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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이수명 시인

부흐고비 2021. 11. 29. 08:30

이수명 시인, 평론가, 번역가.

1965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4년 《작가세계》에 <우리는 이제 충분히> 외 4편의 시로 작가세계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2007년 김구용에 관한 연구로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낯설고 난해한 시풍으로 알려져 있지만, 고전주의자, 당대적이라는 평도 있다. 시집으로 『새로운 오독이 거리를 메웠다』 『왜가리는 왜가리 놀이를 한다』 『붉은 담장의 커브』 『고양이 비디오를 보는 고양이』 『언제나 너무 많은 비들』 『마치』 『물류창고』 등이 있으며 작가세계 신인상, 박인환문학상, 현대시작품상, 노작문학상, 이상시문학상, 김춘수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마치 / 이수명
내 마음이 죽은 잎들을 뒤집어쓰고/ 마치/ 죽은 잎들이 서 있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구나 꿈속에서 처음 보는 접시를 닦고 있구나 접시를 아무리 가지런히 놓아도/ 마치/ 죽은 잎들이 땅을 덮으리/ 죽은 잎들이 땅을 온통 덮으리/ 그러면 실시간/ 그러면 거리에는/ 마치/ 어디서부터 온 건지 알 수 없는 알록달록한 숄들이 늘어서고/ 숄을 걸친 어깨들이/ 마치/ 다른 요일로 건너가고 있구나/ 다른 입김을 내뿜으며 돌아다니고 있구나/ 마치/ 흘러넘치듯이/ 끝없이 부풀어 오르듯이/ 그러면 나는 마치 꿈꾸고 난 후처럼/ 하얀 양들을 보러 가요/ 양 떼들이 별안간 걸어 나오는 것을 보러 가요/ 마치/ 여기를 묻어버려요/ 여기가 떠내려가요/ 내 마음이 죽은 잎들을 뒤집어쓰고/ 죽은 잎들이 땅을 덮으리/ 죽은 잎들이 땅을 온통 덮으리/ 마치/ 꿈꾸고 난 후처럼//

시멘트 야채 종이 같은 것들 / 이수명
한 사나이가 들판을 달리고 들판을 달리는 사나이가 들판이 꺼진다. 사나이에게로 꺼진 들판이 없는 사나이가 달린다. 시멘트 야채 종이 같은 것들이 고온다습해서 그는 무턱대고 배추를 뽑는다. 배추를 들고 걸어가는 사나이가 들판이 뚫려 있다.// 들판을 빠져나가는 쥐들이 빠져나가기에 들판이 불편하다.// 한 사나이가 들판을 달리고 들판이 뚜껑이 없어서 들판의 시대는 사나이를 닫는다. 들판을 닫는다. 들판을 달리고 있는 사나이가 들판을 끌고 온다. 들판은 늘어나는 사용이다. 사나이는 사나이에게로 밀려난다. 시멘트 야채 종이 같은 것들을 끄집어낸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 이수명
이유가 무엇입니까. 구겨진 신발 속으로 들어가다 말고 원인들은 무사히 지냅니까. 시체들이 바스락대는 날들입니다. 뼈가 어긋나고 더 멀리 방사상으로 팔을 벌린다. 싹이 나는 것은 쓸쓸한 일이다. 무엇 하나 뱉어내지 못하고 한꺼번에 삼켰거든요. 오늘은 정말 아무것도 삼키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패잔. 조심성 없이 이유가 모여 있습니까. 내 생각을 물을 때마다 내 생각이 가능해질 것이다. 가능이 모여 신음할 것이다. 마침내 얼굴을 뒤덮어버리는 똑같은 입김//

4차선 도로 / 이수명
4차선 도로는 전염병처럼 번진다. 눈앞에서 번진다. 햇살을 받아 내내 번들거린다. 4차선 도로에는 짧은 바지를 입은 사람들이 있고 팻말을 세우는 사람 팻말과 얼어붙은 사람 다리 사이로 타르가 흘러내린다. 4차선 도로는 뻗어 나가고 먼저 가 했던 것 같고 가지 마 했던 것 같고// 도로가 완전히 퍼져 나가면 도로를 막고 서 있으렴// 4차선 도로에는 지붕 달린 차들이 달리고 간혹 지붕이 떨어져 내리고 지붕을 주우러 들어갔다가 지붕을 버리라 4차선 도로는 무슨 도가니에 빠져 있다. 동서로 미친 듯이 가보려 한다. 동서인 채로 가만있으려 한다. 흥분하여 굳어 있다. 4차선 도로에는 휘발유 냄새가 가득하다. 이대로 통째로 증발해버리렴// 실려 있는 것들을 지상의 모든 운반을/ 내려놓으려 하고//

서른 / 이수명
밖이 이렇게 따뜻한 줄 몰랐다. 따뜻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옛 애인에게 전화하는 실수를 하고도 나는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잘 몰랐다.// 서른 살에 나를 낳으신 어머니, 어려서부터 통 울지를 않아 박약아로 아셨다는 어머니, 이제 서른 살이 된 진짜 박약아를 알아보지 못하고 다른 삶을 꿈꾸는 어머니.// 새벽의 여명과 저녁의 어스름이 같은 푸르름이듯이, 이십대의 긴 터널에 언뜻언뜻 비춰졌던 너에 대한 욕망과 너의 부재가 같은 것이었듯이, 나는 아주 어릴 적에 내가 가졌던 공포와 낯설음의 세계로 돌아가고 있다. 내 방문을 두드리던 젊은 어머니의 모습과 지금 내가 걸어가는 이 거리의 햇빛은 그렇게 닮아가고 있다.// 내가 박약아가 되는 데에 서른 해가 걸렸구나. 자신을 충분히 입증하는 데에. 오늘, 이 따뜻한 햇빛 속을 걸어가는 것은 늙으신 어머니의 노안을 향해 가는 것이었구나.//

마흔 / 이수명
마흔이 되자 그의 손에서 다시 물칼퀴가 자라났다. 하지만 그는 헤엄치지 않았다. 헤엄쳐서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엎드려 떠 있었다. 물 속에 나뭇잎 속에, 공기 방울 속에 등을 구부리고 떠 있었다. 숨을 죽이고 진흙 속에, 지푸라기 더미에 박혀 있었다. 그의 손에서 다시 물갈퀴가 자라났다. 그는 헤엄치지 않았다. 벽을 긁어대지 않았다. 몸을 숨기고 벽 속에서 울지 않았다. 물갈퀴는 계속 자라나 그의 몸을 덮었다. 그는 물갈퀴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너의 모습 / 이수명
너의 모습을 보여줘// 너는 웃는 모습이다. 웃을 작정이다. 너는 어디서 왔니// 물어보아도 웃고/ 웃음을 어떻게 던지는 거지/ 불안이 시작될 때// 불안은 너의 명랑/ 천장은 높고 천장에서 뛰어내리며 너는 웃는다. 아무도 모르는 날들이 거기 있는 것 같다. 너는 날들을 퍼뜨린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벽을 따라다니며 나도 날들을 하고 있을게// 모습들이여 단결하라/ 뛰어다니는 모습// 아마도/ 지푸라기가 걸어오는 것처럼 보일거야/ 지푸라기가 울고 있는 것처럼 보일거야// 오늘 내 모습이 좋다. 모습이 나와 함께 있어서 좋다.// 너의 모습을 보여줘 너는/ 풍요합니다.//

누워 있는 사람 / 이수명
누워 있는 사람은 풀밭을 열고 눕는다./ 풀은 오늘 부드러운 차양// 땅을 온통 감고 기어가는 풀들도 있지// 가장 높은 곳에서 태양은 갈가리 찢긴다./ 태양을 어디에 두어야 하나//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를 때/ 눈물은 밖으로 떨어진다.// 누워 있는 사람은 감정에서 떨어져/ 감정이 되려는 사람/ 감정과 교대하는 사람/육체보다 길어진 사람// 모든 발목이 흩어진 사람/ 모든 도약이 사라진 풀밭/ 모든 풀이 짧게 잘려 나간// 입을 막고/ 지구처럼 생긴 아주 둥근 말을 해본다.// 등이 굽은 사람들이 지나간다.//

풀 / 이수명
풀이 허공을 떠다닌다./ 풀이 목을 휘감는다./ 검은 물이 쏟아져 내리는/ 목이 닫힌다./ 원근법이 사라진다./ 풀이 허공에 금을 낸다./ 내 얼굴에 금들이 떠다닌다./ 금이 나를 덮는다.// 풀은 아무것도 들어 올리지 않으며/ 풀은 생각에 부딪치지 않는다./ 풀은 나를 베어내지만/ 내 생각을 쓰러뜨리지 않는다.//

나무를 따라간다 / 이수명
나무를 따라간다/ 나무가 번진다/ 나무의 잠 밖으로/ 나무의 짧고 긴 손등이 번진다/ 손을 쳐들어/ 나무는 구름덩어리들과 싸우지 않는다// 나무를 따라간다/ 나무가 침몰한다/ 침몰한 채 제자리에 서 있다/ 나무는 불가능한 모빌이다/ 공중에 매달리지 않는다/ 도시를 건드리지 않는다/ 도시가 침몰한다// 나무를 따라간다/ 나무를 세우며/ 나무의 퍼즐들을 뒤섞으며// 나무는 나타나지 않는다/ 나무이기를 멈추지 않는다/ 나무는 숨어서 기다린다/ 내가 숨어들기를/ 내가 목을 맬 순간을/ 숨어서 기다린다//

