가며 사상가며/ 지 할아버지며 할머니며/ 지 아버지며 어머니,/ 병아리 같은/ 지 귀여운 새끼들 얼굴도 흔하겠지만// 내가 아는 시인의 방 벽에는/ 우리나라 있어온 지 제일로 정 많은 사내/ 녹두장군의 당당한 얼굴만/ 더위도 추위도 잊은 채 덜렁 걸려 있다// 손가락 펴 헤아려보니 지금부터 80년 전/ 농부로서 농부뿐만 아니라/ 나라와 백성에게 가장 충실해서/ 일어났다가 역적으로 몰려/ 전라도 피노리에서 붙들린 몸/ 우리나라 관헌과 왜군들의 합작으로/ 이젠 서울로 끌려가는/ 들것 위의 녹두장군// 하늘을 향해 부끄럼없이 틀어올린 상투며/ 오른쪽 이마엔 별명보다 큰 혹/ 무명저고리에 단정히 맨 옷고름/ 폭포처럼 몇 가닥 곧게 뻗은 수염/ 천리 길을 몸 묶인 채 흔들리며/ 매섭고 그러나 이젠 자유스런 눈빛으로/ 산천초목을 끌어안은 녹두장군// 처음에는 아이들도 무섭다고 무섭다고/ 에미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지만/ 이젠 스스럼없이 친해져서/ 저 사람 우리 할아부지다/ 저 사람 우리 할아부지다/ 동네 꼬마들을 불러들여 자랑을 일삼는단다// 까짓것 희미한 자기 혈육 따져 무엇한다더냐/ 그 녹두장군을 자기네 집 조상으로 삼는단다/ 내가 잘 아는 시인 한 사람은//

무등산 / 조태일
우람히 누워 있는 저 무등을/ 어린 풀들이 잔뿌리 발버둥치며/ 하늘로 하늘로 끌어올리려 숨가쁘다.// 우람한 저 무등을/ 새들이 가녀린 날개에 품고/ 하늘로 하늘로 옮기려 가슴 탄다.//

산(山)에서 / 조태일
나는 늘 홀로였다./ 싸움은 많았지만 승리는 늘 남의 것이고/ 남는 패배는 늘 내 것이었다.// 배낭을 벗어 바위 곁에 놓고/ 신발을 벗는다, 양말을 벗는다./ 좔좔 흐르는 물에 죄 많은 손발을 씻어내자/ 시리도록 시리도록 씻어내자.// 고량주(高粱酒)를 한 모금 빤다./ 솔직하고 빠르게 폐부(肺腑)를 들쑤신다.// 드디어 시야가 막히고/ 내 몸엔 검붉은 불이 붙는다./ 검붉은 불이 활활 타오르고/ "아서라 태일아, 해가 진다, 해가 진다, 어서 일어나거라"/ 아버님 목소리가 활활 타오르고,/ 눈물이 핑그르르 발등을 친다./ 눈물이 핑그르르 발등을 친다.// 앞산 뒷산 옆산이 다투어 다가서고/ 낙엽들은 내 옆에서 흩날리다 지고/ 산(山)들이 조이니깐 하늘은/ 위로만 위로만 삐져나와 치솟는다.// 고랑주 한 모금에 담배 한 모금,/ 한 모금 빨아 머리 위로 날리고,/ 한 모금 빨아 앞뒷옆산에 날리고/ 한 모금 빨아 물 위로 날리고……//

연날리기 / 조태일
잠결인 듯/ 매운 칼바람에 취해/ 대낮인데도 답답해서 어지러울 땐/ 겨울 언덕에 선다.// 아니 남산 꼭대기면 어떻고/ 인수봉이면 어떠라./ 국회의사당 옆 한강 고수부지면 어떻고/ 설악산 백담사면 어떻고/ 밤낮 없이 달이 뜨는 망월동이면 어떠라.// 칼끝 같은 바람에/ 오장육부가 다 드러난다 해도/ 다스운 눈동자 서로 포개며/ 연을 날리자./ 욕심도 티끌도 미움도 죄다 실어/ 악악 악을 쓰며 연줄을 끊어 버리자.// 그 끊어진 연줄을 타고 오는/ 말로만 무성한 임을 만날 수 있다면/ 잠결이면 어떻고/ 대낮이면 어떠랴,/ 처음으로 만나는 임만 있다면.//

동구나무 / 조태일
산자락 아래/ 순하게 순하게 엎드린 마을의 등허리를/ 언제까지나 토닥거리며 서 있는 동구나무/ 우리 어머니들이 서 계신 뒷모습을/ 오래 오래도록 보아서/ 어머니들을 꼬옥 닮은 동구나무.//

밤꽃들 때문에 / 조태일
야위어 야위어만 가는 섬진강가의/ 숫눈보다도 더 시리게/ 흥분한 흰꽃들은/ 모조리 모조리 벗은 알몸이다.// 엎치락 뒤치락 뒤엉켜/ 콸콸콸 쏟아내는 정액들 향기에/ 취한 벌나비떼들도/ 어질어질,// 은어 새끼 같은 오만가지 새끼들/ 다투어 알밤보다 더 먼저 태어나겠다.// 연년생으로/ 계절생으로/ 일일생으로/ 시시생으로/ 분분생으로/ 초초생으로//

물을 노래함 / 조태일
더우면 소나기가 되고/ 추우면 눈이 되고 고드름이 된다// 화나면 폭포가 되고/ 심심하면 보슬비가 되고/ 한가하면 가랑비가 된다// 여린 풀잎 끝에 매달리면 이슬보석이 되고/ 슬픈 눈동자에 머물면 눈물이 된다// 머문 곳이 답답하면/ 천만리 길 휘돌아 바다가 된다// 처음도 끝도 없는 사랑/ 물, 물, 물, 물물물물물물물……//

