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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제12회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장려상

이른 새벽, 홀로 주산(主山)을 오른다. 주산은 고령 대가야읍에 있는, 대가야 왕국의 흥망성쇠를 온몸으로 보듬어 안고 온 어머니와 같은 산이다.

왕릉전시관 뒤편의 남쪽으로 난 고분들 사이를 걸으며 대가야 역사의 숨결 속으로 빠져든다. 1천500여 년 동안이나 꼼짝없이 한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수많은 고분의 우뚝우뚝한 봉분 위로 새벽 별빛이 총총하다.

철의 왕국으로 불리며 520년 동안 대가야를 지배했던 왕과 왕족들의 700기가 넘는 무덤이 주산의 능선과 비탈에 따개비처럼 붙어있다. 그 무덤 속에는 순장(殉葬)이라는 비정한 이름으로 생목숨을 빼앗겨야 했던 이름 없는 백성들의 영혼도 숨 쉬고 있다.

당시의 사람들은 사람이 죽어서 저세상에 가더라도 이승에서와 똑같은 삶이 지속된다는 계세사상(繼世思想)에 젖어 있었다. 왕이나 귀족들이 죽으면, 생전에 그들에게 수발을 들었던 시종과 시녀, 마부, 호위무사, 창고지기 등을 함께 묻었다. 그리고 저세상에 가서도 필요한 물품을 생산할 수 있는 농부나 대장장이 등 일반 백성들도 저승으로 데려가기 위해 순장시켰다. 순장을 자청해 순사(殉死)한 자들도 있었다고 하나 대부분의 순장자들은 강제로 생목숨을 빼앗겼다. 영생과 호사를 꿈꾸는 지배자들의 욕망은 끝이 없었다.

상념에 젖어 비탈진 고분들 사이를 걸어 올라가다가 문득 앞을 가로막는 거대한 무덤이 있어 멈추어 선다. 바로, 가야 시대 최대의 순장 무덤인 지산동 44호 고분이다.

산 밑에 있는 왕릉전시관에는 이 고분 발굴 당시의 모습과 유물이 생생하게 재현되어 있다. 지배자의 영생을 위해 비통하게 목숨을 빼앗긴 돌 덧널 속 순장자들의 처참한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남편과 아내, 아버지와 딸, 형제자매가 함께 묻히기도 했으며, 철없는 10대의 어린 소녀도 있었다. 무덤 안에 왕과 함께 순장된 사람들의 유골이 무려 32기나 확인되었다. 인명경시 사상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높은 산 능선에 앉아 크고 작은 무덤의 봉분 위로 쏟아지는 별빛들을 바라보면서 무덤 속 순장자들을 생각한다. 그들의 한숨과 절규가 은은하게 들려오는 듯하다.

나는 어느새 1천500년 전으로 돌아가 가야국의 한 사람 순장자가 되어본다. 어느 날 절대자인 왕이 죽고, 영문도 모른 채 순장자로 선택된 나는 사랑하는 가족들과 눈물로 이별을 하고 순장지로 끌려간다. 왕릉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그곳에는 수십 명의 사람과 껴묻거리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순장 절차에 따라 산 위에서 밤을 새운 뒤 왕의 상여를 맞아 세 번 절하고 돌 덧널 속으로 들어가 무시무시한 불안과 공포 속에서 죽음을 기다린다. 살아야겠다고 발버둥 치는 순장자들에게 가해지는 것은 무자비한 폭력과 죽음뿐이었다. 왕의 시신이 하관(下官)되고 나는 대가야의 왕릉에 순장되었다. 그리고 1천500년 슬픔의 세월이 내 가슴을 치며 지나갔다. 멀리 어둠이 걷히며 희붐하게 날이 밝아 오고 있다. 일찍 깬 휘파람새의 울음소리가 숲속의 적막을 깨고 있다

순장의 상념에서 깨어나 주산의 남쪽 고분군을 돌아 서쪽 고분군의 입구에 들어섰다. 서쪽 산 능선과 산비탈 역시 우뚝한 봉분의 무덤 천지였다. 지배자들은 죽어서도 자신들의 권위를 과시하려고 했다. 그들은 산 능선의 높은 곳에 무덤을 만들어 하늘과 가장 가까운 존재가 되려 했으며, 죽어서도 높은 곳에서 백성들이 사는 모습을 내려다보며 영원히 충성하기를 바랐다.

지배자들의 거대한 무덤의 봉분이 줄지어 버티고 있는 서쪽 산 능선을 따라 올라가던 중 작고 초라한 무연고 분묘 하나가 엎드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 멈추어 섰다. 누가 이 신성한 대가야 왕족들의 기라성 같은 무덤 사이에 저렇게 작은 무덤을 몰래 만들어 놓았을까? 어느 힘없는 백성이, 지하에서나마 왕족들의 기운을 받아 자신의 후손들이 번창하기를 빌면서 어버이의 무덤을 남몰래 저곳에 만들었을 것이다. 군청에서 세워 놓은 이장(移葬)을 독촉하는 안내문이 마음을 아리게 한다.

아침햇살이 산등성이를 타고 오르며 부챗살처럼 퍼지고 있다. 어디를 가더라도 무덤뿐인 곳, 순장의 비애로 가득한 주산의 지산동 고분군은 이제 또 다른 희망으로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다. 이곳 지산동 고분군은 최근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의 형식요건 완성도 검사를 통과해 내년 7월 개최되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것이 확실시된다고 한다.

지배자들에 의해 가장 비정하고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힘없는 사람들의 생명이 유린당했던 순장의 풍습과 유물이 그대로 살아 있는 지산동 고분군이다. 이제 지산동 고분군은 1천500여 년이란 역사의 슬픔을 딛고 자유와 평등, 더없이 인권이 존중되는 오늘날 생명존중의 꽃으로 피어나게 되었다. 지산동 고분군과 순장에 얽힌 놀랍고도 신비한 이야기는 세계인들이 놀라는 스토리텔링으로 다시 태어나 소중한 우리의 관광자원으로 봉분처럼 우뚝 서게 될 것이다.

풀잎에 맺힌 이슬방울에 바짓가랑이를 적시며 주산을 내려온다. 이제 대가야의 지산동 고분군은 어둠 속에서 바라보던 비정하고 슬픈 역사의 현장이 아니다. 아침 햇살처럼 새로운 희망으로 가득한 생명의 보물창고다. 오랜 슬픔에서 깨어난 순장 무덤의 영혼들이 봉분 위로 솟구쳐 오르며 기쁜 함성을 지르고 있는 듯하다.


수상소감

먼저 대구일보와 부족한 글을 뽑아 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립니다.
‘코로나19’로 부서진 일상을 메고 혼자 산으로 바다로 많이 다녔습니다. 산에는 먼저 간 사람들의 못다 한 사연들이 살아 있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함께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끝내 내가 가야 할 곳도 청산이라는 것을 새삼 알게 됐습니다. 나에게 글쓰기는 언제나 두렵고 편치 않은 일입니다. 그만큼 내공이 부족하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이번 수상을 더욱 분발하라는 채찍으로 받아들이고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그동안 도움을 주신 모든 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2018년 경북문단 수필 신인상 △2019년, 2020년 경북 이야기보따리 공모전 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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