물푸레나무 / 이수명
이 나무/ 그 안에/ 내가 알지 못하는 공기가 가득 차 있어/ 부풀어 오른 것/ 잎으로 봉해진 나무// 이것은 물푸레나무라고 중얼거려 본다./ 나무는 지금 뙤약볕을 막아서느라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나무의 어떤 부분도 움직이지 않는다./ 주변에 아무도 없고/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온종일 당황하여 걷고 있는 중이었는데/ 하늘을 쳐다보아도 당황을 그칠 수 없고 걸음을 그칠 수 없고/ 갑자기 덤벼드는 날파리 떼를 그칠 수 없고/ 날파리 떼도 발밑의 이 조용한 경사를 그칠 수는 없다고/ 중얼거리는 중이었는데// 물푸레나무가 나를 막아선 것이다./ 나는 졸음을 그친다. 그러나 모른다./ 나무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나무 뒤에 무엇이 돋아나 있는지/ 나는 서서 그냥 나무를 다 태워 버린다./ 모든 각도에서 늦어 버린 짐을 내려놓고// 나는 단번에 끝이 되어 버린다./ 끝이 되게 내버려둔다./ 어떤 생각도 돌아다니지 않는 나이를 이 끝에 세워 본다./ 손을 흔들고 있을까 흔들다가 그만 둘까 벌레처럼/ 저 높은 곳에서 뉘우치며/ 떨어지는//

오렌지 나무의 농담 / 이수명
오렌지 나무에서 오렌지들이 떨어진다.// 오렌지들은 낙차를 즐거워한다.// 떨어질 때 그리는 포물선을 즐거워한다.// 오렌지 나무를 가득 덮은 오렌지들이/ 나무를 허공 중에 묻어버린 오렌지들이/ 모두 떨어졌을 때 오렌지 나무는 거기 없었다.// 오렌지들은 한꺼번에 농담을 한다.// 우리는 오렌지의 농담을 먹는다.//

나무 속에서 피리를 불었다 / 이수명
나무 속에서 피리를 불었다.나무 속에서 나무를 기다렸다.열 손가락으로 고열에 시달리는 이마를 짚었다.손가락들이 튜브처럼 늘어났다.피리가 구부러졌다.나무는 천천히 다가왔다.내장 속에도 두 눈 속에도 나뭇가지들이 퍼져갔다.나무에 대고 피리를 불었다.나무는 춤추었다.열 손가락으로 나무를 연주했다./ 나는 거대한 까마귀의 입을 틀어막았다.//

가을을 던지는 나무 / 이수명
나무여, 너를 뒤집으며 타들어가는/ 잎들을 보아라 그 여름,// 네가 몸을 섞은 것은/ 또 한 번의 빛이었구나// 아무도 없는 바깥을// 홀로 서성이는//

나무는 도끼를 삼켰다 / 이수명
자신을 찍으려는 도끼가 왔을 때/ 나무는 도끼를 삼켰다./ 도끼로부터 도망가다가 도끼를 삼켰다.// 폭풍우 몰아치던 밤/ 나무는 번개를 삼켰다./ 깊은 잠에서 깨어났을 때 더 깊이 찔리는 번개를 삼켰다.//

완전한 나무들 / 이수명
언덕이 솟아오른다. 언덕 위에서 춤을 춘다. 언덕 위에 서면/ 나는 자라지 않아도 돼/ 나는 아마 평면이다.// 나를 맞닿도록 한다. 그리운 언덕에/ 언덕 위에서 구부러지고 싶어// 날이 저문다. 계속해서 피가 난다. 갈채여, 갈채로 가득 차서/ 나는 언제나 한밤중에 소스라쳐 깨어나는 것이다./ 나는 일어나 계속해서 일어나// 끌려나와// 나는 신속하게 펴지는 평면인 것이다.// 분노가 활기를 띤다./ 지난날의 나무들을 뛰어다니게 하자. 오늘 다시 한 번/ 무기력과 만날 것이다.// 나는 대꾸할 준비가 되어 있다./ 나는 반대의견을 가지고 있지 않다.// 얼굴을 찌푸리는/ 시간/ 나는 조금 자라게 될 거야/ 완전한 나무들로 가득 차서 팔을 벌릴 거야// 언덕을 뚫고/ 춤을 춘다.//

나무에 올라갔는데 / 이수명
나무에 올라갔는데 혼자 몰래 올라갔는데 내가 올라가자마자 나무는 구불구불 휘어지기 시작한다.// 어떻게 낭떠러지를 만드는 거니?/ 낭떠러지는 한번에 만들어지고 한번에 다다를 수 있어 너를 낭떠러지라 부를게// 너는 나무를 유지하고 나는 하늘을 어루만지고 있구나, 하늘을 고정시키는 법을 알고 싶었다.// 이를테면 눈을 감고 뼈로 돌아오는 법// 나는 자꾸 손을 뻗게 된다. 나무 위에서 나무를 상상하게 된다. 다시금 조용해 보이는 곳을 선택한 것인데 한숨을 내쉬고 늦은 오후를 보내려 한 것인데// 오후는 가지 않고 어쩌면/ 나무는 오래전에 떠내려가버린 건지도 몰랐다.//

나는 연결된다 / 이수명
나는 연결된다, 하루 종일// 탁자와 의자와 소파와/ 소파 위의 쿠션으로 연결된다./ 나는 과언이다. 기다란 벽장과/ 선반과 거울과 합쳐진다./ 나는 강화된다./ 문이 열리고 닫히고// 블라인드 사이로 끊임없이 먼지가 들어온다. 내 눈 속으로 들어온다.// 나는 채워진다, 하루 종일// 여러 벌의 옷으로 채워진다./ 여러 벌의 옷 속에 여러 개의 물건들을 가지고 다닌다.// 나는 풀을 짓밟는다. 풀과 함께 여름을 보낸다. 나는 풀과 일치한다.// 나는 아무 마음이나 놓는다. 아무 휘장 앞에/ 휘장의 무늬 앞에/ 무늬들이 막 도착한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창문은 이렇게 높다./ 몸을 돌리지 않고/ 발뒤꿈치를 들고// 나는 바깥을 내다본다.//

나의 경주용 헬멧 / 이수명
나는 하얀 해를 몰고 다녔다./ 나의 경주용 헬멧을 쓰고/ 이리저리 도시를 온통 쏘다녔다.// 벌이 기어갔다./ 나의 경주용 헬멧을 쓰고 벌 같은 것이/ 무덤 속을 미친 듯이 빙빙 돌았다.//

그네 / 이수명
그네가 흔들리는 소리를/ 들었다.// 입 안에서는/ 수많은 단추들이 썩고 있었다.// 나는 단추 구멍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식탁 위의 빵을/ 날마다/ 조금씩/ 베어먹었다.// 빵 부스러기보다/ 먼저/ 부서졌다.// 고양이에게 물려 간 뒤/ 태양도 고양이를 물었다.// 붉은 카펫 위에서/ 나는 그네가 흔들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넷줄을 잡고 있는 두 손은 손목이 끊어져 있었다.//

물고기의 죽음 / 이수명
물고기가 죽었다/ 물이 가득했다/ 물이 벌거벗은 채 가득했다// 나를 헤엄치던 물고기/ 나를 찿지 못한 물고기/ 나를 으스러뜨린 물고기// 물고기는 타일 바닥에 녹슬어 있었다/ 물살은 물고기를 떠나 녹슬어 있었다/ 나는 녹슬어 있었다// 얼굴에 꿀을 바르고//

왜가리는 왜가리 놀이를 한다 / 이수명
왜가리는 줄넘기다./ 왜가리는 구덩이다./ 왜가리는 목구멍이다./ 왜가리는 납치다.// 왜가리는 왜가리 놀이를 한다.// 테이블은 하나다./ 테이블은 둘이다./ 테이블은 셋이다./ 테이블은 숲 속에 놓여 있다.// 손을 들고/ 숲이 출발한다./ 테이블은 없다.// 테이블 위로 왜가리는 도착한다./ 걸어 다니는 테이블 위로 왜가리는 뛰어 든다.// 테이블은 부서진다./ 숲이 출발한다.// 왜가리는 하나다./ 왜가리는 둘이다./ 왜가리는 셋이다./ 왜가리는 없다.// 왜가리는 숲 속에서 왜가리 놀이를 한다.//