석탄 / 조태일
참나무 숨결이 파도치는 두 어깨며/ 지나치게 이글대는 두 눈망울,/ 온몸을 철조망 같은 심줄로 무장하고/ 도계탄광서 온 그 사내와 만나던 날/ 눈에 핀 다래끼여 터져 버려라/ 터져 버려라 다래끼여, 폭음을 했다.// 이 조가(趙哥)야, 그 거창한 체구엔/ 노동을 하는 게 썩 어울리겠는데/ 시(詩)를 쓴다니 허허허 우습다, 조가(趙哥)야.//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는 있는 갑다고/ 회색 바바리코트 사줄 테니 시인(詩人)폼 내라고/ 왜 그리 못생겨 울퉁불퉁하냐고/ 악쓰고 힘쓰고 힘뱉고 악뱉고 있을 때// 한민족(韓民族)의 거구(巨軀)요 표준을 넘는 미남(美男)은/ 검다 검다 지쳐 흰빛도 튀기는/ 새카만 석탄을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새카만 석탄이 되고 있었다.// 맨 밑바닥에서 서러우나 즐거우나/ 언제 어디를 안 가리고 솟구치고/ 꿈틀거리는 석탄이 되어서/ 한민족(韓民族)의 거구요, 미남인 나는/ 꺼멓게 꺼멓게 울고 있었다.//

목소리 / 조태일
잃어 버린 목소리를/ 어디 가면 만날 수 있을까,/ 잃어 버린 목소리를/ 어디 가면 되찾을 수 있을까,// 바람들도 만나면 문풍지를 울리고/ 갈대들도 만나면 몸을 비벼 서걱거리고/ 돌멩이들도 부딪치면 소리를 지르는데/ 참말로 이상한 일이다./ 우리들은 늘 만나도 소리를 못 내니/ 참말로 이상한 일이다.// 산천(山川)은 변함이 없고/ 숨결 또한 끊어지지 않았는데/ 참말로 이상한 일이다./ 입들은 벌리긴 벌리는데/ 그 폼만 보이고/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목소리는 아예 목청에 가둬 뒀느냐,/ 산천(山川)에 잦아들었느냐,/ 내 귀가 멀어서/ 고막이 울지 못하느냐,// 내 오관(五官)을 뒤집고 보아도/ 폼만 보이고 껍데기만 보이고/ 목소리를 만날 수가 없구나.//

소리들 분노한다 / 조태일
소리들 분노한다./ 겨울 되니/ 부산했던 깃발 모두 내려지고/ 펄럭이던 그 소리만/ 세상에 가득 떠돌며 분노한다.// 눈보라치는 기세로/ 매서운 폭풍으로/ 헐벗은 나뭇가지를 맴돌다가/ 푸른 하늘이 그리워 치솟았다가/ 보드라운 눈송이로 내려와/ 나뭇가지 위에/ 휴전(休戰)처럼/ 무덤처럼 앉는다.// 앉아서 침묵으로 침묵을 듣는다./ 소리로 소리를 듣는다./ 홀로 떨고 있는/ 나뭇가지를 어루만지며/ 안에서 물 오르는 소리/ 나부끼는 깃발소리 듣는다.// 우리들 내부 가득 끓어오르는/ 사랑의 소리들/ 그 소리를 분노하며 듣는다.//

발바닥 밑에 / 조태일
내가 허물없이 딛는 곳곳에는/ 쇠붙이들이 늘 잠깨어 있다./ 발바닥이 근질거리는 걸로 보아 안다.// 쇠스랑 부러진 것, 낫 부러진 것,/ 엠원소총 녹아난 것, 대포 문드러진 것,/ 비행기 찢어진 것, 식칼 부러진 것,/ 금니빨, 은니빨, 귀고리, 코걸이 등등……// 모두들 한 번씩은 울었던/ 피와 함께 고스란히 깨어 있다./ 쉴새없는 음성이며/ 우리들의 엄청난 오해들은 깨어 있다.// 시퍼런 녹들을 두리두리 두르고/ 이슬도 햇빛도 독약 마시듯 마시고/ 무슨 일인지 고스란히 깨어 있다.// 어린 시절에 내가 부러뜨린/ 누님의 머리핀도,/ 어메의 옷핀도,/ 내가 허물없이 딛는 곳곳에/ 내 발바닥이 그리운지/ 보물처럼 눈뜨고 있다.//

방문기(訪問記) / 조태일
작은 시도(試圖)를 들고 들어 가/ 반가운 방의 유순한 짐승 앞에 경건히 앉았다.// 우리들의 진행은 한갓 침묵/ 사이에 황홀히 미끄러져 내리고/ 황홀히 흩날리는 것이 있다./ 너의 가파른 메니큐어의 비탈에서 어깨 너머에서/ 끝내 야합을 거부하던 늠름한 세대의 호흡들.// 눈길을 돌려라./ 기상하는 것들의 높이만큼, 그들의 가슴 깊이./ 테이블 위엔 진리의 강한 털이/ 방안엔 일체의 원인들이 남아 늙어 가고/ 우리들의 눈 속엔 결론이 흐느낀다.// 단거리 선수들은 그 코스에 뒹구는 햇살들을/ 거칠게 살해하고도/ 스파이크에 묻어나는 팔다리에 엉키는/ 욕망을 세우고, 시간들을 밀치며 달린다./ 성급한 목적은 바로 눈앞에……/ 나의 안식은 보다 더 강한 공격/ 너의 안식은 보다 더 조용한 방어.// 나의 눈길은 정확히 날쌔인 욕망으로/ 저 구석의 다정한 신(神)을 잡았다./ 흩어진 방은 거만한 `즈로즈'/ 남자의 난해한 유혹이 살고/ 유괴된 지성이 눈 뜬다./ 그러나 이해된 세계 안에선 한 마디 목마른 선언!// 우리들은 서로 열전하는 병정./ 장악하고 패(敗)하고 쓰러지면서/ 이 살벌한 일순(一瞬)을 피워 물면/ 타협은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방은 과감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빈 집에 황소가 / 조태일
돼지꿈이나 한번 꾸었으면/ 하던 그 꿈마저 찢기고 빼앗긴 채/ 우두커니 서서, 멀거니 서서,/ 빈집에 뿔 꺾인 황소/ 들어가는 것을 바라본다.// 빈집에 웬놈의 먹을 것이 있겠는가./ 이 병신아 사람이 살아야/ 찌꺼기도 있지 않겠는가, 이 병신아.// 빈 솥뚜껑이나 핥고/ 불꺼진 잿더미나 뒤집다가 나오는/ 뿔 꺾인 황소를 본다.// 주인은 어디 갔는가,/ 누가 훔쳐 갔는가,/ 누가 소리도 없이 죽여 버렸는가./ 이 병신아, 니가 안 죽였나!/ 니가 안 죽였어?// 살다 보니/ 눈 코 입 귀 살갗 등등이/ 다 병신이 되겠네.//

