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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제8회 경북일보 청송객주문학대전 동상

어제의 아련한 기억들을 더듬고 싶을 땐 살포시 눈을 감아야 한다. 눈을 감는다는 건, 머릿속에 새겨 두었던 망각의 흉터에 불을 지피는 것과 같다. 늦가을 만추에 고향집을 간만에 찾았다. 성글게 추억이 깃든 문간방 쪽마루에 비스듬히 기대어 두 눈을 살포시 감아본다. 찰나의 순간, 어제의 환영(幻影)들이 나를 뭉텅이로 데려가기 시작한다.

유년시절 나는 행랑채 서까래 기둥에 등을 기대고 멍하니 마당 언저리를 두리번거리는 야릇한 버릇이 있었다. 마당 오른쪽 툭 튀어나온 둔덕에는 장독들이 정갈스레 옹기종기 놓여있었다. 아침이 되면 햇살은 감나무 잎사귀 사이로 간신히 헤치고 나와, 나지막한 흙 담장 위를 뛰어넘어 싸리나무 울타리 우듬지에 가뿐히 내려앉았다. 실낱같은 햇살줄기는 자신의 존재를 그저 드러낼 뿐 내 의식세계의 지엄한 질서 속에 오롯이 갇혀 있었다.

사랑채에 맞닿은 헛간 안쪽모서리 구석진 곳에는 맷돌과 쟁기들이 정겹게 어울려 쉼 없이 노닥거렸다. 안채와 사랑채에 이웃한 뒤뜰에는 땔감용 장작과 짚풀더미가 어른 키만큼 봉긋 솟아있었고, 장작에서 풍겨져 나오는 농익은 송진 내움이 마당 이곳저곳을 맴돌 듯 굴러다녔다. 먹이 찾아 나선 삽살강아지도 늘 이곳에 오면 잃어버린 어제를 찾기 위해 낑낑거리며 한참을 서성댔다. 우리 집 앞마당 질서는 향내조차도 차분하게 늘 제 자리를 옹골차게 지켰다.

이웃집과 경계는 흙과 볏짚을 버무려 만든 흙 담장이었다. 자갈이 듬성듬성 흙담 속에 섞이긴 했지만, 그 위에 다시 볏짚을 양옆으로 엮어 만든 매듭은 지붕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이런 고풍스럽고 고즈넉한 모습은 운치나 멋이란 낱말과 섞어 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반듯하고 야무졌다.

동네 어귀 당산나무를 에워싼 제법 큰 공터는 아이들의 쉼터였다. 모진 풍진으로 갖은 풍상을 다 겪었을 당산나무는 동네의 영욕을 가슴속에 나이테로 오롯이 새겨 놓았으리라. 이런걸 아는지 모르는지 천진난만한 악동들은 여기저기서 비석치기며 땅따먹기 구슬치기 자치기 팽이돌리기로 해거름을 잊곤 했다. 잡히지도 보이지도 않는 어제의 아릿한 모습은 이같이 두 눈을 감아야 보인다.

대청마루에서 감았던 두 눈을 살며시 실눈으로 뜨자마자, 어제의 전경들은 아침햇살에 게 눈 감추듯 눈처럼 사르르 녹아버린다. 기억 속 검붉은 장독도 흙 담장도 당산나무도 내 눈 앞에서 사라져간다. 어제의 호젓하고 고즈넉한 분위기는 온데간데없다. 뜬 두 눈앞에 보이는 거라곤, 초가지붕이 슬레이트로 바뀌었고 흙 담장은 볼품없는 시멘트 블록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활기로 넘쳤던 동네 초가들은 거의 폐가로 변했고, 고향집 떠나던 날 마지막으로 봤던 동네어귀 서낭당에는 고압전신주가 터를 잡고 주인노릇하고 있다. 혹시나 하고 마음 졸였던 싸리 울타리 텃밭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쪽을 차마 고개 들고 쳐다보기가 민망하고 겸연쩍다. 세월을 한탄하듯 깊은 정막의 숨소리가 빈집 곳곳에서 새어나온다. 동네의 지엄한 질서와 활력은 먼 나라의 엘리스 얘기가 되고 말았으니.

