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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주화입마(走火入魔) / 박현기

부흐고비 2021. 11. 23. 08:34

멍 때리기 대회가 매년 한강변에서 열린다. 2014년 첫 대회 이후 정신과 의사들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호응 속에 해가 갈수록 성황을 이룬단다. 세상에 별 겨루기가 다 있구나 싶지만, 과부하에 걸린 뇌를 보호하고 잠시 쉬게 하는 데는 탁월한 효과가 있다고 주최 측이 설명한다. 현대사회는 빠르고 복잡하게 변화한다. 각종 첨단정보를 습득하고 이해하려면 그야말로 머리가 아프다. 이럴 때 잠시 머리를 식히는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멍청하게 앉아 오래 버티는 사람이 이기는 단순한 경기인데 이게 쉽지 않은 모양이다. 뭔가 끊임없이 생각하고 움직여야 하는 호모사피엔스에게 몇 시간이고 아무 생각 없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그 자체가 형벌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 대회가 대구에서 열린다면 나도 한번 도전해 보고 싶다. 아마 내가 출전하면 일등은 무조건 내 것이 될 것 같다. 요즘 멍청하게 앉아있기론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아무 생각 없이 한나절을 보내는 것은 예사요, 어떤 날은 온종일 꼼짝하지 않고 보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혀 생각해보지 못한 일이다. 그리 부지런하지도 않으면서 잠시 가만히 앉아있질 못했다. 끊임없이 뭔가를 생각하고 움직여야 했고 주말이면 어디론가 훌쩍 떠나 버릇했다. 어쩌다 계획이나 약속이 어긋나는 날이면 친구들 불러 술이라도 마셔야 살아있음이 실감이 났다. 그런 것이 존재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이라 여겼고 습관이 됐다. 그렇게 나다니기 좋아하던 내가 코로나19 사태 이후 변해도 너무 변했다. 상대에게 행여 피해를 주기도 싫고 받기도 싫어 그냥 멍청하게 앉아 황금보다 귀하다는 지금을 물 쓰듯 탕진한다.

무리한 확장으로 사업실패를 경험한 후 나의 화두는 마음 비우기였다. 마음을 비우려면 쓸데없는 욕심을 버려야 했고 과거를 곱씹지 말아야 했다. 끊임없이 내가 나에게 주문을 걸었다. 욕심을 버리자, 과거를 생각하지 말자, 현재의 내게 만족하자, 무리하게 일을 벌이지 말고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하자. 그래서 사업 규모부터 줄이고 씀씀이도 줄이고, 끝내는 꿈과 마음마저 줄이고, 불편한 아귀다툼으로 돈 버는 것보다는 가난이야 한갓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고 자위하며 마음 편하게 살기로 작정했지만, 말처럼 쉽지 않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열화가 오르내렸다. 이런 내가 안쓰러웠는지 세상이 도와주려 나선 것 같다.

지난해 초부터 코로나19가 우리의 일상생활을 점령했다. 모든 인간관계가 비대면으로 전환되고 사회적 거리 두기가 시작되었을 때 절호의 기회다 싶었다. 이럴 때 공부 하자! 마음 비우기에 큰 도움이 된 글쓰기를 하면서 절실히 느낀 것이 나의 불학무식 함이다. 세상살이 뭘 좀 안다 싶었는데 막상 글을 쓰려니 제대로 정확하게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아는 지식과 경험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지와 같은 인문학적 소양은 아예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허랑방탕하게 산 나 자신을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했던가. 그런 내게 비대면과 사회적 거리 두기는 삼복더위의 소나기였다. 없는 시간 쪼개어 공부하는 사람도 숱한데 다시 없을 기회가 저절로 찾아왔으니 당분간 조용히 혼자 책도 읽고 글도 써보리라. 면벽참선하는 선승의 경지야 당연히 아니겠지만 흉내라도 내보고 싶었다.

세상이야 시끄럽거나 말거나 평생 처음 가져본 조용한 시간이다. 혼자 사용하는 사무실이 더욱 고요하고 적막하기까지 하다. 늘 시정잡배가 들끓던 곳이어서 더욱 실감이 났다. 오가는 사람이 없는 만큼 일거리도 줄었다. 애초에 마음 비우자며 줄여놓은 규모에서 더 쪼그라들었다. 그래도 그게 나 혼자 겪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가 감당해야 하는 혼란이거니 생각하며 마음 편하게 있기로 했다. 부모님 다 돌아가시고 자식들 결혼하여 분가했으니 애면글면 생계에 매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큰 다행이다. 격리 아닌 격리의 시간이 늘어가기 시작했다. 찾는 사람도 없을뿐더러 거래처에서는 아예 방문을 자제해 달라는 메일이 수시로 날아왔다. 부모형제끼리도 서로가 염려스러워 만나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으니 타인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그래도 마음 비우고 살기를 노력하는 내겐 분명한 축복의 시간이 될 것이었다.

성경이나 불경 공부를 할까. 인문학 서적을 읽어볼까. 어떻게 하면 좀 더 아름답고 깊이 있는 글을 쓸 수 있을까. 나는 정말 하고 싶은 것도 많았고 알고 싶은 것도 많았다. 배움 앞에서 온갖 욕심이 들끓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속세에 찌들고 찌든 하등동물임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나를 충전하리란 다짐도 무색하게 정말 이상하지. 점점 집중력이 떨어지는 거다. 바쁜 틈 쪼개어 글 쓰거나 책 읽을 땐 일 분 일 초를 아까워하며 몰입했는데, 정작 시간이 지천으로 깔리자 느긋해지기가 태평양이었고, 십 분만 지나면 파도에 흔들리고 있었다. 책을 읽으면 앞 페이지가 생각나지 않고 글을 쓰면 다음 문장을 끌고 가지 못했다. 까짓거 있는 게 시간뿐인데 오늘 못하면 내일 하지. 잡념에 마구니가 들끓으면 한 줄 쓰다 포기하고, 한 장 읽다 던지고, 날이 지날수록 하루하루가 무료해지기까지 했다.

그것만 그런 게 아니다. 점점 게을러지고 매사가 귀찮아지고 생각이란 것 자체를 하기 싫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감성도 무뎌지고 뭘 어떻게 하겠다는 계획도 희미해졌다. 그냥 멍하니 앉아있는 시간이 세상만사 가장 편하고 그 나머지 모든 것은 귀찮고 부질없어 보였다. 참 알 수 없는 현상이다. 이젠 아예 버릇이 되었다. 귀차니즘적 허무주의가 밤낮없이 나를 지배한다. 고칠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마음을 너무 비워 버렸나?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일까? 나는 내가 가려던 방향과는 전혀 다른 곳에서 길을 잃었다. 그리하여 어제보다 못한 오늘을 살고 있고, 오늘보다 못한 내일을 살 것이란 예감마저 드는 것이다.


주화입마: 무협지 등에서, 심리적인 원인으로 몸속의 기가 뒤틀려 통제 불가능한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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