빗속을 거닐며 / 조태일
햇살보다 더 찬란한 빛이다./ 햇살을 헤치며 거닐다가/ 소나기를 만나 빗속을 거닐어도/ 우산을 받치지 말자.// 온몸이 젖는다 해도/ 오늘 하루가 다 젖는 것은 아니다./ 침묵들을 들쑤시는 전령이니까/ 깨우침이니까 소나기는// 온세상을 두루 돌고 온 열사들의 마음인지/ 화살로 몸을 파고드는구나./ 노여움으로 사랑으로/ 종철이의 한열이의 영혼이 내리쏟는구나./ 우리들의 곁을 떠난/ 열정의 시인 채광석의 마음이 내리쏟는구나.// 빗속을 거닐면서 휘청이지 말자/ 지쳐 드러누운 아스팔트를 뚫고/ 시멘트길을 뚫고/ 무엇이 그리 그리운지/ 흙덩이가 용솟음친다./ 싹들도 다투어 솟아난다./ 땅 속 깊이 묻혔던 소문들도/ 빗줄기로 물구나무 선다.// 비에 젖어 화살에 부활하여/ 한 마음으로 파도 치는 우리들이여/ 우산을 받치지 말자.//

내가 뿌리는 씨앗은 / 조태일
모든 맹렬한 싸움은 끝났다./ 이 고요하고 고요한 시간에/ 가릴 것은 가리고, 버릴 것은 버려야지.// 사람아, 사람아, 떠나가라./ 나로부터 떠나가라./ 내가 딛는 땅도 내가 받는 밥상도/ 떠나가라 떠나가라.// 그리하여 혼만 남고 내 육체도/ 내가 걸치는 옷도 땀도 때도/ 손톱도 발톱도 털도 떠나가라.// 산과 하늘이 마주 닿는/ 저 파아란 지평(地平)의 저 넘치는 뜨락에는/ 마음놓고 뿌릴 수 있는 품종(品種)이란/ 내 혼의 씨앗이어라/ 산간벽지 호젓한 개울물로 씻은/ 내 혼의 씨앗이어라.// 사람아 사람아/ 모든 맹렬한 싸움은 끝났지만/ 최후로 이길 수 있는 싸움이 남아 있다.// 아아! 그것은 죽는 일인데/ 죽어서 다시 깨어나는 일인데/ 아아! 그것은 씨앗을 뿌리는 일인데/ 우리들은 아직 혼을 찾지 못했는데// 산과 하늘이 마주 닿는/ 저 파아란 지평(地平)과 뜨락만 넘쳐나네라.//

밥상 앞에서 / 조태일
나는 언제나 무릎 꿇고/ 받았느니라 두 손으로/ 남도평야를.// 잊을 수가 있겠느냐/ 홍릉에서도,/ 길음동에서도, 홍은동에서도./ 안양에서도 신길동에서도/ 언제나 무릎 꿇고/ 받았느니라,/ 오늘 아침도 그렇게 받았느니라./ 습관처럼 무릎 꿇고 받았느니라/ 솟아나는 태양을 받았느니라./ 중천에 뜬 태양을 받았느니라./ 피어오르는 저녁놀을 받았느니라.//

된장 / 조태일
님아,/ 너의 썩은 얼굴에 침/ 아니고 콩을 붙인다// 흰자질이랑 탄수화물을 붙이고/ 물도 굳기름도 붙이고/ 비타민을 붙인다 소금을 붙인다// 한 많은 찌꺼기를/ 정 도타운 부부를 붙인다./ 아아, 현명한 된장을 붙인다.// 님아,/ 너의 썩은 얼굴에 미움/ 아니고 새로운 머리카락을 붙인다// 눈썹이랑 눈을 붙이고/ 코도 입도 붙이고/ 턱을 붙인다 귀를 붙인다// 희고 억센 이빨을/ 거칠은 살결을 붙인다/ 아아, 뜨거운 목소리를 붙인다.// 시여,/ 나의 얼굴을/ 너에게 붙인다.//

모래․별․바람 / 조태일
저 파도 우는 소리 듣고파서/ 저 넓은 가슴팍에 안기고파서/ 수많은 모래들은 밤낮으로/ 바닷가에 귀 세우고 모여 앉아/ 끼리끼리 몸 비비며 반짝일 뿐!/ 헤어져 돌아올 줄 모른다.// 저 대낮의 잠이 그리워서/ 저 가없는 푸름에 안기고파서/ 수많은 별들은 긴긴 밤을/ 달 주위에 모여 뜬 눈으로 반짝일 뿐!/ 돌아앉아 눈감을 줄 모른다.// 저 일렁이는 숲의 숨결을 듣고파서/ 저 깊고 푸른 고요를 일깨우고파서/ 수많은 바람들은/ 잎새에 붙어 조잘거릴 뿐!/ 돌아와 폭풍이 될 줄 모른다.// 아직은 모래고 별이고 바람일 뿐!/ 헤어져 돌아올 줄 모른다/ 돌아앉아 눈감을 줄 모른다./ 돌아와 폭풍이 될 줄 모른다.//

아침 연가(戀歌) / 조태일
나는 슬프지 않네/ 끝없는 방황이 열리는/ 여기는 나의 오히려 다정한 무덤./ 까마귀 울음에 아침이 깨어 비척거리면/ 단좌한 물동이에서 조국이 잠깬다/ 나의 침실도 잠깬다./ 한 모금의 찬물 마시고 외출해야지/ 그래서 물동이에 고여 있는 저것이/ 저녁내 흐느끼던 KOREA의 눈물이라고/ 서녘 하늘을 가던 초동의 배고픈 눈물이라고/ 한 모금의 아침 찬물을 나는 마셨네./ 둘러보아도 폭풍뿐인 불신뿐인/ 땀 흘리는 산만(散漫)의 장소에서/ 나를 흔들고 떠나는 것을 보네./ 음악이 옷 걸치는 난해한 숲 속에서/ 아침을 차며 산맥을 뛰어오르는 짐승을./ 둘러보아도 한(恨)뿐인 가난한 음성뿐인/ 나의 봉창에서 서성거리는/ 늙은 환각만을 아침의 공복만을./ 여기를 빠져 나가야/ 저 사립문을 열고 나가야/ 오늘 하루가 부끄럽지 않겠네/ 너와 나의 끝끝내 하나뿐인 노동은/ 너와 나의 하늘 어디 만큼서 뒹굴고 있을까?/ 새들의 짐승들의 휴식은 끝났을까?// 나는 슬프지 않네./ 끝없는 모색의 여기는 나의/ 오히려 다정한 무덤인가? 결의의 무덤인가?//

