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수필 읽기

강을 말하다 / 김대성

부흐고비 2021. 11. 6. 08:59

가끔 강가에 나가면 낯설지 않은 향수가 물 위에 떠돈다. 먼 지난날의 기억인지, 아니면 알 수 없는 원초적인 인간의 감성인지 알 수 없는 느낌에 젖어 든다. 강이 어디에서 시작되어 어딘가로 흘러가는지 알 수 없다. 조급함도 없고 초조함도 없이 암묵의 언어를 품은 채 긴 시간을 두고 흐른다. 오늘도 수많은 인간의 삶을 담은 역사의 강은 흐르고 있다.

아득한 날에 하늘이 열리고, 땅이 펼쳐질 때 큰 비 내림이 강의 물길을 열었다. 강은 태초부터 인간 삶의 서식처였다.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더스, 황하문명의 발상지가 모두 강을 따라 이루어졌다. 인간이 지구상에 처음 출현해 안전하게 살 곳이 없어 노숙과 동굴 생활을 하다 마침내 강이 가까운 산기슭에 취락을 형성하고, 정착 생활을 하면서 인간 문명이 시작되었다. 강은 비옥한 토지와 생존의 터전을 만들어 준 인간 삶의 시원이며 탯줄이다.

인간의 삶은 개울과 강에서 시작된다. 아이들은 어릴적 어머니를 따라 개울가 빨래터에서 물장구를 치면서 삶을 시작한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이맘때쯤이면 마을 앞 강은 동네 개구쟁이들의 물놀이 터로 변한다. 아이들은 햇빛에 새까맣게 탄 몸뚱어리로 따가운 자갈 위를 파닥거리며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여름에는 강보다 더 좋은 놀이터가 없다. 강은 더위를 식혀주기도 하지만, 물속 바위틈이나 수초 속에 있는 물고기를 잡는 재미가 여간 솔솔하지 않다.

저녁이면, 강은 아낙네와 삼단 같은 머리를 한 아가씨들이 어둠 속에 숨어서 더위를 씻어내는 선녀탕으로 자리바꿈을 한다. 겨울이면 얼음이 구들장처럼 단단하게 얼어붙은 강에서 썰매를 타고, 스케이팅을 하는 겨울놀이터가 된다. 유년기의 강은 여름과 겨울의 강이고 계절의 강이다. 그 강은 깊어지는 인간의 삶에 따라 가슴의 강, 세월의 강으로 흐른다.

젊은 날의 강은 이제 어린 시절의 뛰놀던 물리적 공간이 아니다. 싱그러운 젊음이 어려 있고, 푸르른 희망과 고뇌를 담은 가슴의 강이다. 강가에 나가 어디론가 멀리 흘러가는 강물을 보면서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으로 가슴 설레고, 알 수 없는 그리움에 젖어 든다. 그 강 위에 가슴 저렸던 만남과 이별, 기쁨과 슬픔을 떠나보내기도 하고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의 긴 한숨도 띄워 보낸다.

강은 언제까지인지 알 수 없지만 인간과 끝까지 함께 할 것이다. 강은 인간이 존재하는 한 살아갈 양식을 줄 뿐만 아니라, 인생의 지혜를 알려 줄 것이다. 물길이 지나가는 길은 수많은 장애물로 가득하다. 천길 낭떠러지가 있는가 하면, 높은 절벽에 부딪치기도 하고 심연에 가두어지기도 한다. 강은 어떤 어려움에도 흐름을 멈추지 않는다. 강물은 넓은 평원을 만나면 흐름 속에 담아 왔던 인간의 오욕과 같은 온갖 것들을 침전시키고, 가볍고 맑은 모습으로 새로이 흘러간다. 인간의 삶이 어떡해야 하는지를 순절한 몸짓으로 가르치고 있다. 강 속에는 물만 흘러가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삶과 죽음도 역사도 함께 흘러가고 있다.

한 인간의 삶이 짙어지면 그 에겐 강은 이제 세월의 강으로 변한다. 온갖 풍상이 내려앉은 세월의 강이다. 강은 힘든 여정을 마감하고 바다에 가까이 이르면, 흐름의 속도가 느려지고, 긴 시간 속에서 생겨난 사유(思惟)의 부유물들이 이리저리 떠다닌다. 인간의 삶도 한 줄기 강과 같다. 깨달음은 언제나 마지막 순간에 온다. 산다는 것은 언제나 죽음에 이른다는 뜻이다. 삶이란 실체가 없다. 죽으면 그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아무 실체도 없는 삶을 왜 이렇게 힘들게 붙들고 살아야 하는지. 삶은 몸서리치는 윤회의 허망함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순간의 삶이라 할지라도 삶이 있으므로 사랑과 미움, 기쁨과 슬픔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축복이다.

강도 인생만큼 허무하다.

노회한 강의 모습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강과 바다가 만나는 포구에 가면 바다로 소멸하는 강의 모습이 처연하다. 고단함과 피로가 넓게 떠도는 강은 무기력하고 생명이 끝나는 거대한 몸뚱어리 같다. 인생만큼 강도 허무하다. 힘차고 선연한 아름다운 풍경이 넘치던 젊은 날의 강의 모습이 떠오른다.

강이 제 몸을 바다에 맡기고 떠나갈 때 저녁 하늘의 노을에 붉게 물든 새 한 마리가 한세상을 접는 듯 어디론가 날아간다. 강이 사라지는 곳에 인간의 삶도 잦아진다.

'수필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도암 / 김미향  (0) 2021.11.08
쑥버무리 / 김대성  (0) 2021.11.06
등대 / 정미영  (0) 2021.11.05
사람이 되는 방법 / 권재술  (0) 2021.11.04
향수라는 병 / 권재술  (0) 2021.11.03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