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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적자嫡子 / 박금아

부흐고비 2021. 10. 22. 09:38

아버지가 배 문서를 들고 집으로 오던 날의 기억이 선하다. 집안의 여인네들이 방 안 가득 어머니 곁에 둘러앉아 머릿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내던 모습도 떠오른다. 문서가 담긴 싯누런 봉투를 앞에 두고 사람들은 말이 없었다. ‘어흥 11호’는 아버지가 물려받은 유일한 유산이었다. 할아버지가 소유한 십여 척의 배 가운데 제일 낡고 작은 배였다.

아버지는 서자(庶子)였다. 아들을 얻지 못한 할아버지가 씨받이로 맞아들인 여인의 몸에서 얻은 첫아들이었다. 아버지를 낳은 후, 생모는 강보에 싸인 아들을 행랑채에 남겨 두고 새벽달처럼 사라졌다고 한다. 그 후 친할머니는 딸 하나를 더 낳았고, 이어 아들 형제를 내리 낳았다.

아버지는 중학교 졸업이 배움의 전부였다. 두 분 작은아버지가 서울 어느 대학에서, 당시로서는 이름도 생소한 연극영화과를 다닌 것에 비하면 턱없이 짧은 공부였다. 학교를 그만두고는 할아버지의 뜻을 따라 집안의 사업을 도맡아 하느라 젊은 날의 대부분을 섬에서 보냈다.

섬에는 늘 바람이 불었다. 시도 때도 없이 불어오는 바람은 가산은 물론, 사람의 목숨까지 앗아갔다. 태풍이 오는 날이면 아버지는 배를 띄워 바다로 갔다. 아버지가 이른 나이에 터득한 파도를 넘는 방식이었다. 바닷바람이 지나고 나면 육지에서는 더 큰바람이 불어왔다. 섬사람들을 육지로 부르는 바람이었다. 살아온 터전을 떠나도록 뒤흔드는 바람에는 풍속을 가늠할 수 없는 광기가 서려 있었다. 섬사람들이 바람 앞에서 길을 잃고 흔들릴 때마다 일렀다.

“세상 바다에는 모다 풍랑이 이능 기라.”

누구보다 뭍이 그리웠을 아버지였다. 깜깜한 밤, 멀리서 반짝이는 육지의 불빛은 속내를 흔들어댔을 것이다. 아버지가 자주 부르던 <불어라 열풍아>라는 노래가 떠오른다. 그럴수록 혼신을 다해 사업을 일구었다. 두 척이던 배는 십 수 척으로 늘었고, 할아버지는 근방에서 최고 부자로 이름을 얻었다. 아버지는 누가 보아도 집안의 든든한 대들보였다.

출생부터 맞닥뜨린 바람으로 웬만한 바람에는 끄떡없던 아버지도 배 문서를 들고 오던 날에는 달랐다. 아버지의 눈빛이 태풍이 닥치던 날 마루 기둥에 걸려 있던 남포등처럼 격렬하게 떨렸다. 유산 배분을 두고 집안 어른들의 반대가 심했다. 큰소리가 연일 담장을 넘어갔다. 침묵하던 어머니가 나서고서야 수습이 되었다.

“아부이예에, 11호만이라도 고맙습니다아.”

할아버지는 그 후, 주문처럼 되뇌었다고 한다.

“배를 와룡산* 꼭대기에 언쳐 놓아도 수영이**는 만선을 이뤄낼 끼다.”