연가 / 조태일
너, 들끓는 쬐그만 가슴을/ 흐트리지 않고 용케도/ 여기까지 달려왔구나.// 무슨 소문 듣고파서/ 다투며 밀려오는 파도에/ 큰 눈을 맡기고 설레이는 마음 맡기고/ 기대어 있는 너의 곁에까지/ 숨 할딱이며 나 또한/ 용케도 따라왔구나.// 지평선 끝에 타오르는/ 이 시대의 그리움들은 파도치고,/ 저녁놀로 타오르고.// 별들이 하나둘 떠오를 때까지/ 순한 서로의 눈들은 불꽃이 되어/ 포개지고 얼싸안고 함께 나뒹굴 때/ 그렇게 그렇게/ 사슴의 눈에 사슴의 눈이/ 어른거릴 때// 우리는 입을 열지 않은 채/ 두고 온 온갖 소문들을/ 파도에게 별빛에게 퍼뜨렸다.// 거듭 사슴의 눈에/ 사슴의 눈이 포개질 때,/ 우리의 눈이 어른거릴 때,/ 파도는 소문이 되어/ 더 큰 바다를 향해 떠나고/ 별들도 소문이 되어/ 하늘에 바다에 웅성거렸다.//

난들 어쩌란 말이냐 / 조태일
오늘까지 살아오는 동안에/ 4․19정신! 어쩌고저쩌고 하면/ 실감도 안 나고 괜히 부끄러워만 진다.// 그날 우거진 총검의 숲을 맨가슴으로 헤치며/ 독재의 울타리를 향해 파도치다가/ 한 방의 총알에 쓰러져/ 오늘 다시 살아난다 해도 부끄러울 것인가.// 그날 총알이 나를 피해 달아나서/ 그날 숨을 거두지 못했지만/ 그 총알이 한없이 원망스럽지만/ 그래도 맺힌 한은 여직 남아 있어서/ 들끓는 눈물을 하늘에 뿌리며/ 비틀비틀 수유리를 찾아간다./ 하, 허연 비석들이 살아나면 무얼하나/ 하, 들꽃들이 피어나면 무얼하나/ 하, 참새들이 울어싸면 무얼하나 하, 혁명을 생각하면 무얼하나// 4․19 묘지 앞에 비석으로 꼿꼿이 서서/ 뼈를 갈아 섞은 듯 독한 소주에 나를 묻으면/ 하늘도 언짢아서 궂어진다./ 궂은 대로 번개도 치고 천둥도 울면야/ 그날의 함성을 몸에 두리두리 두르고/ 피뢰침일랑 머리에 꽂고 가슴에 꽂고/ 죽음 가까운 데까지 가서/ 묶여진 육신 펄럭이며 아가릴 벌려/ 풍선처럼 아우성 아우성을 친다면 덜이나 억울하겠는데……// 하, 하늘은 저리 궂기만 하고/ 천년이고 만년이고 바다는 파도 하나 못 일으킬 징조냐./ 더운 가슴들은 식어만 가기냐/ 살아남아서 괜히 부끄러워진다.//

너만 하나냐 우리도 하나다 / 조태일
대낮에 아무리 보아도 태양은/ 하나니깐 하나로 보인다./ 한밤에 아무리 보아도 달은/ 하나니깐 하나로 보인다./ 교과서에서도 그렇게 배웠거니와/ 한반도는 끝끝내 하나인데/ 동서(東西)에서 보기엔 둘로 보였다.// 생각하니 북순(北順)아, 억울해 죽겠다/ 곰곰히 생각하니 남순(南順)아 억울해 죽겠다/ 죽어죽어 생각해도 억울하겠다. 북남(北男)아/ 억울하다 생각하니 더 억울하다 남남(南男)아// 꽹과리․징․장구․소구․벅구 들고 나와/ 모두 보라고 더덩실 더덩덩실 더어더엉실/ 억울하다 생각하니 살겠다. 춤춘다./ 너만 하나냐? 우리도 하나다./ 하늘더러 보라고 살빛을 보이고/ 너만 하나냐? 우리도 하나다./ 강물더러 보라고 눈물을 합치고/ 너만 하나냐? 우리도 하나다/ 바람더러 보라고 숨결 합치고/ 너만 하나냐? 우리도 하나다/ 물더러 보라고 핏줄 출렁이며/ 모두 보라고 모두 보라고/ 더덩실 더덩덩실 더어더엉실 춤춘다.//

새 / 조태일
땅 위에 두 다리 디뎌보지도 못했을 거야/ 나뭇가지에 앉아보지도 못했을 거야/ 단 한번도.// 지친 날개 겨우겨우 퍼덕이며/ 하늘에서 연처럼 하늘거리는 새.// 겨울이면 하늘 복판에 얼어붙어/ 별 되어 반짝이다가/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도 얼어/ 우박으로 떨구다가// 여름 한철 바람 만난 풀씨처럼/ 공중에 떠도는 마음.//

굼벵이 / 조태일
뒤안길에서 한 5천년 살아온/ 우리들은 낮도 그리워하고/ 밤도 함께 그리워하는가.// 그래서 그런가/ 지금 내가 뒹구는 땅 위에는/ 낮도 많고 밤도 많아라// 하룻밤을 썩은 이엉 속에서 살다가/ 햇빛 쨍쨍한 마당으로 내려와서/ 눈도 코도 입도 귀도 닫힌 채// 허연 몸을 번쩍번쩍 뒤집고 뒤집어서/ 몸에 묻은 밤이슬을 그리움으로 말리다가/ 이내 몸을 꾸부리고 침묵하는……// 누가 나더러 굼벵이라고만 하는가/ 밤마다 썩은 이엉 속으로 기어 들어/ 이젠 눈도 코도 입도 귀도 열어 놓고// 드드득 이빨 갈아 어둠을 갉아 먹고/ 눈깔 껌벅여 어둠을 갉아 먹고/ 그리워서 하도 그리워서/ 달더러 보라고 몸 뒤채이며/ 밤이슬 맞는다. 밤이슬 맞는다.//

