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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너 자신을 증명하라 / 박현기

부흐고비 2021. 11. 23. 08:33

아버지는 다섯 권의 시집을 남기셨다. 그중 1952년에 발간한 ‘전설’이란 시집은 말로만 듣다가 얼마 전 온 집안을 다 뒤져 겨우 한 권을 찾았다. 아버지 이십 대 초반이니 칠십여 년이 흘렀는가 보다. 육군방공포병학교 정훈부에서 발행했는데 등사판 포켓용이다. 손바닥만 한 것이 누렇게 변색되어 금방 바스라 질 것 같다. 당시 포병학교장이던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의 주역 김계원의 발문이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나머지 네 권도 정식으로 인쇄는 했지만, 오래되어 많이 낡았다.

어린 시절 나도 시인이 되고 싶었으나, 여러 사정과 열정의 부족으로 꿈은 그냥 꿈으로 일찌감치 끝났다. 지금까지 아버지의 시를 찬찬히 음미해가며 정독한 적이 거의 없다. 아버지의 시는 대부분, 젊은 내게는 식상한 그저 그런 단어와 발상으로 채워져 있기에 건성으로 훑어보고 말았다. 대놓고 말하진 못했지만, 때로는 이것도 시라고 썼는가 무시하기까지 했다. 치기 만만하고 겉멋만 잔뜩 들었던 젊은 날의 나는 매사가 불만이었고 폭발 직전의 활화산이었다. 언어와 감성의 칼날이 새파랗게 살아 현실을 파고드는 시가 시다웠고 문장에서 피가 뚝뚝 흘러야 멋있어 보였다.

내가 소속한 고향의 문학단체가 올해 연간집을 발간하면서 아버지를 특집으로 싣기로 했다. 작고한 향토 문인들을 소개하고 추모하자는데 의의가 있다. 회원 모두 내가 그 어른의 아들임을 알기에 기본적인 자료를 요구했다. ‘예’라고 대답은 했으나 막상 아버지에 대해서 아는 게 없다. 가지고 있는 시집 이외에는 하다못해 육필원고 한 장도 없으며 아버지의 시 세계를 깊이 탐구해보지도 않았다. 어릴 때는 같이 살지를 않았으니 아버지와의 정서적 교감이 없었고, 자라서는 서로 살기 바빠 일상적인 안부나 묻는 게 고작이었다. 대단한 어른이라며 고향 사람들과 회원들이 추켜세울 때마다 내가 그 어른의 아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자괴감이 든다.

아버지는 내게 먼 산이었다. 그 산은 늘 웅장하고 높았다. 숲에 들어가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멀리서 그림자만 보며 자랐다. 내가 주워온 아들도 아니요 천형을 타고난 것도 아닌데, 이미 양자 주기로 작정했음인지 좀체 품을 내주지 않았다. 아버지는 고향 군(郡)내에서 명성이 자자했다. 지역유지라든지 관공서 근무하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어느 동네 누구 아들이란 소리는 보이지 않는 압박이요 구속이었다. 먼 산 그림자일지라도 아버지 이름에 먹칠을 하고 싶진 않았다. 집안 식구 누구도 성적표 보자는 사람이 없어도 모범생이 되어야 했고 이웃 동네 놀러 가서도 행동거지에 신경을 써야 했다. 잘하진 못해도 아버지의 명예를 실추시켜서는 안 될 일이었다. 좀은 불편했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나는 시인인 아버지를 존경하는 착실한 아들이었다.

스무 살 무렵의 일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그때 나는 무작정 글이 쓰고 싶었다. 오로지 글 쓰는 인생을 갈망했다. 문예창작과를 진학하려 했으나 입학금을 줄 형편이 못 된단다. 내가 벌어서 가리라 생각하고 돈벌이 나선 곳이 대구의 화공약품상 점원이다. 잠깐 스치는 천직(賤職)이라 생각했던 것이 어쩌다 보니 이젠 천직(天職)이 되었다만, 기어서 들고나는 사글세 단칸방에서 배달이나 다녀야 하는 나 자신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나는 원고지를 세로로 놓고 편지를 쓴다.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편지를 썼다. 아마 열 장쯤 됐을 거다. 삶과 꿈을 아버지에게 얘기한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아버지의 답장을 받은 나는 절망했다. 하얀 백지에 단 한 줄, “너 자신을 증명하라.” 이것뿐이었다. 간결한 문장에도 절망했지만, 광활하게 펼쳐진 백지의 여백이 내 미래와 겹쳐지면서 나를 더욱 외롭고 쓸쓸하고 눈물나게 만들었다. 열심히 살라는 의미인 것은 알겠는데, 글을 계속 써야 할지, 인생을 어떤 색깔로 채워야 할 지에 대해선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다. 너무 막막해서 되물어볼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조그만 편지지의 짧은 문장과 엄청난 여백만 가슴에 소용돌이쳤다. 나는 적어도 아버지가 문학과 인생에 대하여 따뜻한 격려와 함께 좌표 정도라도 설정해 줄줄 알았다. 그런데 뜬금없이 너 자신을 증명하라니 뭘 어떻게 증명하란 말인가? 섭섭하기 짝이 없었다.

