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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희망의 숲 / 김태호

부흐고비 2021. 11. 14. 18:41

2021년 제12회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

대가야 숲길을 걷는다. 산이면 보통 산인가. 오백 이십 년간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대가야의 왕과 귀족들이 이곳에 묻혔다. 낙타 등같이 봉긋봉긋 솟은 칠백여 기의 왕릉과 묘가 즐비하다.

주산성에 올라 능선을 타고 미숭산을 향해 한참을 오르면 삿갓봉 정상에 우륵 선생이 가야금을 탔다는 정자가 보인다. 이름하여 ‘청금정(聽琴亭).’ 청금정에서 내려다보면 북동쪽 골짜기엔 거대한 우륵지(于勒池)가 눈에 들어온다. 우륵지 아래로 정정골이라 불리는 가얏고 마을이 펼쳐져 있고, 그곳에 대가야의 후손들이 팽이버섯처럼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다. 가얏고 마을 바로 옆에 가야금을 형상화하여 지은 우륵박물관이 장엄하게 그 위용을 자랑하며 우뚝 서 있다. 보이지 않지만 냄새로, 때로는 결로 살아서 꿈틀대는 숲은, 수억 년 전 인간이 이 땅에 발을 딛는 순간부터 인간의 아릿한 본성의 근원으로 변함없이 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리라. 살면서 삶이 팍팍하다 느낄 때, 모질고 거친 삶이 힘겨울 때, 내가 이유 없이 숲을 찾아 떠나는 이유도 어쩌면 내 본성의 근원을 찾고픈 자연스러움이 아니었을까. 엷게 피어오르는 새벽 숲의 안개를 비집고, 빛이 온 누리를 비추자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은 거룩한 아침의 상념에 사로잡힌다.

40년 몸담았던 교육계를 은퇴한 후, 한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침을 거르면서까지 빠듯하게 지켜내야 했던 출근시간과 정신없이 돌아가던 일상들, 나를 웃게 하던 아이들의 조잘대던 목소리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마음은 아직 청춘인데 나는 어느새 길을 잃어버린 새처럼 무의미한 일상들을 보내야 했다. 행복이 사라지고 삶에 걱정과 두려움이 일었다. 가끔 찾아오는 모임도 한두 번 참석으로 식상해지기 일쑤였다. 장성한 자식들은 각자의 삶을 쫓느라 나를 돌아볼 겨를이 없는 듯했다. 입맛이 사라지고 불면이 찾아오고 체중이 줄었다.

“당신 요즘 어디 아프세요?” 아내의 물음에 입맛이 없을 뿐이라는 대답이 전부였다.

어느 아침, 신발장에 진열된 낡은 등산화를 보게 되었다. 그렇게 좋아하던 산이 어두운 신발장 속에 잠들어 있었다. 발을 넣어보니 산을 오르듯 마음에 평화가 깃들기 시작했다. 나는 그 길로 집을 나섰다. 앞산을 오르고, 그 뒷산을 오르고, 그 너머에 있는 산들을 하나하나 오르기 시작했다. 종일 숲 살이를 하고 돌아온 후면 하룻밤 거뜬히 푸른 잠을 잤고, 입맛이 돋아 한 공기 뚝딱 밥을 비웠다. 젊은 시절, 산을 좋아해서 자주 숲을 찾았지만 나무, 풀, 새, 바람들이 뿜어내는 심오한 의미들을 읽을 수는 없었다. 건강 회복을 위해 사람들이 산속에서 치유를 하는 모습이나 일상을 떠나 산사의 템플스테이로 쉼을 얻는 시민들에 대한 소식을 자주 접해왔지만, 숲의 본질이 생명이라고 느끼기에는 내 혜량이 부족했기 때문일 테다.