며칠 후, 아버지는 어흥호를 끌고 조선소로 갔다. 독에 올리고 보니 몸 구석구석이 성한 데가 없었다. 사람이 그렇듯이 배도 유한한 삶을 사는 존재다. 허가된 생명의 시간이 있다. 어흥 11호의 조업 연한은 20년이었다. 아버지에게 오던 때가 건조된 지 15년째였다니 완전한 노년이었다. 일만 하느라 큰 병원 문턱 한 번 밟지 못하고 바다에서 생을 보내기는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배 수리공이 노쇠해진 선체의 혈관을 뚫어 피돌기를 도왔다. 배 밑바닥을 살피는 일은 중요하다. 출렁이는 바다 위에서 반듯하게 서는 힘은 ‘바닥’에 있기 때문이다. 배는 받아들이고 내보내는 물의 양으로 균형을 유지한다. 평생의 삶으로 아버지는 누구보다 많이, 보이지 않는 바닥의 힘을 믿었다. 내과적인 진료가 끝나면 외과 수술을 감행했다. 이음새를 살펴 새 못으로 갈아 끼우고 거칠어진 나뭇결을 대패질했다. 거센 파도의 시간이 대팻날 속에서 동그랗게 말려 물고기 비늘처럼 반짝이며 떨어져 내렸다. 새로 돋은 11호의 살결이 발그레했다. 검붉게 탄 아버지의 마음에도 연분홍 새 살이 돋았을까. 수리를 마친 배에서는 빛이 났다. 마지막으로 칠장이 갑수 아재가 선수와 선미를 돌며 페인트칠을 했다. 배의 밑바닥은 액(厄)이 스며들지 못하도록 붉은 옻칠을 했다. 배의 양쪽 볼에 이름을 쓸 차례였다. 긴장 속에 붓의 한끝이 ‘어흥 11’의 마지막 숫자 ‘1’의 꼬리를 허공에 살포시 떨어뜨리면, 고사상이 차려진 조선소 마당에서 박수가 파도처럼 터져 나왔다. 칠을 끝낸 뱃머리가 큰절을 올리는 아버지의 가르마처럼 반듯했다. 마침내 돛장이 아재가 여러 날을 공들여 만든 돛이 돛대 끝에 내걸리고, 사람들은 푸른 하늘가까지 만선의 고기 떼가 득실거리기를 빌었다.

새로운 생이 시작되었다. 이제 11호는 파도가 무서워 작은 바다에서 잡어를 잡는 초라한 목선이 아니었다. 단단한 근육질의 장정으로 다시 태어났다. 아버지도 할아버지를 돕기만 하던 조수가 아니라 진짜 선주가 되었다.

어흥 11호는 아버지와 같은 걸음이었다. 어선 대부분이 기계선으로 바뀌던 시절, ‘우다시’라고 불리던 그 배는 바람을 이용해서 바다를 건너던 돛배였다. 동력선들이 요란한 소리로 앞다투어 달려가 먼저 그물을 내려도 어흥호는 한결같은 걸음새였다. 앞질러 가 자신의 차지를 주장해 본 적 없는 아버지의 걸음걸이 그대로였다.

배움이 짧았어도 고기가 노니는 자리를 알고 고기가 모여들던 때를 아는 것은 평생을 함께했던 바다가 아버지에게 남겨준 특별한 유산이었다. 그물을 던지고 끌어올리는 때를 판단하는 것도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아버지의 손끝이 기억하는 감각이었다. 11호도 온몸으로 화답했다. 흑산도와 추자도, 제주도 바다가 아버지 앞에 엎드리며 제 속에 품은 것들을 푸짐히 내놓았다. 덕분으로 삼천포항은 우리 배가 갑판에서 풀어놓은 고기들과 만선을 구경나온 사람들로 자주 성시를 이뤘다. 생애 가장 화려했던, 하늘 끝 가득 오색 깃발이 펄럭이던 아버지의 전성기였다.

아버지의 기일, 제사상에 누군가 할아버지의 숟가락도 올려두었다. 오랜만에 할아버지와 한 잔을 나누었는지 사진틀 속에서 아버지는 제법 거나해졌다. 아버지 곁에는 11호가 아직도 정박 중이다. 생애처럼 파도는 여전히 기세를 높여 일어나고 있다. 아버지를 태운 어흥 11호가 출렁이는 바다를 향해 뱃머리를 돌린다. 돛대 높이 돛이 펄럭인다.

아버지는 바다의 적자(嫡子)가 되었다.

* 경상남도 삼천포에 있는 산,   ** 아버지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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