결혼을 한 서른 즈음부터 오로지 살아남는 일에만 몰두했다. 글에 대한 열정도 시들해졌고 부자간의 인연은 단지 의무로만 느껴졌다. 아버지의 시는 더욱 보지 않았다. 시간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내가 편찮으신 아버지를 모시고 전국의 병원을 다닐 때나 장거리 출장을 모시고 갈 때도 사는 이야기나 문학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시대나 환경에 연연하지 않고 심지어 투병 중에도 아버지는 여전히 시를 쓰고 계셨으나 나는 원고지 한 장 살뜰히 챙겨 보지 않았다. 사업상의 이유로 술 마시고 노는 것이 훨씬 더 재미있었다. 아버지가 계신 고향과의 거리가 조금씩 멀어져 갔다.

가신지 십여 년이 훌쩍 지났고 내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너 자신을 증명하라’란 편지를 잊은 적은 없지만, 부자간에 얽힌 몇 가지 일로 인하여 나는 아직 아버지에 대하여 반쯤의 경외심과 반쯤의 섭섭함을 가지고 있다. 특집으로 싣는다는 단체에 미안해서 시집을 펼치고 차근차근 다시 읽는다. 그런데 아! 내가 이제 글 읽는 눈이 어두워졌는가. 심성이 순화되었는가. 왠지 아버지의 시가 전처럼 진부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읽으면 읽을수록 험난한 세파에도 순수함을 잃지 않았던 한 남자의 이야기가 절실하게 와닿는다. 집안의 굴곡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부친의 갑작스런 타계로 유학을 중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열여덟에 초등학교 교사가 된 남자. 맏이란 죄로 집안의 빚과 동생의 좌익활동을 연좌제로 짊어진 남자. 아홉 식구를 건사하기 위해 공장 노무자로, 공무원으로, 회사원으로, 사업가로 끊임없이 변신했던 남자. 일제 강점기부터 고도 성장기까지 시대의 격랑과 풍파를 모두 체험한 남자. 그러면서도 시를 놓지 않았던 남자. 시 속에 순수한 심성과 이상을 녹여 넣은 남자. 고향의 자연을 노래함으로 고달픈 현실을 달랬던 남자. 언어의 기교 없이 언제나 진솔한 남자. 피가 뚝뚝 흐르지 않아도 그보다 더 간절한 남자.

전체를 관통하는 명제는 자연과 꿈이다. 맑고 깨끗하다. 화려한 수사나 기교도 없다. 일상적인 용어도 쉽게 읽힌다. 글이 꼭 삶의 정곡을 찌르는 송곳일 필요는 없다. 두루두루 품어 온화하게 융합하는 것도 시의 묘미 중 하나일 수 있다. 무거움과 아픔을 하소연하고 푸념하지도 않는다. 항상 사랑하는 사람들과 자연에서 오순도순 더불어 살고 싶어 했다. 내가 모르던 아버지의 정신세계요 이상향이다. 불현듯 스치는 것이 있다. “너 자신을 증명하라.” 그건 어느 길을 선택하든 최선을 다해 흔들림 없이 살라는 화두였다. 좀 더 정확하게는 문학으로 존재 가치와 이유를 밝힘은 물론, 당신이 가 닿지 못한 세상을 가 보라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르는 말 중에 이만한 의미를 가진 것이 또 있을까. 아둔한 나는 실망하고 원망만 했을 뿐, 글로도 생활로도 나를 증명하지 못했다. 좀 더 치열하게 열심히 살 일이었다. 스무 살 때 편지에서 느꼈던 여백의 막막함과는 다른 막막함이 전신을 훑으며 지나간다.



박현기 : 대구수필문예회, 수필미학문학회, 영남수필문학회 회원. 수필집 『민들레 피는 골목』. 동성교역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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