왼쪽 비는 내리고 오른쪽 비는 내리지 않는다 / 이수명
내가 너의 손을 잡고 걸어갈 때/ 왼쪽 비는 내리고 오른쪽 비는 내리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너무 많은 손들이 있고/ 나는 문득 나의 손이 둘로 나뉘는 순간을 기억한다.// 내려오는 투명 가위의 순간을// 깨어나는 발자국들/ 발자국 속에 무엇이 있는가/ 무엇이 발자국에 맞서고 있는가// 우리에게는 언제나 너무 많은 비들이 있고/ 왼쪽 비는 내리고 오른쪽 비는 내리지 않는다.// 내가 너의 손을 잡고 걸어갈 때/ 육체가 우리에게서 떠나간다./ 육체가 우리를 쳐다보고 있다.// 우리에게서 떨어져나가 돌아다니는 단추들/ 단추의 숱한 구멍들// 속으로// 왼쪽 비는 내리고 오른쪽 비는 내리지 않는다.//

이디야 커피 / 이수명
몇 시쯤인지 알 수 없었다. 여기서부터는/ 걸어가야 하는데/ 길이 엉망이구나 나는 고개를 돌렸다./ 흰 셔츠를 입은 남자가 이디야 커피 앞에서 자꾸 내 말 들려 내 말 들리냐구 하면서/ 폰에 대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과연 그의 말은 들렸는데 사람을 잘못 보았어 하는 말도 잘 들렸다./ 여기서부터는 걸어가야 하는데 날벌레들이/ 가로등을 엉망으로 망쳐놓았다./ 한 늙은 여자가 바닥에 앉아 있었고 술에 취해/ 술을 더 가져오라고 했다./ 그것은 사실이라고 했다./ 당장 오라고 했다./ 오늘은 더 걸을 수 없구나 나는 휘파람을 불었다./ 여기서부터는 걸어가야 하는데// 몇 시쯤인지 알 수 없었다. 여자는 다시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했다. 모두들 죽음으로부터 다시 한번/ 튕겨나와/ 무언가로 죽음을 내리치고 있었다./ 밤새 싸놓은 짐 보따리들이 엉망이구나/ 흩어진 천 쪼가리들이 돌아다니며 엉망이구나 나는 한숨을 쉬었다./ 남은 셔츠들을 가지런히 개기 시작했다.//

이디오피아식 인사 / 이수명
셔틀콕이 나무에 걸렸다./ 우리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배드민턴 채를 내려놓고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이디오피아에서 온 셔틀콕인데 지금 나무에 꼼짝없이 걸려버렸다./ 왜 날마다 배드민턴을 쳤는지 모르겠다./ 왜 저녁을 먹기 전에 언제나 그랬는지/ 쓸데없는 이야기를 잔뜩 주고받으며 뛰어다녔는지/ 이야기는 끝이 없었고/ 우리는 끝없이 달리는 것 같았다./ 같은 자리에서 계속 도망치는 것 같았다./ 하늘로 셔틀콕이 날아가도 모르고/ 이디오피아까지 그것이 날아갔다가 돌아와도/ 똑바로 날지 못하고 나무에 걸려도 어찌할 바를 몰랐다./ 네가 나무를 여기 불러 세웠니 난 아야 따지면서/ 그동안 거래했던 배드민턴 채들을 느닷없이 호출해대기 시작했다./ 배드민턴을 배우느라고 우리는 노년이 와도 몰랐다./ 남들은 금방 배우는 것을 배우지 못해 허둥대고 질질 끌고/ 다른 사람의 배드민턴 채를 뺏기만 했다./ 다정한 사람들은 배드민턴을 치고/ 훌륭한 사람들은 훌륭한 사람들끼리 배드민턴을 치고/ 얼마나 멋지게 배드민턴과 결합하는지/ 그들이 무슨 방법으로 배드민턴을 끝내는지 알 길이 없었다./ 서둔 솜씨로 우리는 왜 날마다 배드민턴을 쳤는지 모르겠다./ 셔틀콕이 똑딱거리며 계속 머리 위로 날아다니는 악몽을 꾸었다./ 악몽을 피해/ 배드민턴 채를 흔들어대며 우리는 서로를 탓하고 내리쳤다./ 네가 나무를 여기 불러 세웠니 난 아냐 따지면서/ 물러설 줄 모르고 나무 밑을 빙빙 돌았다./ 셔틀콕이 떨어지면 줍기 위해 벌써 허리를 구부렸는데/ 그것은 이디오피아에서 반가울 때 하는 의례적 인사였다//

차를 세우고 / 이수명
어디에 차를 세울까// 어제도 집 앞에 세우고 그제도 집 앞에 세우고 일주일 전에도 집 앞에 한 달 전에도 계속 계속 집 앞에/ 세우고 어김없이 그랬다. 그런데 오늘은 세우지 못했다. 집 앞에서 한 아이가 울고 있었다. 정면을 바라/ 보며 울고 있었다. 집 주위를 빙빙 돌았는데 한 바퀴 돌고 두 바퀴 돌았는데 계속 아이가 울고 있었다./ 계속 거기에 있었다. 누군지 모르겠다. 어디에 차를 세울까// 어두운 골목길에 차를 세우고 오니 아이는 없었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왜 우냐고 물어보려 했는데/ 땅을 내려다보며 울지 않았다고 대답할지도 모르는데 사라져버렸다. 나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물류창고 / 이수명
모르는 사람들이 거기에 서 있다/ 우리가 만나기로 약속한 창고 앞에// 창고 앞에 나란히 서서 테이프 커팅을 하고 있다// 우리가 만나기로 한 창고 안으로 벌써 들어가고/ 들어갔다가 나오고// 생각을 바꾸어 그 창고를/ 뚫고 나가려는// 순간의 창고/ 뜻밖의 창고인 듯 서 있다// 모르는 사람들이 거기에 서 있다 , 거기서 다시 만날 약속을 하고 있다/ 모르는 사람들이 무슨 일인지/ 계속된다, 언제 꺼냈는지/ 검은 그림자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끊어진 테이프를 뉘우치고 있다//

풀 뽑기 / 이수명
풀 뽑기를 했어요 모두 모여 수요일에 풀을 뽑았어요 목요일에 뽑은 적도 있어요 풀이 자라고 계속 자라서 우리도 계속 모이고 있어요 풀이 으리으리해요 토마토 밭에 들어갔다가 상추밭에 들어갔어요 풀을 뽑다가 토마토도 뽑고 상추도 뽑았어요 이게 무슨 풀이지? 물어도 아무도 몰라요 풀은 빙빙 돌고 풀은 무리 지어 부풀어 오르고 풀은 울음을 터뜨리고 풀은 서로를 뚫고 지나갔어요 풀은 텅 비어 있어요 풀은 반들반들 빛났고 더 이상 반짝거리지 않았어요 풀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요 풀 속에 숨어 아무도 보이지 않았어요 풀을 뽑다가 풀 아닌 것을 뽑았어요 미나리도 뽑고 미나리아재비도 뽑았어요 풀 한 포기 없었어요 그래도 모두 모여 풀을 뽑았어요 우리는 계속 풀 뽑을 사람을 찾았어요 풀이으리으리해요//

 

창 / 이수명
나는 떠난다 떠날 때마다 잠시, 창에 비치는 내 의상에 놀란다. 나는 누구보다도 나를 알지 못한다. 열살, 스무살에 그랬고, 서른 살에도 다른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나 나를 떠나게 하는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세상을 내려다 보는 이 커다란 창 앞에서 나는 늘 같은 모습으로 떠날 준비를 한다. 지금은 아주 느리게, 내 잘못을 시인하듯 돌아선다. 창을 열지 못하고, 움직이는 소음을 듣지 못하고 떠나간다/ 나를 돌아오게 하는 힘은 나를 떠나게 했던 힘과 같은 것임을 나는 알지 못한다. 미치지 않기 위하여 도시의 밤이 쓰레기를 남기고, 미치지 않기 위하여 불안한 취객이 만들어지고, 미치기 직전에 막차가 굴러오는 것을 삶의 이치로 받아들이기는 얼마나 쉬운가. 나는 언제나 미어터지는 막차 안에서 돌아오는 힘만을 소유한다. 번잡한 목록을 처분하고, 번잡한 목록으로 처분되고, 돌아오는 것은 비밀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떠난다. 모험은 미숙한 자의 것이다. 용기는 가난한 자의 것이다. 나는 막 돌아왔고 성큼 떠나려 한다. 나를 돌아오게 하는 힘도, 떠나게 하는 힘도 애초에 아무것도 없었음을 이해하기란 얼마나 쉬운가. 나는 반복의 미덕을, 반복의 힘만을 소유하길 바라는 것이다. 내가 돌아 올 때마다 앞서 가지런히 누워 있던 창틀의 반복처럼./ 그 위에서 창은 열리지 않고 세계는 고요하다.//

창문이 비추고 있는 것 / 이수명
창을 바라본다 창문이 비추고 있는 것// 이것이 누군가의 생각이라면 나는 그 생각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 누군가의 생각 속에 붙들려 있는 것이다.// 내가 누군가의 생각이라면 나는 누군가의 생각을 질료화한다. 나는 그의 생각을 열고 나갈 수가 없다.// 나는 한순간,/ 누군가의 꿈을 뚫고 들어선 것이다.// 나는 그를 멈춘다.// 커튼이 날아가버린다. 나는 내가 가까워서 놀란다. 나는 그의 생각을 돌려보려 하지만 동시에 그의 생각을 잠그고 있다. 나의 움직임 하나하나로// 창문이 비추고 있는 것/ 지금 누군가의 생각이 찢어지고 있다.//