농주(農酒) / 조태일
아하, 옛부터 우리의 농주(農酒) 속에는/ 더위란 아예 없었나부다./ 울퉁불퉁한 팔뚝의 심줄을/ 무슨 무슨 산맥처럼 뽐내며,/ 서울의 냉막걸리가 아닌 투박한 농주(農酒)를/ 사발로 사발로 마셔보면 알지.// 깊은 산 속의 옹달샘 위에서나 산다든지/ 북극의 얼음 위에서나 겨우 살아가는/ 그런 싸늘한 바람도 어느 틈에 왔는지/ 내 입술을 사알짝 스쳐서/ 그 건강한 농주(農酒)를 찰랑이다가/ 이내 친근한 일꾼처럼 취해 버리지.// 에라 모르겠다./ 술취한 그 바람의 등을 타고/ 은하수가 널려 있는 밤하늘로 올라가서는/ 이승의 주막집을 드나들 듯/ 농주(農酒) 냄새 풍풍 풍기면서/ 저 무수한 별들의 주막집을// 통행금지도 없이 드나들다가/ 밤새 내 한국은 어찌 됐는지/ 궁금증도 풀 겸, 새벽녘에 별똥 타고 내려와서/ 그 끈끈한 농주(農酒)로 해장이나 할까부다./ 여름을 혼자서만 타는 듯,/ 온통 혼자서만 새까맣게 타버린/ 그 걸걸한 웃음소리의 천상병(千祥炳)씨랑.//

길 / 조태일
그냥 가렵니다./ 황톳길이건 돌밭길이건/ 잠 못 이루고 서로 앉아 몸 비비며/ 깨어 있는 풀밭길이라도/ 어쩌겠소, 어쩌겠소.// 그냥 떠나렵니다./ 마음 편하건 안 편하건/ 오늘 밤도 저리 잠 못 이루고/ 깨어서 반짝이는 별밭길이라도/ 어쩌겠소, 어쩌겠소.// 책들도 노트도 불태워 버리고/ 다시 태어나는 순간으로/ 그 기분으로 그 첫울음으로/ 가렵니다, 떠나렵니다./ 말리겠소? 말리겠소?// 청청히 솟아 있는 대밭이건/ 묵묵히 앉아 있는 바윗길이건/ 철철이 흐르고 있는 강물길이건// 어쩔 수 없지 않소/ 헛말만 떠도는 이곳보다야/ 훨씬 살아갈 맛이 나지 않겠소?/ 걸어서 걸어서/ 잠 이룰 때까지 뜬눈으로.//

쌀 / 조태일
멍청하게 와 버린 봄빛 위에서/ 머리 푼 저 북풍은 살아 있다./ 흰 이빨은 펄펄 살아 있다.// 만인에게 후려치는 내 눈물보다도/ 더 예쁘고 날쌘 남도 평야는 살아 있다./ 누런 땅빛은 영원히 살아 있다.// 남루한 삼베 치마저고리를 걸친/ 저 누님 같은 아낙네의 살빛은 살아 있다./ 그의 전신경은 펄펄 살아 있다.// 눈을 감으면 어지럽게 쏟아지는/ 쌀은 펄펄 살아 있다./ 쌀 속의 모든 사연은 살아 있다.// 북풍이 봄빛을 깔아뭉개는 소리/ 내 눈물이 만인을 내리치는 소리,/ 쌀이 쌀을 살해하는 소리,/ 모든 소리들은 다 살아 있다.// 펄펄 살아서 쌀은/ 내가 밤마다 훔치는 한국어를 노래한다./ 뱀의 혀보다도 더 빨리 노래하며/ 내 온몸에 살아 있다.//

깨알들 / 조태일
응달진 미곡상회의/ 가장 구석진 자리로 밀리고 밀려/ 무슨 사연들로 저리 웅성이는가.// 버러지 같은 것 버러지 같은 것들이/ 제 세상 만난 듯 슬슬 치며 기어 다녀도/ 꼼짝 않고 물러앉아 곱디곱게/ 길을 내주며,// 눈보라치는 날이든/ 장마가 끊이지 않는 날이든/ 작은 몸들을 서로 부둥켜안고/ 지는 해 뜨는 달/ 가슴으로 받아 반짝이며// 무슨 소문은 없나/ 꿈이라도 좋겠네// 빨리 팔려가고파서/ 눈들을 굴리며// 지나는 행인 쳐다보며/ 목을 빼네// 그리워서./ 그리워서.//

그래도 봄은 오는가 / 조태일
오는 봄은 오는 길이/ 높으나 낮으나 탓하지 않고/ 다만 몸을 낮추며 온다./ 그렇게 수선을 피우지 않고도/ 그렇게 무차별 합궁하지 않고도/ 이렇게 많은 생명들을 일깨우며 온다.// 오는 봄은 오는 길이/ 더디나 빠르나 서두르지 않고/ 다만 당당하게 온다./ 그렇게 장애물을 후려치지 않고도/ 그렇게 짝짜꿍 변절치 않고도/ 이렇게 헐벗은 생명을 감싸며 온다.// 기어코 온다./ 보란듯이 온다./ 환장하게도 조용히 온다./ 다만 돌아버려 이웃이 아닌 것들에게/ 어지럼병을 흩뿌리며 온다.// 배신과 변신과 변절과 간통으로 얼룩진/ 민자년의 아리송한 속곳을/ 들춰내며(아이고메,냄새야!)/ 일천구백구십 년의 봄은 온다.// 겨우내 움츠렸던 팔십 고개 어머님의/ 삭신을 자근자근 녹이며 온다./ 겨우내 땅속에서 도란도란 떨던/ 어린 싹들을 어루만지며 온다.// 아직 못 지켰던 약속 위에도/ 아직 덜 터뜨린 외침 위에도/ 아지랑이는 피어 오르고,/ 횃불처럼 타오르고,// 그렇다./ 닫힌 채 텅 비어 있는 마음에까지/ 온갖 꽃들 피워 향기 퍼뜨리며/ 기어코 오는 봄 앞에서/ 우리들 부끄러워라./우리들 화끈거려라.//

가을 3 / 조태일
가을 하늘은 모두/ 어김없이 도시의 하늘을 비켜가서/ 들판에 몰려 있다.// 거기 끼리끼리 퍼질러 앉아서/ 살 오르는 오곡들에게 풀 열매들에게/ 찬란한 젖을 물리고 있다.// 가을 햇빛은 모두/ 어김없이 궁핍한 농촌의/ 과일나무에 몰려 퍼질러 앉아서/ 살 오르는 과일들에게/ 부산하게 찬란한 젖을 물리고 있다.//