인기척으로 동네를 희떱게 호령하던 어르신은 온데간데없고 싹싹하고 애교 많은 촌로(村老)들만 이곳저곳에 어른거릴 뿐이다. 명주 두루마기 한복이 아니라 알록달록한 아웃도어룩으로 바꿔 입었다. 어제를 대하기 창피하여, 낯 들고 나서기가 쑥스럽고 멋쩍다.

상실과 허무가 폐부로 엄습해 오더니, 내 어제를 무더기로 없애버린다. ‘아뿔싸, 오호애재’란 말이 목에 걸려 빠지질 않는다. 내 영혼 속에 아스라이 저장되었던 옛 모습은 사라져 흔적조차 찾기 힘들어졌다. 어쩌면 좋을꼬. 기억 속에 옹골차게 눌려 붙어있던 어제의 편린들이 ‘뜬 두 눈’의 풍파를 이기지 못한 게다.

오직 두려운 것은 망각의 굴레다. 망각은 내 기억을 송두리째 먹어치우는 독충과도 같다. 그렇지만 기억의 조각들은 언제나 내가 두 눈을 감았을 땐, 어김없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어느 누구도 눈 감는 내 어제의 나래를 꺾지는 못하리라. 내 주권이 미치는 나만의 튼실한 공화국이니 말이다. 그곳엔 내 영과 혼이 미치는 유일한 영토가 아니던가. 시린 기억이 내 실눈 사이를 드나들 듯 망각이 떠난 곳엔 어제의 잔영들이 봄날 벚꽃처럼 흩날린다.

두 눈을 부릅뜨고 하늘을 쳐다보니 손대면 닿을 듯 말 듯 파란 하늘에, 은빛 뭉게구름이 ‘어제’의 나를 싣고 시름없이 떠간다.

수상소감

장기성 : ‘한국수필’ 등단. 매일신문 ‘每日시니어 문학상’ 당선(2018년 및 2019년). 수필집 ‘설렘이 삶을 다듬다’. 한국수필가협회, 대구문인협회 회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명예교수(현)


벌써 가을이 다가왔다. 가을은 내 곁에 늘 혼자 오지 않았다. 단풍과 더불어 풍요를 선사했다. 올 가을도 예외는 아닌가 싶다. 가슴 떨리는 연인을 내게 안겨주었으니 하는 말이다. 세월의 무게만큼이나 진한 감흥이 더 크게 느껴진다. 적잖은 시간 동안 글쓰기를 해왔다. 지금껏 글쓰기는 객관성과 논리를 담보하는 글쓰기였다. 팩트(fact)없이는 한 문장도 쓸 수 없는 써서도 안 되는 거대한 타지마할이 내 앞에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학술적 글쓰기가 글쓰기의 전형으로 알고 살아왔다. 이런 글쓰기를 뒤로하고 내가 보는 시선으로 내가 느끼는 감정으로 글쓰기를 시작한지는 불과 몇 년 전이다. 수필이었다. 첫 걸음마를 떼기가 두려웠다. 애송이요, 논산 신병교육대의 훈련병과 진배없었다. 아직도 사실 힘에 부친다. 새 출발은 늘 어렵고 힘들지만 설렘과 두근거림이 동반되지 않던가. 이번 가을이 끝이 보이지 않던 저 먼 해원을 손에 잡히는 당선(當選)이란 연인을 만나게 해주었다. 이제는 내 생각과 내 표현으로 그녀와 함께 한 발짝씩 새로운 글쓰기로 다져가고 싶다. 축 쳐진 어깨에 서광이 비춰짐을 몸으로 느껴진다. 어쭙잖은 글을 예쁜 시선으로 봐준 심사위원들이 그저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다. 깊어가는 가을에 봄꽃이 움트는 기상으로 사뿐사뿐 그쪽으로 다가가고자 한다. 벌써 가을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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