내가 봉사활동을 하는 고령 대가야읍 문화누리 공원에는 얼마 전에 ‘희망의 숲’이란 느티나무 숲길이 만들어졌다. 어린 학생들이 기증한 나무에 소망을 기록하고 꿈을 키워가는 숲이라 유난히 관심이 많이 간다. 나무 둘레에 어린 손으로 희망을 빼곡히 써놓은 모습을 볼 때, 괜히 가슴이 뜨거워지곤 한다. ‘숲에 우리의 미래와 희망이 있다. 우리가 좋은 공기를 마실 수 있는 건 너(숲) 덕분이란 걸 잘 안다. 많은 사람을 도와주는 너처럼 나도 무럭무럭 자라 세상의 든든한 버팀목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될게. 무럭무럭 자라자!’ 내 고향의 후학들이 대가야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나무에 희망을 기리며 장차 이 나라의 기둥이 되겠다고 다짐하는 숲의 모습이 뭉클하게도 느껴져 온다. 숲 속에서 마음을 다지며 꿈을 좇아온 내 유년의 모습을 그들 가운데서 보았기 때문이다. 또 숲으로 인연하여 만난 어린 후학들이 내 고향을 더욱 울창하게 우거지도록 했으면 하는 염원이 깃들어 있어서이기도 하다.

몇 해 전 중국 여행 때 시성 백거이의 묘를 보고 경탄을 금치 못했었다. 묫등에 벌초는커녕 아름드리 소나무가 푸르게 자라고 있었다. 안내자의 말에 의하면 고인은 천년의 미래를 내다보고 “내 무덤에 벌초를 하지 말라! 나는 죽어서 자연으로 돌아가리라!”라고, 선견지명을 예언한 것, 푸르디푸른 낙락장송이 내 마음을 후벼 팠다.

숲은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며, 내 삶의 희망이자 목표였다. 또한 내 마음의 힐링 공간이다.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정답이 아닐까. 나도 자식들에게 이 세상을 떠나는 날 수목장(樹木葬)을 하도록 유언하리라. 숲이 있는 곳에 길이 있고 그곳이 삶을 살아가는 데 이정표가 된다면, 숲을 멀리하는 만큼 내게 나쁜 결과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이제 철이 들고서야 알 수 있었다.

숲에서 눈을 돌려 다시 발을 담근 개울물을 바라본다. 스쳐가는 바람에 일렁이며 흐르고 있는 물은 산을 에돌아 또 다른 골짜기나 대지로 뻗어나갈 것이다. 쉼 없는 산속의 물결 사이로 지나온 시간뿐 아니라 다가올 시간들도 그려보게 된다. 숲 많은 고향 산천에서 도회지로 나와 사회 활동을 했고, 퇴직 무렵에 다시 본향의 숲으로 회귀한 시간들이 물결 사이로 스쳐간다. 좀 더 많은 시간을 숲과 함께하며 그 생명을 나누는 일로 노년의 삶을 산 빛으로 물들여 가리라.

새벽 걸음으로 산을 오르던 첫 마음과 달리 곧 하산을 하며 물줄기처럼 내리 흘러가야 할 시간도 다가올 것이다. 단풍이 든 산길에서 더 풍성한 노년의 노을을 보고 싶은 기대가 다시 숲길로 나를 이끈다. 초록으로 우거진 숲에서 또 다른 길을 찾으며 발걸음을 재촉한다.

수상소감

아파트 정원의 단풍이 곱게 물드는 가을입니다. 아무리 코로나가 기승을 부려도 계절은 어김없이 찾아오는가 봅니다. 여름 내내 창가에 매미가 울어대더니, 어디로 갔는지 지금은 조용합니다. 대신, 파란 가을 하늘에 고추잠자리 떼가 고공비행을 하며 멋진 묘기를 자랑이라도 하듯 날아다닙니다. 520년 간 찬란한 문화를 꽃 피웠던 대가야의 수도 고령에도 가을 빛이 서서히 익어갑니다. 아울러 5년 전에 고사리손으로 느티나무를 심은 ‘희망의 숲’에도 가을이 물들고 있습니다. 앞으로 강산이 한번 바뀔 때면 그 꿈을 이루고, 행복의 보금자리를 찾아 둥지를 틀겠지요. 코로나19로 ‘집콕’하면서 여름에 보낸 편지가, 당선이란 답장의 메시지로 날아왔네요. 참으로 가슴 뛰게 하는 소식입니다. 오늘따라 가을 하늘이 더 맑아 만 보입니다. 선을 해주신 심사위원님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문장’ 신인상 등단 △수필집 ‘낮달’외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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