가을엔 / 조태일
나름대로의 길/ 가을엔 나름대로 돌아가게 하라./ 곱게 물든 단풍잎 사이로/ 가을 바람 물들며 지나가듯/ 지상의 모든 것들 돌아가게 하라.// 지난 여름엔 유난히도 슬펐어라/ 폭우와 태풍이 우리들에게 시련을 안겼어도/ 저 높푸른 하늘을 우러러보라./ 누가 저처럼 영롱한 구슬을 뿌렸는가./ 누가 마음들을 모조리 쏟아 펼쳤는가.// 가을엔 헤어지지 말고 포옹하라./ 열매들이 낙엽들이 나뭇가지를 떠남은/ 이별이 아니라 대지와의 만남이어라./ 겨울과의 만남이어라/ 봄을 잉태하기 위한 만남이어라.// 나름대로의 길/ 가을엔 나름대로 떠나게 하라./ 단풍물 온몸에 들이며/ 목소리까지도 마음까지도 물들이며/ 떠나게 하라./ 다시 돌아오게, 돌아와 만나는 기쁨을 위해/ 우리 모두 돌아가고 떠나가고/ 다시 돌아오고 만나는 날까지/ 책장을 넘기거나, 그리운 이들에게/ 편지를 띄우거나/ 아예 눈을 감고 침묵을 하라./ 자연이여, 인간이여, 우리 모두여.//

가을 잠자리 / 조태일
몇날 몇 달/ 몇백 리 몇천 리의 허공을 날고 날았을까./ 텅 빈 폐가의 늘어진 빨랫줄에/ 잠자리 한 쌍/ 앉아서 쉬고 있다.// 투명한 그물맥의 날개를/ 이따금 이따금 떨면서/ 작은 더듬이로/ 이 세월을 더듬거린다./ 그 큰 곁눈으로 할깃할깃,/ 익어가는 삼라만상을 담는다.// 몇날 몇 달/ 몇백 리 몇천 리의 허공을 뚫고 날아서/ 저승으로 가려는가/ 세 쌍의 다리로 힘껏/ 이승을 박차고/ 자물자물 하늘로 날아간다/ 황금빛을 반짝이며.//

​단풍 / 조태일
단풍들은/ 일제히 손을 들어/ 제 몸처럼 뜨거운 노을을 가리키고 있네.// 도대체 무슨 사연이냐고 묻는 나에게/ 단풍들은 대답하네/ 이런 것이 삶이라고./ 그냥 이렇게 화르르 사는 일이 삶이라고.//

겨울 새 / 조태일
하늘을 날아가던 새떼들/ 푸른 자리에 박혀 버렸다.// 눈보라 속을/ 그 작은 눈으로 껌벅거리며// 매운 눈물 흘리며/ 거기까지 날아갔으나/ 눈물까지 얼어붙어서/ 앞을 볼 수가 없단다.// 어수선한 하늘을/ 그 작은 날갯짓으로 파닥거리며/ 가슴 두근거리며/ 날으고 날으고 날아갔으나/ 솜털까지 얼어붙어서/ 이젠 더 날아갈 수가 없단다.// 겨울 밤하늘의 별들이여/ 그렇게도 목메이게/ 띄워 올렸던 만세소리여.// 쏟아지려무나/ 우박이라도/ 새떼라도 좋다/ 쏟아지려무나.//

겨울 소식 / 조태일
광주를 온몸에 흠뻑 적셔/ 터벅터벅 그 친구는 서울엘 와서// 늘 외롭고 힘 없는 내 손을 쥐고/ 눈과 손으로 광주를 건네 주지만// 내 허전한 마음까지 건네면 쓰나/ 내 찌든 몸까지 건네면 쓰나// 찬 바람 속에서 광주는/ 큰 애를 뱄다더라.// 찬 눈에 덮여서도 무등산은/ 그렇게도 우람한 만삭이더라.// 광주를 온몸에 적셔서/ 서울의 내 곁에 사알짝 놓아두고// 터벅 터벅/ 서울을/ 떠나 버리는 친구!//

겨울에 쓴 자유서설(自由序說) / 조태일
1// 우리들의 눈은/ 허름한 날품팔이의 일거수 일투족에서/ 이 시대의 눈물을 본다./ 우리들의 입은/ 뚜껑 덮인 청계천처럼 더럽고 컴컴한/ 야간 완행열차를 바다로 끌고 가/ 파도 끝에다 함성을 보태고// 우리들의 귀는/ 닫아도 닫아도 거듭 열려서/ 말 못 하는 침묵을 듣기도 한다.// 2// 어느 비린내 나는 시장 모서리/ 포장도 없이 썰렁한 싸구려 음식점에서/ 이십 원짜리 멀건 수제비 한 사발과/ 깍두기 두어 점으로 배를 채우고/ 험란한 팔다리를 끌며 생활을 찾아/ 일어서는 우리들의 형님과 누나들// 웅크리고 있던 겨울 바람도 일어나/ 윙윙거리며 따라 나선다// 3// 간(肝)이 콩알만해지는/ 우리들의 메마른 땅 우리들은/ 두서없는 말이라도 뿌린다.// 기왕에 두서없는 땅/ 순서가 뒤바뀌어서 뿌리가/ 하늘로 솟는 땅// 솟아서 비나이다 비나이다/ 우리 하나님께 비나이다// 우리들의 머리 위로 내닫는/ 고압선 고압선 고압선을/ 우리들 목에 걸어 주시옵소서// 발버둥치며 이 땅의 구석구석을/ 더운 가슴으로 더듬으며/ 이 겨울을 불 지피며 기어다니리니.//

성에 / 조태일
신새벽 문득 깨어 일어나니/ 흰꽃들이 유리창에 어른거린다.// 지난밤 창 밖의 고향에선/ 무슨무슨 사연들이 있었길래/ 이토록 허연 소문으로 피어났느냐// 눈부신 창 밖이/ 보인다, 들린다.// 어렸을 적 헤엄치며 놀았던/ 저 극락강이 얼다 얼다 열이 나 깨어져/ 성엣장들이 서로의 몸들을 어루만지며/ 하염없이 떠내려가는 모습이,/ 성엣장들이 몸들을 부딪치며/ 강 끝으로 끝으로 떠내려가는 소리가.//