파리 / 이수명
1/ 파리가 벽을 뚫고 들어온다./ 빗자루를 집어 던지는데,/ 그것은 벽이 흘린 땀이다.//

2/ 파리는 터무니없는 곳에/ 터무니없이 가까운 곳에/ 내려앉을 세계를 보여준다.//

3/ 나는 트럭을 출발시킨다./ 나는 식물의 줄기들을 출발시킨다./ 파리는 내려앉는다.//

4/ 파리는 무질서 위에서 무질서에 무관하고/ 나는 질서 위에서 질서를 탓한다.//

5/ 파리는 독수리보다/ 제트기보다/ 큰 눈을 가지고 있다.//

6/ 나는 새로운 집을 짓는다./ 나는 기와를 얹는다./ 파리는 새로운 스카프를 매고 있다.//

밧줄 / 이수명
어느 날 그 건물 아래로 밧줄이 드리워지고 사람들이 하나씩 건물을 빠져 나갔다. 밧줄은 아주 오래 매달려 있었다. 가느다란 외줄이 부르르 떨고 있는 것을 멀리서도 볼 수 있었다. 그 후 그 건물이 완전히 철거되었을 때 밧줄은 사라졌다. 더 이상 밧줄을 타고 내려갔던 사람들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누군가 그 밧줄에 매달려 있는 것을 날마다 보았다. 움직이지도 않고 딱정벌레처럼 등을 웅크린 채 그는 허공에서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이 건물, 저 건물에 그 밧줄을 번갈아 걸었다. 밧줄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짧아졌다.// 어느 날 새로 불 켜진 창에서 한 사람이 떨어졌다.//

너를 붙들 수 없었다 / 이수명
너를 붙들 수 없었다/ 향기만 진동했다/ 떨어져내리는 꽃만 가득했다/ 꽃을 붙잡을 수 없었다// 너를 붙들 수 없었다/ 꽃보다 먼저/ 낭떠러지보다 먼저/ 네게 도달할 수 없었다//

구경꾼 / 이수명
두 손이 묶인 채로/ 그는 끌려갔다// 구경꾼들이 많았다./ 휘파람도 불고/ 욕설도 퍼부으면서/ 사람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그의 어깨를 쪼던 새가/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리기도 하였다.// 이상한 코일들이 그를 감았다./ 그를 감고 내려오는/ 그 날카로운 코일들을/ 그는 완성했다// 그는 구경했다.// 그에게 등을 돌리고 서 있는/ 구경꾼들을 지나갔다.//

그는 너의 시체를 갖고 있다 / 이수명
그는 너의 불을 가지고 있다./ 꺼진 곳에서 다시 번지는 불/ 번져가면서 하나씩 꺼지는 불// 그는 너의 비를 가지고 있다./ 땅에서 하늘로 자라는 비/ 하늘을 완전히 떠내려가게 하는 비// 그는 너의 시체를 갖고 있다./ 너를 지우고/ 너를 다 돌려보내고/ 어디에도 없는 너를 매장하고도// 그는 너의 시체를 갖고 있다./ 이미 네가 떠나버린/ 너의 시체를 갖고 있다//

못박힌 사람 / 이수명
줄을 던졌다. 기둥에 감았다. 기둥의 기억을 감고 옷을 감았다. 흘러내리는 부피를 감았다. 기둥을 들어올렸다. 줄이 줄을 잡아당겨 기둥을 날랐다. 기둥은 날아갔다.// 불을 던졌다. 불붙은 나뭇가지를 던졌다. 허공 속을 통과할 때 나뭇가지는 알 수 없는 춤을 추었지만 불을 흘리지 않았다. 불을 소개하지 않았다. 불은 설명되지 않았고 숲은 사라졌다.// 말이 뛰놀았다. 혀를 뒤틀어 말을 내던졌다. 말이 없는 혀, 백지의 혀가 입안에서 요동쳤다. 부딪쳤다. 깨진 말을 불렀다. 말이 피를 흘리며 나타나자 혀가 안으로 말렸다.// 너를 잡아당겼다. 너를 떨어뜨렸다. 너는 끊어질 것 같았다. 쿨럭쿨럭 기침을 했다. 너는 어딘가 먼 곳에 붙들려 있었다. 잡아당겨도 당겨도 너의 비명 소리만 끌려왔다. 너는 걸려 있었다.// 내게 걸려 있었다.//

어느 날의 귀가 / 이수명
집에 도착했습니다./ 계단을 오르지 못했습니다./ 계단 위에 거대한 얼음 덩어리가 떨어져 있었습니다./ 밀어보았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인가 어른거리는 것이 보였습니다./ 무엇인가 얼음 속에 갇혀 있었습니다./ 얼음이 녹기를 기다렸습니다./ 톱질했습니다./ 부서진 얼음을 밟고 올라갔습니다./ 집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갇혔습니다.//

꿈 / 이수명
그의 꿈과 꿈 사이에 나는 나의 꿈을 놓았다. 나의 꿈과 꿈 사이에 그는 그의 꿈을 놓았다. 꿈과 꿈 사이를 꿈으로 채웠다. 푸른 새벽이면 그 나란히 놓여진 꿈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밀려갔다. 꿈으로 꿈을 붙잡았다. 꿈으로 꿈을 밀어냈다. 밀다가 밀리다가 그의 꿈과 나의 꿈이 겹쳐지면서 꿈은 지워졌다. 나는 비로소 잠에 빠져들었다. 어두운 잠 속에서 꿈은 파도가 밀려간 뒤의 조개껍질처럼 드문드문 흉터가 되어 박혀 있었다.//

얼룩말 현상학 / 이수명
너는 얼룩말을 내리쳤다./ 얼룩말의 목을 내리쳤다.// 너는 이제 없다.// 얼굴 없는 얼룩말들이/ 날마다 속삭이며/ 떼지어 네게 엉켜들었다.// 핑핑 돌아가는 바람개비같이/ 얼룩말/ 얼룩무늬들이 빙글빙글/ 너를 태우고 다녔다.// 너를 태운 얼룩말은 시작되지도/끝나지도 않았다./ 얼룩말 위에서 너는 시작되지도/ 끝나지도 않았다.// 하나의 얼룩말이/ 네게 갇힌 후// 빠져나가지 못하고 모든/ 얼룩말들에게/ 너는 갇혀버렸다.//

사과의 幻 / 이수명
등에 붙은 가시가 조금씩 가벼워졌다. 가시로 깔깔거리기도 했다. 먼데 지붕 위에서 돌이 홀로 구르는 소리// 천천히 떠오르는 어떤 귀가 있다. 뿌리 없는 귀, 잠든 소리들, 잡으려 하면 내 손만 잡힌다. 귀를 열어볼 수가 없다.//팔려온 사과들에 마음을 빼앗겼다. 팔려와서야 익는 사과들, 함부로 교환되는 빛깔과 사귀었다. 이제 무엇을 뒤집어쓸까요.//다 드러난 잇몸이 아파요.// 떨어져나간 생각들이 돌아올 때가 있다. 생각들이 눈이 멀어 있다. 사과처럼 뭉쳐지지 않는다. 생각에는 씨가 없다.// 나의 교환에 열중하자 나는 금방 발을 떨어뜨렸다. 다시 발을 바꾼다. 발이 물렁물렁해져서 멀리가지 못했다.//

공간의 이해 / 이수명
둥근 각도를 쏟으며/ 각목들이 무너져 내린다./ 흘러 다니는 각도들에/ 발을 담근다./ 칠이 벗겨진 태양은 어느 쪽에서 오는가/ 낭하에서 홀로 소리치는 광선을 상상한다./ 붙잡힐 때/ 나는 돌발적으로/ 내가 있는 곳이 된다./ 인근의 나라에 따라 들어간다./ 어깨를 파먹는 철근 골조를 옮긴다./ 내가 소리친/ 엉겨붙는/ 구분할 수 없는 자세들을 발굴하기 위해/ 나는 반복해서 나의 자세를 매장한다./ 푸른 핏줄들이 터진다./ 나는 내가 보고 있는 것을 발생시키며/ 발생한 것은 찾지 못한다./ 나는 잎사귀들을 펼치고 펼치지만/ 모든 각도가 싸우며 혼미해져/ 다른 공간 속으로 이동한다./ 오늘 내가 들어가지 못하는//

벌레의 그림 / 이수명
벌레 한 마리 뒤집혀져 있다./ 바닥을 기던 여섯 개의 다리는/ 낯선 허공을 휘젓고 있다./ 벌레는 누운 채 이제 닿지 않는/ 짚어지지도 않는 이 새로운 바닥과 놀고 있다./ 다리들은 구부렸다 폈다 하며 제각기 다른 그림을 그린다.// 그는 허공의 포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허공의 만삭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거기에 그림을 그린다.//

