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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나선형의 등 / 조옥상

부흐고비 2021. 11. 17. 08:29

2021년 제8회 경북일보 청송객주문학대전 은상

달팽이가 더듬이를 내밀었다. 사방이 풀밭인데 어디로 가는 걸까? 제 등을 옮기자니 한나절이다. 달팽이가 기어가는 길은 위험천만이다. 빠르게 이동하는 개미떼가 아무리 부러워도 눈길 한번 줄 수 없다. 잠시도 해찰부릴 수 없는 달팽이는 아무도 등 떠밀지 않았음에도, 이 세상을 기도하기위해 구도자의 길을 나선 어느 수도자와 비슷하다.

나선형의 등을 지고 다니는 달팽이는 르네상스시대의 건축양식을 능가한 전위예술가요, 타고난 재주 또한 기묘하다. 아름드리나무에 빨판처럼 달라붙어있는 밀착성에 더하여, 곡예사처럼 유리벽을 오르내리는 아슬아슬한 면모(面貌)를 보여준다. 이러한 달팽이도 남몰래 흘리는 눈물이 있다. 그 눈물은 다소 짭조름하다. 달팽이도 한때 바다가 고향이었기 때문이다.

비개인 오후 상추밭에 쪼그리고 앉았다. 더듬이를 내민 달팽이와 눈을 맞추려고 고개를 숙였다. 오지게 느린 달팽이와 눈이 마주치자 가랑비에 젖는 옷처럼 느림의 미학에 빠져든다. 누가 한말인지는 모르겠으나 “문명인들의 안위를 담보하지 못하는 자연이 동물들의 예술이라면, 예술은 인간들의 자연”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언어로 소통할 수 없는 미물이지만, 서로가 유기(有機)된 관계처럼 달팽이가 던져주는 고유의 메시지는, 어떤 의미에서는 나 같은 우둔한자가 인격적 질문을 던지게 하는 철학의 한 맥락이지 싶다.

미물과도 정이 드는 법이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걱정된다. 이런 마음을 아는지 녀석은 오늘따라 더듬이를 길게 내밀고 주위를 살핀다. 방 빼라고 할 때까지 눌러 살겠다는 그런 시그널 같다. 천적으로부터 방어할 능력을 갖추지 못한 달팽이, 살아남기 위한 비장의 무기도 뼈도 없는 연체동물이 생태계에 여직 살아 있다는 것이 놀랍다. 노자(老子)의 말이던가, “부드럽고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말.

나도 달팽이처럼 목을 들이밀고 나오기 싫었던 때가 있었다. 사회가 무서워 주위를 기웃거리는 주변인처럼 한동안 정착하지 못했다. 달팽이도 위험을 감지하면 제 껍데기 속으로 더듬이를 밀어 넣는다. 단절된 풀과 나무와 타협은 없다. 바깥이 무서울수록 캄캄하여 밟히면 밟힐 것이요. 장대비에 떠내려갈 수도 있다는 유장한 각오에 사활을 건 순간, 말간 몸을 갈마안고 광대무변한 우주의 이치를 가만가만 듣고 있었을 테다. 하여 자연친화적인 교훈은 간결하고 신선하다는 것을 암암리에 터득하였을지도 모른다. 미물들의 촉각과 촉수는 사람의 오감보다 한 수 위라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니다.

스카이차를 방불케 하는 달팽이의 더듬이는 진화될 조짐이 없어 보인다. 늘여터지는 자세만을 고집하며 풀잎을 갉아먹고 그저 흙에서 뒹굴다가, 나선형의 등을 지고 표지판 없는 밭이랑을 느릿느릿 넘어가는 숙명을 즐긴다. 달팽이를 관찰하노라면 미물의 세계가 무념무상의 신세계처럼 느껴진다. 이러한 사색은 내 안의 적을 직시하는 순간이요, 인간이 인간다운지에 대한 이성적 반성을 할 수 있는 시간이다.

인간이라는 오만에서 미물에게 위로받고 싶은 몸짓은 유치할수록 순수하다. 이러한 사고(思考)는 자연에 기인되었을 때 심오한 깨달음을 얻기 때문이다. 풀잎에 반짝이는 물방울처럼 제 몸을 추스르며 조물주를 찬미할 줄도 아는 달팽이, 사람처럼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는 미물들의 각혼, 달팽이의 등으로 배어드는 풀숲 향기가 값진 물상(物象)이 되었음이다.