가거도(可居島)* / 조태일
너무 멀고 험해서/ 오히려 바다같지 않는/ 거기/ 있는지조차/ 없는지조차 모르던 섬.// 쓸 만한 인물들을 역정내며/ 유배 보내기 즐겼던 그때 높으신 분들도/ 이곳까지는/ 차마 생각 못 했던,// 그러나 우리 한민족 무지렁이들은/ 가고, 보이니까 가고, 보이니까 또 가서/ 마침내 살 만한 곳이라고/ 파도로 성 쌓아/ 대대로 지켜오며/ 후박나무 그늘 아래서/ 하느님 부처님 공자님/ 당할아버지까지 한식구로 한데 어우러져/ 보라는 듯이 살아오는 땅.// 비바람 불면 자고/ 비바람 자면 일어나/ 파도 밀치며/ 바다 밀치며/ 한스런 노랫가락 부른다.// 산아 산아 회룡산아/ 눈이 오면 백두산아/ 비가 오면 장내산아// 바람불면 회룡산아/ 천산 하산 넘어가면/ 부모형제 보련마는/ 원수로다 원수로다/ 산과 날과 원수로다*// 낯선 사람 찾아오면 죄 많은 사람 찾아오면/ 태풍 세실을 불러다가/ 겁도 주고 달래 보고 묶어 보고 풀어 주는/ 바람 바람 바람섬,/ 파도 파도 파도섬.// 길가는 나그네여!/ 사월혁명의 선봉이 되어/ 반민주 반독재와 불의에 항거하여/ 싸우다가 십구일 밤 무참히 떨어진/ 십구세의 대한의 꽃봉오리가 여기/ 누워 있다고 전해다오*// 자식 길러 가르치고/ 배운 자식 뭍으로 보내/ 나라 걱정, 나라 위해/ 목숨도 걸 줄 아는/ 멋있는 사람들이 사는/ 살 만한 땅.// * 전남 신안군 흑산면에 있는 우리나라 최서남단의 섬. 흔히 소흑산도라 하지만 이는 일제시에 일본인이 붙인 이름으로 행정상의 지명도 가거도임. 현지 주민들도 꼭 가거도라고 부르며 소흑산도란 말을 쓰면 싫어함.
* 가거도 주민들이 그곳 전설을 민요화해서 부르는 노래.
* 이곳 출신으로 서울로 유학, 서라벌예술고등학교에 재학중이던 김부연(金富連)군이 4․19혁명에 가담하여 산화했는데, 그 기념비가 가거도에 세워져 있음.

그리운 쪽으로 고개를 / 조태일
어린 날/ 고향의/ 양지바른 쪽 다투며 뛰놀던 햇볕들/ 흙 한톨, 돌멩이들.// 어린 날/ 고향 가득히/ 쏟아지는 달빛, 별빛들과/ 다투며 떨어지던 알밤들./ 그 소리들,/ 어린 짐승들의 숨소리들.// 그 작고 고만고만했던 꿈들,/ 지금 어디서 얼마만큼 자랐나,/ 어린 날의 콧물과 눈물과 함께/ 훌쩍거리나.//

가시내 환영(幻影) / 조태일
그날 나는/ 욕망이 떠나가 버려서/ 책갈피에서 느닷없이 튀쳐 나오는/ 허약한 내 방의, 기별 없이 모이는/ 그 연애(戀愛)가 별나고 하도 하도 신기해서// 나의 마지막 남은 사랑은/ 여인을 위하여 평화를 위하여/ 성실한 화가가 차려 놓은 세계의,/ 가난한 `가시내' 앞에/ 인사도 없이 앉았었지.// 머리는 치렁치렁 나의 시간들을 얽혀 이고/ 두 눈엔 태양이 젖어 있을 때/ 울부짖는 야수를 위하여/ 한번 패배를 위하여/ 헤엄치는 섹스 가까이서 나는 잠을 잡았었지.// 짐승들의 날쌔인 행동이 익고/ 쓰러진 시신(屍身)들 사이/ 그 어둑한 곳에 나를 눕히고!/ 내 사랑을 눕히고.// 너는 상냥한 이브./ 불붙는 `가시내'여, 불붙는 `가시내'여!/ 나는 옆에서 가장이 되어 가고 있을 때/ 너의 두 눈에선 태양이 서서히 기어 나오고/ 시간은 폐병(廢兵)처럼 머리에서 기어 내리고/ 밑모를 깊이에서/ 나는 둥둥 떠 있었지.//

간추린 풍경(風景) / 조태일
꽃이 핀 안 핀 천년 묵은 꽃나무 위/ 꿀벌레 나비떼들 시간의 등을 타고 올라/ 햇빛에 꽂혀 파닥거리고 숨가빠 하고.// 일터가 있는 없는 노동자의 머리 위/ 눈 곯았냐, 가벼운 바람 따라/ 폭력의 구름떼 자유로이 지나가고 쏘내기 뿌리고.// 부부 싸움을 끝낸 안 끝낸 남녀노소의/ 가슴속 깊이 빨간 열매 그립냐,/ 사랑의 파도 소리 이리저리 밀리고 고함치고.//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詩人)이여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내 몸은 앉으면서 일어나면서 꺼이꺼이 울고 깃발이 되고.//

옹기점 풍경(甕器店 風景) / 조태일
한반도(韓半島)의 모든 바람은 물론/ 세계의 모든 바람들도 함께 섞여/ 멋모르는 마음들은 마음 놓고/ 밤낮없이 여기 와서 논다.// 어떤 놈은 풀피리, 버들피리를 불고/ 어떤 놈은 피리, 퉁소를 불고/ 어떤 놈은 장구, 북을 치면서 논다./ 하, 어떤 놈은/ 하모니카, 트럼펫, 색소폰을 분다.// 한반도의 모든 빛은 물론/ 세계의 모든 빛들도 함께 섞여/ 멋모르는 마음들은 마음 놓고/ 밤낮없이 여기 와서 논다.// 어떤 놈은 느릿느릿 양산도 춤을 추고/ 어떤 놈은 깝쭉깝쭉 보릿대춤을 추고/ 어떤 놈은 허리 끊어져라 트위스트를 추고/ 하, 어떤 놈은/ 고고춤을 원없이 춘다.// 서러운 우리들은 밤낮없이/ 묵묵무답(黙黙無答)인 채 아무데나 놓이고/ 밤낮없이 저러는 풍경은/ 일몰(日沒)이 와도 걷히지 않고/ 일출(日出)이 와도 걷히지 않는가.//