혀에서 지푸라기들이 자라고 있다 / 이수명
혀에서 지푸라기들이 자라고 있다./ 뽑아도 뽑아내도/ 끝이 없다./ 부러지고 끊어지며/ 혀에서 지푸라기들이 자라고 있다.// 땅에/ 꽂혀 있는/ 모든 꽃들이 시들었다.//

케익 / 이수명
커다란 케익을 놓고/ 우리 모두 빙 둘러앉았다/ 누군가 폭탄으로 된 초를 꽂았다/ 케익이 폭발했다./ 우리는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뿌연 먼지 기둥으로 피어오르는 폭발물을/ 잘라서 먹었다.//

그 집에는 / 이수명
그 집에는/ 눈처럼/ 떨어지고 있는/ 계단들이 있다.// 눈처럼/ 수평으로 이동하는/ 눈처럼 백발이 되어버린/ 계단들이 있다.// 검은 사이렌처럼/ 허공을 내 발들로 채우고// 그 집에는/ 눈처럼/ 녹고 있는/ 계단들이 있다.//

가든 파티 / 이수명
고양이 요리가 나왔다/ 고양이가 접시 위에 앉아 있었다/ 나사못처럼 고양이의 두 눈이 핑그르 돌았다/ 사람들의 손이/ 정신없이 빨라졌다/ 수저 부딪치는 소리들이 함박눈처럼 쏟아졌다/ 그 틈새로/ 내가 기어코/ 고양이의 두 눈에 각도를 맞추었을 때/ 그 순간, 고양이는 날아올라/ 나를 덮쳤다//

바다의 프리즘 / 이수명
밀정을 보냈는데 돌아오지 않았다. 별들이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창을 열었더니 그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열린 창으로 빈 방주가 돌아왔다. 방주의 무수한 손가락들이 각기 다른 바다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바다가 환한 불빛을 달고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나는 처음으로 바다를 보고 있었다./ 내가 바다를 보았을 때 바다는 바다가 되었다./ 내가 바다를 보았을 때 나는 바다가 되었다.// 형광등 속에서 날아드는 파리들/ 탁.탁.탁./ 몸을 부딪치는 소리는 그를 맞으러 온 바다를/ 그가 서 있는 가장 높은 파도를/ 그가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보낸 밀정을 살해했다。 또 다른 밀정을 보내서。 내가 제2, 제3의 밀정을 보냈을 때, 내가 내 밀정의 밀정이 되어 사라지기 전, 나는 바다가 환한 불빛을 달고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장미 한 다발 / 이수명
꽃집 주인이 포장을 했을 때 장미는 폭소를 터뜨렸다. 집에 돌아와 화병에 꽂았더니 폭소는 더 커졌다. 나는 계속해서 물을 주었다. 장미의 이름을 부르며 장미는 몸을 뒤틀며 웃어댔다. 장미가시가 번쩍거리며 내게 날아와 박혔다. 나는 가시들을 훔쳤다. 나는 가시들로 빛났다. 화병에 꽂힌 수십 수백 장의 꽃잎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나는 기다렸다. 나는 흉내냈다. 나는 웃었다. 그리고 웃다가, 장미가 끼고 있는 침묵의 틀니를 보았다. 장미는 폭소를 터뜨렸다.//

장미 보고서 / 이수명
끌려가면서 나는 장미를 심었다./ 어딘지도 모르고 장미를 심었다./ 장미 아닌 것들로 장미를 심었다.// 장미는 장미가 있는 곳을 알지 못했다.// 장미를 심으며 나는 끌려갔다./ 장미를 심으며 나는 사라졌다./ 사라지고 나서도 나는 장미를 심었다.// 장미는 장미가 도달한 곳으로/ 장미 넝쿨 속으로 가지 못했다./ 장미는 장미를 치료하지 못했다.// 끌려가면서 나는 장미를 삼켰다./ 장미를 본 적 없는/ 이상한 장미를, 이상한 꽃을 삼켰다.//

비의 연산 / 이수명
깊은 밤 검은 우산이 홀로 떠 있는 명령을 내린다. 그냥 떠 있는 것을 사랑해 우리는 일제히 비예요.// 우리는 비의 형식이면서 동시에 비의 배경이다. 우리는 세계를 채운다. 우리는 우리 이전과 구분되지 않는다.// 합이 도출되지 않는 이 끝없는 연산을 무엇이라 부를까. 만나지 않는 선들이 그냥 떠 있지 그냥 사랑해 더 가늘게 더 두텁게 불확실하게// 우리가 주고 받는 것을 하지 못할 때 우리는 자연수로 탄생하고 자연수는 무효가 될 때까지 자란다. 낮과 밤이 어디로부턴가 흘러나와 시가전을 벌인다. 낮과 밤을 떠다니게 하라 아무것도 생겨나지 않는 이곳에서// 형상을 시작하자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현상 속에서// 틀림없어지거든요// 틀림없이 비를 닮아가고 있어요. 우리는 비의 형식이면서 동시에 비의 배경이다. 우리는 세계를 벗어난다.// 우리는 마찬가지가 될 모양입니다.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것, 그러나 없는 베개를 움켜잡고 베개에 머리를 묻고 떠내려갑니다.//

빗물이 벽을 타고 흘렀다 / 이수명
빗물이 벽을 타고 흘렀다. 나는 벽 속에 있었다. 날 꺼내줘, 나는 말했다. 빗물이 벽을 타고 흘렀다. 나는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나를 향해 가까이 다가오는 발자국, 멀어지는 발자국, 알 수 없는 울부짖음 소리, 나는 시끄러운 정적 속에 묶여 있었다. 빗물이 벽을 타고 흘렀다. 닫혀 있는 빗방울, 닫혀진 물이 벽을 흐르고 흘렀다. 벽은 빗방울 속에 흘러내렸다. 흘러내리며 벽 속에서 나는 말했다. 날 꺼내줘. 도시는 녹고 있었다. 빗물속에 도시는 녹아들었다. 천천히 모든 것이 떠내려갔다./ 날 꺼내줘, 떠내려가며 나는 말했다.//

비 오는 날 / 이수명
비 오는 날, 나는 비를 흠뻑 맞고 걸어가는 한 사람에게 우산을 씌워주었다. 그는 우산 속에서 쉴새없이 말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 말들은 느릿느릿 내게 왔기 때문에 피가 멎어 있었다. 바다 밑바닥을 붉은 게 한 마리가 걸어갔다. 아주 잠깐, 바다가 이동하는 동안, 게가 바다를 나르는 것이 보였다. 헤어지기 직전에 그는 살려달라고 했다. 붉은 집게를 벌리고 느릿느릿 게는 걸어왔다. 빗방울들이 한없이 커지고 있었다.//

깨진 빗방울 / 이수명
창을 붙잡고 있는/ 빗방울들이 모두 깨져 있다./ 하늘이 깨져 있다.// 태어나지 못한 말/ 깨진 말/ 사라져버릴 말들이/ 아주 잠시 머물렀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뇌가 떨어지고/ 뇌를 감고 있는 폭풍우도/ 바닥으로 떨어졌다.// 유리창이 깨져 있다./ 들어오지도 나가지도 않고/ 처음부터/ 깨져 있었다.//

네가 물처럼 될 때 / 이수명
가라앉히려 했다.// 너를 물처럼/ 네가 물처럼 될 때// 물 밖으로 꺼내지는 자는 물이 옳고/ 물이 우선 터지려 한다.// 어느 유창한 계곡이어도 좋았다./ 물 없는 계곡의 흐름이 공중에서 제멋대로 부딪쳐도 좋았다.// 네가 그 계곡을 다 밀어내지 않아도 좋았다.// 네가 물처럼 마치 또 다른 물체처럼/ 물갈퀴를 쳐들 때//

비인칭 그래프 / 이수명
눈을 뜨지 않고/ 나는 오는 중이다.// 얼음과 구름의 그래프 철과 오페라의 그래프 쏟아지는 파괴들과 동시다발적인 그래프// 나는 솟아나는 중이다. 여기에서 거기로// 아름다운 풍습에 물들어 날마다의 밑줄들을 매달고 있는 오선지들이 탈선하고 있으니까 거기에서 지금으로 내일이 휘어진 것이라면 오늘을 돌파하지 못하겠지 그러니 이젠 아니다. 떨어져 나간 의족에 뺨을 부비고 서서 지금이 내일이다. 내일이 쏟아지는 오늘이다.// 떨어져 나간 자물쇠가 저 혼자 열리는 꿈을 꾸고 있으니까// 양말이 발을 실현하듯 나는 오는 중이다. 양말을 뒤집어보자. 목소리가 없다. 목소리 없이 아주 길게 시동이 걸린다. 한꺼번에 춤을 추자. 거기에서 여기로 솟구치는 동안// 거기를 빌린다. 오늘을 오늘 태어난 표들을 빌린다. 이상한 도표들을 펼치면서 걸어간다. 이건 당나귀 이건 자장가 어디선가 나타나는 또 다른 손목들 언제나 더 많은 붕괴들에 불과하다. 당황하는 통계들에 예를 갖추자. 눈을 뜨지 않고// 익명의 그래프들이 일어서고 있다. 번개와 광고의 그래프 빌딩과 총알의 그래프 급진적인 그래프 무너지는 그래프 쓸모없이// 나는 오는 중이다./ 비인칭 그래프//

