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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고구마 아저씨 / 남명모

부흐고비 2021. 11. 19. 08:34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 오후였다. 책상 위에 얹어둔 휴대전화가 요란스레 울렸다.

“고구마 아저씬가요?”

곱고 앳된 여인의 목소리다. 고구마 아저씨라니! 잘못 걸려온 전화라 여기고 끊고 보니 언뜻 집히는 데가 있었다.

지난해 가을이었다. 밭에서 고구마를 캐고 있는데 할머니 한 분이 찾아와 “너무 좋다! 너무 좋다!” 탄성을 지르며 한 박스만 팔라고 했다. 그 해엔 조금밖에 못 심어 우리가 먹기에도 부족했는데 칭찬에 넘어간 아내가 딱 한 박스만 팔자고 했다. 지금 산책 중이라는 할머니는 저녁 일곱시 정각에 자기네 아파트로 가져오라며 주소를 알려주었다.

약속 시각에 맞추어 빛깔 좋고 잘생긴 녀석들만 골라 담았다. 이날 하필이면 손수레를 집에 두고 와 2km가 넘는 곳까지 상자를 어깨에 메고 끙끙거리며 찾아갔다. 15층까지 올라가 인터폰을 눌렀으나 대답이 없었다. 외모도 반듯하고 기품도 있어 보이는 할머니라 설마 실언이야 할까 하고 전화번호도 알아두지 못했는데….

주인 없는 집 앞에서 무턱대고 기다릴 수 없었다. 상자를 다시 메고 돌아오려니 맥이 풀려 한발짝도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누구에게라도 팔아버리려고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아파트 출구로 내려갔다. 이 사람 저 사람 붙잡고 고구마 사라고 하니 뜨내기 장사꾼 취급하며 곱지 않은 눈총만 보내고 지나갔다. 내가 팔고 싶어 온 것도 아니고, 사정사정해서 왔는데 이게 무슨 꼴인가. 고구마 상자를 동댕이쳐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때 자동차 앞에서 노트북을 들고 서성거리던 젊은 새댁이 손짓하며 다가왔다. 얼른 상자를 열어 보였더니 고구마 몇 개를 집어보며 반색을 했다.

“세상에! 세상에! 이렇게 예쁜 고구마는 처음 봐요!”

자기가 사겠다며 지갑을 열었다. 편한 원피스 차림의 그녀는 소녀처럼 발랄했다. 피자나 햄버거 따위나 먹고 자랐을 젊은이가 고구마를 보고 좋아하는 모습에 거저라도 주고 싶었다.

고구마는 보관이 까다로운 식물(食物)이다. 높은 온도에서 저장하면 속이 물러져 맛이 떨어지고, 냉장고 속이나 10도 이하 저온에서는 냉해를 입어 썩어버린다. 예쁜 모양에만 끌려 무턱대고 사가는 새댁에게 마지막 한 개까지 맛나게 먹이고 싶었다. 얼른 볼펜을 꺼내‘고구마 보관하는 법’을 메모해서 상자에 넣어 주었다. 혹시 고구마에 이상이 있으면 연락하라고 여백에 전화번호도 적어주었던 기억이 그제야 떠올랐다.

‘아하! 내가 바로 그 고구마 아저씨구나!’

고구마에 무슨 문제가 있었나, 궁금하기도 해서 방금 온 번호를 눌렀다. 뜻밖에도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고구마 정말 명품이었어요!”

지금처럼 눈이 오는 날은 더 맛있다며, 내년에는 미리 세 박스를 예약한다고 했다. 누구 땅인지도 모르는 버려진 공터에서 소일하는 나를 고구마 전문 농사꾼으로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무려면 어떠랴. 우리 고구마가 세상에 둘도 없는 명품이라는데.

이듬해엔 그녀를 염두에 두고, 고구마를 좀 넉넉히 심었다. 가을이 되어 고구마 캐는 날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난데없이 택배기사를 보내겠다는 답이 왔다. ‘명품 고구마’ 열 박스를 서울에 사는 친구들에게도 고루 나누어주고 싶다는 것이다. ‘열 박스나!’

마음을 나눌 친구가 열 명이나 된다니…, 나에게는 그런 친구가 몇 명이나 있을까? 겨우 손가락 한두 개 꼽다가 그만두고 말았다.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 밭의 고구마가 그만한 분량이 될는지 알 수 없어 대답을 못 하고 있는데 그녀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나한테 보내는 택배기사는 자기가 늘 거래하는 분인데 열 박스의 택배비까지 이미 선지급했다고 한다. 내가 키운 농작물을 이렇게까지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모든 것 다 접어두고 평생 농사만 지어도 좋을 성싶었다. 차마 거절할 수 없어 열 박스를 다 보내기로 했다. 박스 하나하나마다 꼼꼼하게 정말 명품이 될만한 고구마로만 골라 채웠다. 보석 같은 새댁의 우정도 함께 담기는 것 같았다.

가까스로 명품 열 박스를 만들고 나니, 정작 우리가 먹을 건 못생기고 비뚤어진 부스러기만 남았다. 마치 옛날 농부들이 돈을 사기 위해 고르고 남은 지스러기만 먹던 그 시절의 고구마 아저씨가 된 것 같았다. 하지만 고구마를 받아보고 기뻐할 새댁의 열 친구를 생각하니 내가 못 먹는 건 문젯거리도 아니었다.



남명모 : 《수필 춘추》 등단. 김포문학상, 경인지역 테마 편지쓰기대회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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