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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수도암 / 김미향

부흐고비 2021. 11. 8. 08:48

2021년 제12회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

한 줄기 산바람이 가슴을 파고든다. 깨침의 빛처럼 스며든 이 바람은 내게 무엇을 주고 무엇을 가져갈 것인가. 수도산 깊은 곳에 심장처럼 들어앉은 도량에 몸을 들인다. 공활한 허공에 문이 있다. 여래의 말씀도 각인되어 있다.

높은 계단을 오른다. 효색(曉色)에 싸인 삼층석탑(보물 제297호)이 환한 법등처럼 펼쳐진다. 태곳적부터 대적광전 앞에서 법문을 익혔으니 등불로 보이는 게 당연한지도 모른다. 들판에 묻히거나 길가에 박히지 않고 예서 근원이 시작된 게 천운이라는 생각이 든다. 불연을 맺고 빛으로 서 있는 모습이 흐트러짐 없는 수행자를 닮았다.

탑이 하나가 아니었다. 동서에서 두 개가 마주 보고 있었다. 언뜻 보기엔 쌍탑으로 보이나 형식이 다르고 높이도 달랐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처음부터 똑같이 만든 건 아닌 것 같았다. 긴 시간이 흘렀어도 탑신에 새겨진 작은 비로자나불은 금방 조각한 듯 뚜렷하다. 그 모습이 무언의 경구 같아 탁한 마음이 뒷걸음질 친다.

대적광전으로 걸음을 옮긴다. 대좌 위에 석조 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307호)이 묵중하게 앉아 있다. 오른손으로 왼손의 검지를 감싸 쥔 거대한 몸집에 압도되어 선뜻 들어서지 못한다. 꾹 다문 입술과 감은 두 눈은 깊은 사유에 잠긴 듯하고 어깨까지 내려온 큰 귀는 중생의 말에 귀 기울이는 듯하다.

안으로 든다. 다리가 불편한 한 남자가 비로자나불을 올려다보고 있다. 염주를 돌려가며 무어라고 나직이 읊조린다. 홀로 좌선하는 모습이 몇 줄의 경문보다 감동으로 다가온다. 등 뒤에 땀이 흥건하다. 무엇을 그렇게 비는지 스쳐 가는 길손이야 알 리 없지만 부처님은 다 헤아리고 있으리라. 오늘 밤, 꿈에서라도 부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한다. 삼배를 올리고 세상살이에 부대껴온 인간사를 털어놓는다. 부처님은 묵묵부답이다. ‘마음 닦는 일은 누가 해주지 않는다. 스스로 풀어 가야 할 숙제니라’라고 오랜 침묵으로 응답을 보여준다.

물러 나온다. 법당을 나와 석불좌상(보물 제296호)이 모셔진 약광전에 들어선다. 머리에 관을 쓴 모습이 낯설기는 하나 도드라진 짧은 코와 도톰한 입술, 얇고 길쭉한 귀는 인상적이다. 무릎 위에 두 손을 가지런히 얹어 보주(寶珠)를 잡은 손 모양도 특이하다. 눈은 세월에 마모되어 인자한 눈빛을 볼 수 없다. 이마에 박힌 희고 빛나는 백호가 사바세계를 비추고 있다.

절 마당으로 내려선다. 이 절을 창건(859년)한 도선국사의 석주가 두 탑 사이에 서 있다. 기다란 직사각형의 몸통 기둥과 머리 모양의 둥근 돌이 흡사 승려의 형상이다. 세월의 풍상에 깎이고 이지러진 석주가 삼매에 든 구도자의 모습 같아 세상에서의 날 선 마음이 무뎌진다. 문이 없는 마음의 문을 뚫기 위해 고행하는 수행자들의 모습도 저러하리라.

참선 도량을 서성인다. 흐트러진 마음으로 가지 않도록 부처님의 가피를 얻어 돌아선다. 몇 걸음 뗐을까. 수행 중이니 조용히 해달라는 붉은 글귀가 눈을 부릅뜨고 대문을 지킨다.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문을 열고 안을 살핀다. 절 마당 가장자리를 붙잡고 흐르는 맑은 물소리가 영롱하게 들린다. 물소리에 귀를 씻고 조심스레 발을 들여놓는다.

선방이 고요하다. 삼매경에 든 수행승들이 화두와 하나가 되어 치열한 구도의 길을 걷고 있으리라. 진정한 마음의 집에서 나도 묵언으로 돌아간다. 도시 생활에 길든 번잡한 마음을 꿇어 앉힌다. 자신을 가두어 나의 참모습을 돌이켜본다. 잠시지만 그새 잡념이 끼어든다. 암호를 푸는 것과 같은 어려운 좌선의 길을 달콤한 오욕에 빠져 사는 중생이 어찌 답을 구할까. 수행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화두가 풀릴 때까지 사위가 어둠에 묻혀도 불제자들은 눈을 감지 않을 것이다.

외따로 떨어진 낙가암에 간다. 작고 남루하다. 얼마나 채워 넣을까가 아닌 더 덜어낼 것이 없는가를 고뇌하는 여섯 평 남짓한 절집이다. 소박한 초막 앞에 걸음을 멈춘다. 어쩌면 암자라는 것은 세상과 멀어질 때 그 본질이 완성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곳에서도 도선이 심은 참선의 씨앗이 꽃을 피워가는 중이다.

까마귀가 암자 주위로 내려앉는다. 부처님의 말씀을 구하려는지 잠시 귀 기울이다 나뭇가지로 날아오른다. 그네에게 무엇을 깨달으라고 했을까. 까마귀들이 ‘까옥’하고 예를 갖춘다. 나무 쪼는 딱따구리 소리마저도 목탁 소리로 들린다. 내 앞에 있는 모든 것이 나를 다스린다.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 쉬울 리가 있으랴만 내 속의 분별심이 무너지고 본성을 알게 하는 이곳이야말로 진정한 선원이 아닐까. 김천에는 무욕의 눈으로 마음을 관조케 하고 세상의 소리를 멀리하는 참선도량 수도암이 있다.

수상소감

가을볕이 풍성한 날입니다. 수상을 축하한다는 메시지가 오늘 거둔 일 중에 가장 큰 결실이었습니다. 언제부턴가 글은 내게 위로로 다가왔습니다. 아프거나 기쁠 때, 생각이 삐죽이 곤두설 때도 글만큼 아파해주거나 기뻐해 주거나 다독여 준 이는 없었습니다. 글은 언제라도 들어가 쉴 수 있게 끔 열린 공간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쓴 내 글에서 날마다 곰삭아가는 자신을 만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중천에 걸린 보름달이 격려하듯 내게 말합니다. 이 작은 상이 한줄기 빛이 될 것이라고. 부족한 글 선에 올려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립니다.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 2020 대구일보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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