데칼코마니 / 이수명
땀은 몸 밖으로 난다./ 그리고 몸 안으로도 흐른다.// 밤/ 유리창으로 내가 밖을 바라볼 때/ 유리창에는 안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내가 있다.// 그 유리창을 열어놓는다./ 그 유리창이 저절로 닫힌다.// 처음에 기둥에 못을 몇 개 박은 뒤/ 나는 못을 밟고 올라갔다.// 올라갔다고 머무를 필요는 없다./ 올라갔다고 굳이 내려올 필요는 없다.// 나의 못들을 뺄 필요는 없다.// 어떤 동물들은 뿔이 있다./ 어떤 동물들은 굴 속에 산다.//

검은 고양이 / 이수명
저녁이면 고양이는 나와 함께 귀가했다. 나와 함께 저녁을 먹고 TV 보고 같이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나는 고양이를 잊었다. 신문을 보고 가방을 챙겨 집을 나섰다. 나는 하루 종일 눈이 침침해지도록 교정을 보았다. 그리고 그 침침해진 시야 안에 고양이는 나타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검은 형체뿐이다가 차츰 윤곽이 뚜렷해지고 생김새도 분명해졌다. 그러면 나는 고양이를 따라 귀갓길에 올랐다.// 어느 날 귀갓길에 나는 차 밖으로 고양이를 내던졌다. 이후 고양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다시 나는 눈이 침침해 지도록 교정을 보았다. 그리고 그 침침해진 시야 안에 침침한 눈을 부비고 있는 고양이의 모습이 보였다.//

고양이 비디오를 보는 고양이 / 이수명
고양이 비디오를 틀어놓고/ 고양이가 하나 둘 셋/ 의자에 하나 둘 셋/ 바닥에 하나 둘 셋/ 창틀에 하나 둘 셋// 고양이를 관람하는 고양이들// 고양이를/ 관람하는 고양이를/ 관람하는 고양이들// 거대한/ 고양이 인형들// 모두들 고양이를 추모한다./ 고양이 비디오를 틀어놓고// 모두들 고양이 흉내를 낸다.// 고양이를 끄고 싶은데/ 고양이 비디오를 끄고 잠들고 싶은데/ 비디오는 계속 돌아가고// 고양이도 계속 돌아가고// 고양이를 따라/ 고양이를 소비할 뿐// 고양이 흉내를 내지는 않고// 고양이 비디오 앞에/ 고양이가 하나 둘 셋//

도둑고양이 / 이수명
고양이가 또 쓰레기를 뒤졌어요. 쓰레기 봉지가 여기저기 터져 있어요. 막아도 봉해도 소용없어요. 이젠 집에까지 들어오고 있어요. 빵이나 과자, 장바구니에 담긴 생선들이 자꾸 없어져요. 나도 자꾸 사라지고 있어요. 고양이가 나를 훔쳤어요.//

그 방을 / 이수명
그 방을 재려 했다./ 그 방의 폭을/ 길이를/ 높이를 재려 했다.// 줄자가 끊어졌다./ 그 방을 감고 있는 나의/ 두 팔이 끊어졌다.// 그 방을 재려 했다./ 크고 작은 바퀴들이 엉켜 돌아가고 있는/ 바퀴 속에서 바퀴들이 쏟아져 나오는/ 그러나 정지해 있는 그 방을/ 재려 했다.// 줄자가 끊어졌다./ 시간의 줄자/ 소리치는 한숨 쉬는 조금씩 더 강력해지는/ 시간들이 끊어졌다.// 그 방을 재려 했다./ 그 방의 두꺼운 뚜껑을 열고/ 뚜껑을 닫고/ 다시 뚜껑을 열고// 줄자가 끊어졌다./ 내 몸의 관절이 하나하나 끊어졌다./ 방에 들어서지도 못한 채/ 방을 떠나지도 못한 채//

침입자 / 이수명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기둥 앞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땅에까지 닿는 긴 그물을 들고 있었다. 나는 내 집에서 나가달라고 짤막하게 말했다. 이곳은 당신 집이 아니오. 그가 말했다. 나는 내 집에서 나가달라고 다시 한번 말했다. 이곳은 당신 집 밖이오. 하고 그는 말하더니 친절하게 덧붙였다. 집은 없소. 집 밖이 있을 뿐이오. 아무도 당신 집이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하오. 침입자는 그물을 폈다. 그리고 나를 천천히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슬픔 / 이수명
위로받고 싶은 사람이 생길 때 비로소 슬픔은 완성된다./ 한 고통에 묶여 다른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나는 구부렸다 / 이수명
복도 끝에 너는 서 있다.// 너에게 가려고/ 가지 않으려고/ 나는 허리를 구부렸다.// 그 때 피어난 바닥의 꽃을 향해/ 그 때 숨어든 꽃의 그림자를 향해/ 허리를 구부렸다.// 구부러진 채/ 나는 펴지지 않았다.// 복도를 떠돌던/ 나의 빛은 구부러진 채/ 나의 나날들은 구부러진 채/ 펴지지 않았다.// 가만히 손을 내밀었다./ 그 때 흔들린 꽃에 대해/ 그 때 사라진 꽃의 그림자에 대해// 나는 말하지 않았다./ 너에게 가려고/ 가지 않으려고// 구부러진 채//

모자 / 이수명
모자를 벗는다/ 모자 속에 웅크리고 있던/ 여러 개의 머리들이 우르르 쏟아진다./ 머리들이 빙글빙글 돌아간다./ 돌면서 모두 다른 곳을 향해 간다./ 머리의 땀을 식히고 난 후에는/ 나는 전보다 더 큰/ 더 두터운 모자를 짠다./ 천둥 번개들을 덮을 어둠을 짠다.//

그의 모자 속으로 우리는 잠수한다 / 이수명
어두워지고 아무도 도시를 옮겨놓지 않는다./ 그의 모자 속으로 우리는 잠수한다./ 혼절한 빌딩들이 온몸에 창을 낸다./ 창에서 쉬지 않고 물방울들이 떨어진다./ 하늘은 천천히 땅의 병들을 줍는다./ 최초의 함성,/ 병들의 입구는 날아가버렸다./ 그 시간이 새는 구멍을 물고/ 날들이 지나간다./ 모든 길은 좁고 둥근 혀./ 이 도시는 죽음과 혼례를 치렀다./ 그리고/ 그의 모자 속으로 우리는 잠수한다.//

공원에서 / 이수명
공원에 앉아 있었다. 거리는 모두 증발했다. 공중에 떠 있는 건물들이 서로 부딪혔다. 나는 도피중인 수목들을 표시했다. 내가 상속할 이 수목들을 모두 잊었다. 숲의 은유가 피를 흘리고 있었다. 사건들은 점점 흐려졌다. 개 한 마리가 내 앞을 지나갔다. 꼬리를 세우고 천천히 나를 지우며 지나갔다. 나는 많은 개들을 그렸다. 서로 에워싼 꼬리들과 발들을 그렸다. 공원은 개를 데리고 산책 나온 사람들로 넘치고 있었다.//

시간을 미는 일만 남았다 / 이수명
시간을 미는 일만 남았다./ 더 힘있게, 더 멀리/ 산봉우리들이 솟아오르게/ 안개에 덮여 실족했던 돌멩이 하나까지/ 통곡의 봉우리들로 솟아오르게// 시간을 헛디디는 일만 남았다./ 헛걸음질로 오가는 날만 남았다./ 더 가쁘게, 더 가까이/ 이승의 무력한 버릇들 몇 벌로 남을 때까지/ 흔들리는 불빛 따라 사라져갈 기름 몇 방울로/ 영원히 깨닫지 못하는 찰랑거리는 부지런함으로//

중력이 소멸한 / 이수명
뒤를 돌아볼수록 중력이 소멸하는 땅이다. 더 멀리 더듬을수록. 때때로 꺼냈던 사치한 희망도 내 생애, 사과의 제스처였나. 그렇게 살지는 않겠다고 생각한 삶을 이해하게 되었을 때 버렸던 마지막 자유였나.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리. 허공에서 시들은 이파리의 혼곤한 용서와 용서보다 깊은 한기를.//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중력이 소멸하는 땅이다. 앞으로 나서지 않아도. 어떤 그물로도 건져지고 마는 커다란 동공을 띄웠던 해저는 내 생애, 못다 한 몰락이었나. 흘러다니는 수초는 흘러다니는 일이 힘들고, 잃어버린 발바닥은 홀로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였으므로 내 생애, 떠오르지 않는 유적지였나. 아무도 노여워 못하리. 그리워 못하리. 중력이 소멸한 땅, 중력이 화해한 땅.//

