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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쑥버무리 / 김대성

부흐고비 2021. 11. 6. 09:02

바깥에는 솜털처럼 부풀어 오른 가로수 길 벚꽃들이 자욱하다. 하얀 초롱처럼 나뭇가지에 총총 매달렸던 목련꽃이 불가사리처럼 잎새를 늘어뜨리고 벌써 지고 있다.

조용한 거실에서 아내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고 있다. 간간이 들려오는 전화 소리를 들어보면 대화의 상대가 누구인지 대충 가늠을 할 수 있다. 친정의 식구인지, 친구인지, 일상의 일로 대화하는 사람인지 짐작이 간다. 친정 동기(同氣)간에 이야기할 땐 낮고 조용하고 애절하다. 친정 동기 중 맏이여서 그런지 아니면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갈수록 더욱 짙은 감정을 담아낸다.

근래 들어와서 아내가 부쩍 돌아가신 친정엄마 이야기를 자주 한다.

''나이가 드니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

''어려울 때 돈이 요긴 하더라. 돈을 중히 여겨라.''

''있는 옷만 해도 다 입지 못하는데 새옷 자꾸 사지 말어라''.

엄마가 자주 하던 이야기라며 내가 지금 그런 처지라며 혼자 말처럼 중얼 거린다. 옷장을 뒤져 오래된 옷을 꺼내 만져보고 입어보며 옛날에 비싼 돈으로 샀는데 아직 입어도 맵시가 난다며 이 옷 저 옷을 몸에 맞추어 본다. 아마도 엄마만큼 나이가 들어가는 때문인지 모른다.

가끔 느닷없이 친정 엄마가 돌아가시고 남긴 패물들을 친정 동기들이 큰 누나에게 준 것을 끄집어내어 펴 놓고 만져보고 엄마 생각에 잠긴다.

이른 아침에 갑자기 소리 없이 밖에 나가더니 햇쑥을 구해 와서 하얀 쌀가루에 버무려서 쑥버무리를 만든다. 쑥버무리는 어릴 적에 봄이면 먹었던 별미의 간식이다. 향긋한 쑥 내음과 단맛이 나며 쫀득한 식감을 주는 맛있는 먹거리다.

아내가 하얀 가루가 묻은 쑥버무리를 손에 움켜쥐고 와서 맛있다고 먹어 보라고 입에 가져다 댄다. 엄마가 어릴 때 이맘때쯤이면 해주던 맛있는 음식이라고 들뜬 목소리를 내며 다가선다. 먹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는데도 맛있는 듯 받아먹는다. 그렇지 않으면 섭섭함을 느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다.

거실에 혼자 앉아서 쑥버무리를 앞에 두고 연신 입에 넣는다. 입이 움직이는 모습이 흡사 ''엄마'', ''엄마'' 하는 것처럼 보인다. 갑자기 쑥버무리를 만든 것은 먹고 싶어서라기보다 엄마 생각이 나서 그런 것 같다.

친정어머니가 돌아 가신지가 9년이 지났다. 여든 넘으신 연세인데도 시골에서 주단 포목점을 하시면서 혼자 지내셨다. 어느 날 가게에서 바느질을 하시다가 아무도 모르게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5남매 자식들 중 어느 누구도 임종을 하지 못했다. 단 며칠만이라도 병석에 누운 어머니를 간호해 드리지 못한 한을 아직도 자식들은 가슴에 묻고 있다.

두 아들이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산소를 들인 후 거의 빠지지 않고 꼭 한 달에 한 번씩 꽃과 제물을 준비해서 시골에 모셔진 어머니 묘소를 참배하고 성묘를 한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기특하고 대견스럽다.

자식들이 더욱 어머니를 못 잊어 하는 것은 서른여섯의 젊은 나이에 남편을 여의고 혼자서 5남매를 기르고 가르친 형벌 같은 어머니의 삶을 보고 자랐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동기간에 우애가 남다르고 살갑게 지내는 것을 보면 항상 흐뭇한 마음이 든다.

처남들이 산소에 가는 날이면 가끔씩 바람도 쐬고 같이 가자고 해서 동행하기도 한다. 성묘를 마치고 처가 골목길에 들어서면 덩그런 집채만 우두커니 서 있다. 돌아가신지 10여 년이 되도록 비워 둔 채로 있어도 살아 계실 때 체취가 그대로 남아있다. 살아 계실 때 살림살이가 그대로 있다. 처남들이 성묘 올 때마다 집에 들러 세간살이며, 보일러를 점검하며 관리를 한다. 팔려고 내놓아도 시골에 인구가 줄어들어 팔리지가 않는다.

결혼하고 처음 처가에 오가며 쌓인 추억들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텅빈 골목길에 메마른 기억들만 남아있다. 그때는 사위를 보면 백년손님이라 해서 귀하게 여겨 가까운 집안에서는 이집 저집 돌아가면서 식사를 대접하곤 했다. 밤이면 집안 친척들이 모여 노래를 부르고 흥겨운 시간을 보내곤 했다. 지금은 많은 분이 모두 돌아가시고, 다른 곳으로 떠나가서 적막한 공간으로 남아있다.

이제 아내의 변해가는 모습은 친정엄마를 닮아가고 있고, 어머니가 살다 남은 삶을 이어가며 살아가고 있다. 남은 삶을 엄마의 삶과 일치시키고 있다. 가장 확실한 것이 어머니로부터 알게 된 삶의 체험들이기 때문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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