또 동백꽃 소식 / 조태일
그곳을 떠나올 때까지/ 그 누군가가 준 동백 분재는/ 아직 꽃망울을 터뜨리지 못했단다.// 천성이 게을러서 생각나면 물 주고/ 잎을 따주어서 그런지/ 자기 마음 알아차려서 그랬는지/ 푸른 잎만 가득 매달렸단다.// 외딴섬에서 꿈꾸던 동백은/ 그 바다에 뿌리를 두고 왔음인지/ 꽃 피울 생각은 안 하고 저 홀로/ 깊어만 깊어만 간단다.// 언제 그 눈부신 몸과 마음 열어/ 환한 검붉은 꽃 피어/ 그 향기 풀풀거리면/ 그 동백 분재 안고 와/ 안기겠단다.// 찬바람 몰아치는 섬 쪽에서/ 어허, 벌써/ 꽃망울 터지는 소리.//

연등 / 조태일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산 속/ 개복숭아꽃 저 혼자 타오르고 있었네.// 연분홍꽃/ 점, 점, 점, 점점이 불 밝혀/ 화르르 화르르 몸 섞고 있었네.// 사월 초파일날 켠 연등보다/ 더 환했네. 더 고왔네.// 오래도록 내 숨결/ 내 스스로 가빴네/ 내 스스로 황홀했네.//

​ 발견​ / 조태일
하늘을 보며 고개를/ 숙인다.// 바다를 보며 마음을/ 닫는다.// 산을 보며 눈을/ 감는다.// 여린 것들 앞에서는/ 쳐들고 열고 뜨면서도.//

밤에 쓴 시 / 조태일
별들은 밤에도 눈을 감지 못한다./ 수많은 새끼들을 무릎에 앉히거나/ 팔베개를 하고 자장가를 불러도/ 별새끼들은 에미와 애비를 따라/ 밤새도록 눈감을 줄 모른다// 풀잎들은 밤에도 눕지 못한다./ 눕기는 커녕 밤새도록 몸을 뒤척인다./ 수많은 새끼들을 껴안거나/ 어루만지며 자장가를 불러도/ 풀새끼들은 에미와 애비를 따라/ 밤새도록 누울 줄을 모른다.// 구름들을 보아라./ 별들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받으며/ 풀잎들의 서걱이는 몸짓을 보며/ 구름들도 멈춰 있지를 못한다./ 수많은 새끼들을 꽁무니에 달거나/ 겨드랑이에 끼며 자장가를 불러도/ 구름새끼들은 에미와 애비를 따라/ 밤새도록 쉬지를 못한다.// 시인들은 밤에도 눈을 감지 못한다./ 별들이며 풀잎들이며 구름들이 자지 않는 한/ 수많은 시인들은 이 어둠 속에서/ 잠을 잘 수가 있겠는가?/ 에미와 애비와 새끼들도 한통속이어서/ 별들과 풀잎들과 구름들과 시인들도/ 한통속이어서 끝끝내 이 어둠을 두고는/ 잠들지 못한다.//

달빛과 누나 / 조태일
달빛이 좋아/ 처녓적 늘 울멍울멍했던 우리 누나는/ 풀벌레 밤새 뒤척이는 영남땅에/ 누워계신다.​// 단신으로 월남한/ 함경도 사내 지아비로 삼아/ 아들딸 낳고 대구에서 사십여 년 살다가​// 어느해 여름/ 처녓적 삼밭머리 뽕나무밭/ 산꿩소리 그리워서/ 삼베옷 명주꽃신 신고 누어서/ 달빛 같은 처녀 몸으로​// 남도땅 동리산 태안사 염불소리 들으며/ 영남 땅에 누워 계신다.//

단 한 방울의 눈물 / 조태일
단 한 방울의 눈물은/ 내 유년시절 즐겨 옷 벗던 실개천이었다가/ 들판을 굽이치는 강물이었다가/ 바다였다가,// 그 아무도 모를 일이어라/ 가뭄에 목 타는 모든 풍경들 위에 쏟아지는/ 소나기가 되어/ 지쳐 누워 있는 산들을 일으키다가/ 엎어진 들판을 다시 뒤집다가// 어느 날 밤은/ 캄캄한 숲들과 함께 울음바다로 출렁이다가/ 다시 내 눈에 잠시 들어 쉬다가// 깨어나라 깨어나 걸어라/ 내 발들을 찍는 도끼였다가/ 빌고 비는 손바닥에 땀으로 솟았다가/ 천지를 뒤덮은 연기였다가/ 아스라이 스러지는/ 마지막 별빛이었다가/ 오늘은 함박눈으로 내린다./ 잠이 없어 뒤척이는 세상의/ 자장가로 내린다.//

풀꽃은 꺾이지 않는다 / 조태일
사람들은 풀꽃을 꺾는다 하지만/ 너무 여리어 결코 꺾이지 않는다.// 피어날 때 아픈 흔들림으로/ 피어 있을 때 다소곳한 몸짓으로/ 다만 웃고만 있을 뿐/ 꺾으려는 손들을 마구 어루만진다.// 땅속 깊이 여린 사랑을 내리며/ 사람들의 메마른 가슴에/ 노래되어 흔들릴 뿐.// 꺾이는 것은/ 탐욕스런 손들일 뿐.//

 



조태일(趙泰一, 1941년~1999년) 시인
전라남도 곡성 태안사에서 태어났다. 호는 죽형(竹兄)이다. 경희대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6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아침 선박〉이 당선되었다. 1969년 월간 시전문지 《시인》을 창간해 김지하, 양성우, 김준태를 배출했다. 1974년에 고은, 백낙청, 신경림, 황석영, 염무웅, 박태순 등과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창립하였고, 독재에 저항하다 여러 번 투옥되었다. 1989년에 광주대학교 조교수, 1994년에 예술대학 초대 학장이 되었다. 저서로 《아침 선박》 《식칼론》 《국토》 《가거도》 《자유가 시인더러》 《산속에서 꽃속에서》 《풀꽃은 꺾이지 않는다》 《혼자 타오르고 있었네》 시론집 《고여 있는 시와 움직이는 시》 등이 있으며 편운문학상, 전남도문화상 문학부분, 만해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1999년에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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