세밑 / 이수명
십년을 참아왔는데 한 순간을 못 넘긴다. 복병이 새삼스러워졌다. 내가 나의 복병인 줄을 이제야 알겠다. 숨을 곳 없는 쥐떼들은 모두 어디로 쳐들어갔나. 번지수 틀린 전쟁이 윽박지르며 둥지를 틀고, 나는 또 한번 하산한다. 나는 또 한번 어긋난다. 내가 발견되는 거리가 단축되는 고통, 부자유한 손발이 이동하는 고통, 경험의 창살을 뚫고 경험이 거처가 되는 고통, 단 일순간의 직면이 무너뜨린 그 오랜 폐허의 고통, 나는 또 한번 어긋난다. 견디지 못한 쥐떼들은 모두 어디로 쳐들어갔나. 쳐들어가서 모두 어디로 둥지를 틀었나.//

방문 / 이수명
배가 고파 잠에 들지 못하거나 잠들어 배고픈 걸 잊어버리거나, 끌려다니는 허공의 전깃줄이 되거나 어느 낡은 아파트의 벽면 안에서 누전되거나 그게 그거지. 지상에 걸리지 못하는 황혼이거나 그 황혼을 덮어버린, 여진 같은, 지구의 운동이거나 매한가지지.// 도망가고 싶은 애정만 애정이 되고, 얼어붙은 벽돌 하나하나가 모여 부락에서 부락을 진행시키지. 부러진 손가락처럼 누군가에게 내밀지도, 잡지도 못하는 부락을 이루지.// 아무것도,/ 그토록 뜨거웠던 지난날의 태양과 폭우가 여물지 못한 벼이삭 한 톨도 예언하지 않았듯이, 삶이여, 네가 홀로 그 부락을 떠돌며 네가 이토록 정면에 강한 것은 아무것도 예감하지 않는 때문이지. 대수롭지 않기 때문이지. 보이지 않게 너의 옆구리로 모든 한숨이 흘러나갔기 때문이지.// 너의 늑골 사이로/ 주워담을 수 없는 태양이 뜨고 지고/ 모였던 철새도 흩어져가고/ 홀로 취한 너의 그림자만 어지러웠기 때문이지.//

슬퍼하지 말아라 / 이수명
슬퍼하지 말아라, 저쪽에서 보면 이 길도 우회로이다. 들키지 않은 허위들을 감당하면서, 우리는 자신의 인생에서만 배운다. 삶은 환기되지 않는 것이다.// 슬퍼하지 말아라, 저쪽에서도 이 길을 볼 수가 없다. 방심한 터널이든 위압적 대로이든, 투항하는 것이 삶인 까닭에 우리가 들고 갈 선물꾸러미는 우리를 위한 것이다.// 슬퍼하지 말아라, 과녁을 벗어난 화살들이여. 떨어져 내린 곳이 삶의 과녁임을,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와버렸다고 슬퍼하지 말아라.//

배드민턴 치는 아이들 / 이수명
두 아이가 배드민턴을 치고 있다/ 하나는 땅에서, 하나는 지붕위에서/ 둘 사이를 오가는 피투성이 새가/ 두 아이를 만나지 못하게 한다/ 아이들의 팔은 한없이 길어져/ 허공을 가르는 채찍 되어 서로를 묶고/ 깃털이 빠져버린 날아 다니는 기계는/ 마지막 어금니를 떨어뜨린다.// 지상의 새들은 지금 새로운 배드민턴을 찾고 있다.// 저 아이들을 가까이 오게 하라/ 아이들을 쫓아내자/ 두 아이들을 쫓아내자/ 두 아이는 벌써 새로운 소매를 달고 있다.//

호도나무를 베다 / 이수명
길을 가면서, 그는 호도나무를 베었다. 호도나무는 눈에서 자란다. 호도나무가 두 눈을 완전히 가리기 전에, 그는 이따금 멈추어 가지들을 잘라냈다. 그리고 생각했다. 호도나무는 왜 돌아오는 것일까?/ 호도나무에 올라앉아 있던 사람들이 그에게 손짓을 한다. 그도 손을 흔들었다. 흔들면서 그는 동일한, 균형에 이른, 수많은 호도알들을 생각했다. 호도알들은 마주보며 썩어 있었다.//

파도 / 이수명
잃어버린 심장이여/ 잃어버린 심장이여/ 잃어버린 단 하나의 심장을 향한/ 내 인생의 미친 혈관들이여/ 피리소리여/ 내 생명의 무너져 내리는 동맹이여//

그의 초승달 / 이수명
날마다 그에게 간다. 날마다 그의 초승달을 훔친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깨진 유리 조각들이 서 있을 뿐이다. 깨진 유리 조각들처럼 서 있다 돌아온다. 돌아올 때, 이미 돌아온 사람들과 이제 돌아올 사람들을 본다. 그들 머리 위에 서 있는 초승달을 본다. 하나, 둘, 셋, 초승달들이 어두운 하늘을 이동한다. 어둠은 둥글게 휘어진 활주로, 내가 훔친 초승달은 나보다 먼저 내 집에 도착한다. 깨진 유리 조각들이 보이지 않는다. 유리 조각들은 제 음표를 베어물고, 모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유리조각의 숨은 음표들이 나를 세운다. 나는 다시 그에게 간다. 깨진 유리 조각들처럼 서 있다 돌아온다. 나는 어두운 하늘을 이동한다. 어둠은 둥글게 휘어진 활주로, 내가 훔친 초승달이 어두운 하늘을 이동한다.//

새벽 세시 / 이수명
이기지 못하는 술을 마시고 이기지 못하는 싸움을 하고/ 이기지 못하는 위도에 매달려 있다. 이기지 못하는 게임/ 을 하고.// 이 집중은 얼마나 황홀하냐/ 얼마나 시간을 버는 것이냐// 세상의 집들, 세상의 다리들, 땅속을 흘러가는 하수구들/ 의 무서운 집중이여, 이기지 못함이여, 위태로움이여.// 되풀이되면서 사라져가는 세상의 품들/ 오늘 벌써 이만큼 멀어진 너의 품은 한없이 위태로워/ 병든 알을 품는 닭은 위태로워// 아,어디로, 어느 곳을 떠나가다가 멈추었느냐. 위로 올/ 린 것보다 더 많은 보이지 않는 팔을 내린 나무들아, 지/ 상에 내리지 못하고 남겨진 얼룩진 먹구름들아.// 어디에서 멈추었느냐, 위태로운 산정을 거슬러 일생의/ 또아리를 풀어버린 바람아, 위독한 미래를 이기지 못하/ 는 바람아.//

검은 프라이팬 / 이수명
아침마다 검은 프라이팬에 요리를 한다. 무엇이든 섞는다. 무엇이든 녹이고 익힌다. 무엇이든 뒤집는다.// 검은 프라이팬 속에서 탁탁 튀어 오르며 지글지글거리며 일순 뻣뻣해지다가 부드럽게 숨이 죽는것들, 바라본다.// 태운다./ 그것들을/ 바스락거리지 않을 때까지// 검은 프라이팬에서 검은 덩어리를 꺼내 먹는다. 형체를 잃어버린 검은 덩어리들을 그릇에 가득 담아 퍼먹는다. 먹고 먹인다..// 사금파리/ 사금파리// 눈이 부신/ 아침마다 손잡이가 긴 검은 프라이팬을 집어 든다. 크고 작은 프라이팬들이 일렬로 걸려 있는 벽 앞에서/ 사금파리를 씹던 기억들//

이빨들의 춤 / 이수명
집에 돌아오면 늘 이가 빠졌다. 그는 빠진 이빨들을 화장실 물컵에 넣어두고는 거울을 보며 텅 빈 입으로 웃었다. 아침이면 그것들을 하나씩 차례로 끼고 외출을 했다.// 어느 날인가 몹시 피곤하여 돌아온 날 밤 그는 화장실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잠을 깼다. 일어나 가보니 이빨들이 컵에서 나와 똑딱거리며 몸을 부딪쳐가면서 춤을 추고 있었다. "참 재미있겠구나. 나도 끼워줘." 그의 말에 이빨 하나가 대답했다. "어서 들어와." 그는 춤을 추었다. 그러자 이빨들이 컵 속으로 모두 들어가버렸다.// 그는 가방 가득 물건을 팔러 다녔다. 언제나 열심히 일했지만 그의 물건을 사려는 사람이 별로 없었고, 가방은 아침이나 저녁이나 무거웠다.// 그가 죽었을 때 그의 가방과 가방 속에 있던 물건들은 이리저리 흩어졌지만, 화장실에 있던 이빨들은 그와 함께 묻혔다. 그는 밤마다 이빨들과 함께 춤을 추었다.//

페이스 페인팅 / 이수명
헬리콥터가 낮게 날아간다. 소년은 자신의 얼굴에 낙서를 한다. 사람들이 웃는다. 그도 따라 웃는다. 소년은 얼굴에 헬리콥터를 그린다. 헬리콥터가 낮게 날아간다. 날아가다 땅에 추락한다. 소방수가 와서 그에게 물을 뿌린다. 그도 호스를 자기 쪽으로 잡아당긴다. 소년은 얼굴에 불을 끄는 소년을 그린다. 소년들이 몰려와 그의 얼굴에 낙서한다. 그도 그들의 낙서 위에 낙서한다. 헬리콥터가 낮게 날아간다.//