달팽이의 보폭처럼 느림의 미학을 좋아하던 친구가 있었다. 이 세상을 위해 기도하는 구도자가 되겠다며 수도원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친구를 붙들어 앉힐만한 설득력이 궁했다. 여자라면 결혼해서 아이 낳고 사는 삶이 중용(中庸)의 길이라고 어쭙잖은 충고를 했다. 힘들었던 유년시절이 세상을 기피하려는 돌파구를 파놓은 게 아니냐는 말에 친구는 피식 웃었다. 친구는 복잡한 가정사를 피하지 않고 직면했다. 화려한 옷을 입지 않아도 단아하고 환한 얼굴이었다. 군중 속으로 걸어 나오지 않고 침묵하는 동안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덕을 쌓은 것이다.

세상이 위대하게 굴러가는 것은 혼자지만 여럿이서 이루어낸 조화다. 누군가는 이타적인 삶을 살고자 무거운 짐을 기꺼이 지고 가는 몫을 택하고, 누군가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더 안일하게 살기를 원한다. 나의 속성은 후자에 속한다. 고정관념을 깨지 못하는 겁쟁이요, 낯선 곳을 향해 도전하기 두려운 불안증을 탈피하지 못하고 그 자리만 서성인다. 미물이지만 제 숙명을 가꾸며 소신을 쌓아올린 달팽이와는 한참 다르다. 벽을 넘어야 할 때 시도도 하지 않고 주저앉는다는 것은 자신을 믿지 못하는 자존감 부재다. 대체적으로 소심한 나와는 달리 친구는 장애물을 뛰어넘는 작은 거인이었다.

수도원으로 떠난 친구가 그리워질 때마다 퍼 올리는 우물이 있다. 퍼낼수록 맑은 물이 솟아오르는 생명수 같은 우물, 비단 신앙을 운운하는 것이 아니다. 친구는 초월자였다. 사사로운 정에 흔들리거나 천륜이라는 인연의 고리에 얽매이지 않았다. 인문학을 두루두루 섭렵하더니 통찰의 경지에 이르렀던 것이다. 친구는 낮은 자리에 앉아 높은 겸손을 말했다. 수도자의 길에서 얻는 것들이 너무나 평범한 일상이지 결코 고행의 길이 아니라 했다.

요즘 들어 달팽이를 자주 나가보는 이유다. 이 세상 근심 켜켜이 지고 걸어가는 수도자의 등과, 나선형의 등을 지고 기어가는 달팽이가 별반 다르지 않아서다. 친구는 세상 모두를 위해 기도한다. 그가 떠난 자리에 강산이 여러 번 변했지만,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끝난다는 소식을 가뭄에 콩 나듯 들을 뿐이다. 누군가를 칭하며 기도하기 보다는 모두를 위해 기도한다는 구도자의 함축적인 말이야말로 진정한 밀알이 될 것이다. 상추밭 달팽이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나선형의 등을 지고 또 어디로 가는 걸까, 끈끈한 깨달음을 묻혀놓고 떠나가는 달팽이가 그저 고맙고 가상하다.

수상소감

여름내 입을 막아주던 마스크가 가을까지 건너갈 모양입니다. 절제된 말 덕분에 눈이 밝아졌는지 아파트울타리 너머 애호박 꽃이 예쁘게 보이는 나날입니다. 어스름이 깔린 시간에 반가운 소식을 접했습니다. 간절함 뒤에는 부끄러움이 따르는 법이지요. 부족한 글을 눈여겨 읽어주신 심사위원님과 행사에 관련해 수고하시는 선생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2013 평사리 토지문학상 수필 대상, 2013 건양대학교 수기공모전 수필 대상, 2014 천강문학상 수필 우수상, 2015 보훈문예공모전 추모헌시 최우수상, 2017 경북일보문학대전 수필 가작, 2017 이지웰 가족사랑 수기 대상, 2019 독도문예대전 시 입선, 2019 경북일보문학대전 수필 가작, 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 2021 경북일보문학대전 수필 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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