어둠의 신발 / 이수명
어둠이 신발을 신고 있다. 어둠 속에 떨어져 있는, 끈이 길게 늘어져 있는 신발을, 아무도 신으러 오지 않는 신발을, 천천히 신고 있다. 그 좁은 입구에 어둠의 거대한 발이 들어간다. 건드리지 않고, 소리내지 않고, 신발도 모르게 들어간다. 어둠이 걷는다. 아무도 신으러 오지 않는 지상의 신발을 신고 어둠이 지상을 걸어나간다.//

너무 많은 손 / 이수명
나는 너무 많은 손을 가지고 있다./ 벽이 많지만 벽보다 더/ 문이 많지만 문보다 더/ 많은 손을 가지고 있다.// 내 많은 손이 많은 벽을 만들고/ 내 많은 손이 많은 문을 만든다./ 내가 만지는 순간/ 벽은 벽이 되고/ 벽은 또 다른 문이 된다.// 내 손자국은 그를 항상 아프게 했다.// 내 많은 손은 공을 잡지 못한다./ 내 많은 손은 공을 어지러워하고/ 스스로 어지러울 뿐/ 공처럼 튀어오르지도/ 공처럼 허공 속을 질주하지도 못한다.// 내 손들은 모두 다른 청진기들을 가지고 있다./ 내 손들은 각기 다른 처방전들을 쓰고/ 벌써 다른 약들을 움켜쥐고 있다.// 홀로 식사를 하는 순간에도/ 테이블 위엔 나의 손들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다./ 포크들처럼/ 일제히 손을 들고 서 있는 포크들과 나이프들처럼//

어느 날의 귀가 / 이수명
집에 도착했습니다./ 계단을 오르지 못했습니다./ 계단 위에 거대한 얼음 덩어리가 떨어져 있었습니다./ 밀어보았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인가 어른거리는 것이 보였습니다./ 무엇인가 얼음 속에 갇혀 있었습니다./ 얼음이 녹기를 기다렸습니다./ 톱질했습니다./ 부서진 얼음을 밟고 올라갔습니다./ 집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갇혔습니다.//

이식 / 이수명
그가 들어섰을때 식물이 따라왔다. 그의 뒤에 붙어서 현관으로 들어서던 식물, 식물의 커다란 잎. 우리가 말없이 서 있었을 때, 우리보다 키가 큰 식물들이 불쑥불쑥 들어와 우리를 에워쌌다.// 나는 물러섰다. 내가 한 발 앞으로 나아가면 또 다른 식물들이 내 앞에 나타났다. 식물들은 모여 있고, 식물들은 흩어지지 않고, 식물들은 만질 수 없는 가시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기다렸다. 가시들이 혀가 되기를, 떼를 지어 일제히 속삭이기를, 속삭이면서 날아가버리기를, 가시들은 어딘가를 찌르고만 있었고, 그곳이 어디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팔을 벌렸다. 식물들 속에서, 내가 알 수 없는 그곳을 향해 팔을 벌렸다. 식물들은 단 하나의 식물이 되기 위해 불어났다. 나는 단 하나의 식물을 통과하기 위해 불어났다.// 나는 불어났다./ 그를 향해/ 내 방에 이식된 그를 향해// 나는 계속되었다.//

포장품 / 이수명
물건은 묶여 있다. 나는 줄을 풀고 있다. 누군가 포장된 도로 위를 달린다.// 물건은 포장되어 묶여 있다. 나는 포장을 동여맨 줄을 풀고 있다. 누군가 포장된 도로 위를 달린다.// 물건은 여러 겹의 비닐로 포장되어 묶여 있다. 나는 비닐을 조르고 있는 줄을 풀고 있다. 누군가 포장된 도로 위를 달린다.// 물건은 토막 내져 검은 비닐에 담긴 채 묶여 있다. 나는 풀수록 조여드는 줄을 풀고 있다. 이쪽을 풀면 저쪽이 엉킨다. 이쪽을 풀면 누군가 이쪽을 다시 묶는다. 누군가 포장된 도로 위를 달린다.// 물건은 묶여 있다.//

우편배달부 김 / 이수명
우편배달부 김은 편지를 가져온다./ 나는 편지를 읽고 편지는/ 찢어지거나 서랍 속으로 사라진다./ 우편배달부 김은 소포를 전해준다./ 나는 받아든 책을 펼친다./ 펼치는 순간 나는 타락한다./ 우편배달부 김은 미국에서, 독일에서, 서울에서 부친/ 이것저것을 주고 간다./ 이것저것은 썩어들어간다./ 열어보기도 전에 썩어들어간다./ 우편배딜부 김은 우편배달부 김을 배달한다./ 편지도 책도 물건도 아니고/ 편지와 책과 물건을 배달하는/ 우편배달부 김/ 우편배달부 김/ 우편배달부 김만을 계속해서 배달한다./ 누가 보내는 것일까/ 생각하는 사이/ 우편배달부 김은 내게 인사를 하고 물러간다.//

그와 이야기를 할 때면 / 이수명
그와 이야기를 할 때면/ 나는 한 그루 사과나무가 되고/ 사과들을 떨어뜨린다./ 그와 이야기를 할 때면/ 그의 눈에서 눈동자가 하나/ 떨어져내리는 것을 나는 본다./ 나를 바라보던 눈동자가 흙이 묻는다./ 그와 이야기를 할 때면/ 마지막 벽돌이 들어 올려지고/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은 지하가 솟구쳐 올라온다./ 나는 일어선다./ 일어서서/ 그와 이야기를 할 때면/ 그 지하의 어둠 속으로 자맥질하는 한 그루 자외선/ 한 그루 사과나무가 된다./ 나는 사과들을 떨어뜨린다./ 그와 이야기를 할 때면/ 나는 내가 떨어뜨린 사과들을 먹는다./ 사과 속에 깊이 박혀든 그의 눈동자를 먹는다.//

벽돌 쌓기 / 이수명
비 오는 날이면 나는 벽돌을 쌓는다/ 한장 한장/ 눈먼 벽돌들/ 잠자는 벽돌들을/ 끝없이 높이 쌓는다./ 내가 잠들 때까지/ 내가 고함쳐 벽돌들을/ 와르르 깨워도/ 깨진 채/ 벽돌들이 다시 무거운 잠에 빠지고/ 나도 그 위에서 고요해질 때까지/ 벽돌처럼 붉은 침묵의 핏덩이가 될 때까지/ 그 핏덩이로 굳어버릴 때까지/ 나는 쌓는다./ 비 오는 날이면/ 죽은 자의 이빨같이/ 움직이지 않는 벽돌들을/ 나란히 차곡차곡 가슴속에/ 쌓는다./ 빗물이 스미지 않게/ 빗물이 나를 맛보지 않게/ 눈먼 벽돌들을//

트랙 / 이수명
벽 속에 한 무더기의 전선들을 심는다. 벽을 따라 전선들을 심는다. 내가 심은 전선들은 내가 심은 전선들과 얽혀 내가 심지 않은 전선들을 만들어낸다. 죽은 전사들의 시신을 넘는 전선들을 만들어낸다./ 나는 간혹 스위치를 올린다. 전선들을 따라 전류들이 흐른다. 내가 타는 전류들은 내가 타는 전류들과 얽혀 내가 타오르지 않는 전류들을 만들어낸다. 죽은 전선들의 시신을 차갑게 이동하는 전류들을 만들어낸다.//

스무 개의 상자를 들고 오는 스무 명의 사람들 / 이수명
그들이 온다. 그들이 다가온다. 거리를 가득 메우고/ 조금씩 천천히 다가온다.// 모르는 얼굴들이다./ 나는 모른다.// 무국적자, 불법 체류자, 방화범, 무단침입자, 금치산자, 탈옥자, 좀비// 나는 모르지만 나를 알고 있는 얼굴들이다. 나는 피하지만 나를 피하지 않는 얼굴들이다. 나는 뚜껑을 열었지만 다시 닫힌 상자들이다// 그들이 온다, 한꺼번에 온다. 손에 똑같은 상자를 들고 상자들을 말없이가까이 다가온다.// 나는 그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나는 기다린다. 나를/ 그들이 에워싸기를 기다린다.//

두 개의 문 / 이수명
그는 두 개의 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들어가는 문과 나오는 문입니다. 일하러 갈 때, 누군가를 만나러 갈때, 가벼운 산책을 할 때도 그는 이 문들을 가지고 다닙니다. 들어가는 문을 통해 들어가 하루의 일들을 처리한 뒤 나오는 문을 통해 나옵니다. 하지만 어떤 날은 들어가는 문으로 계속 들어가기만 합니다. 들어가고 들어가도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날은 나오는 문으로 계속 나오기만 합니다. 나오고 나와도 빠져나오지 못하고 붙들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때로 들어가는 문으로 나오고 나오는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방향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혹은 방향이 잘못되었거나 없기 때문입니다. 드물지만 세워놓은 자리에서 문이 사라지기도 합니다. 그러면 문을 찾아 헤매느라 그는 돌아오지 못합니다. 그가 문을 찾다 지쳐 쓰러지면 문이 그에게로 돌아옵니다. 그는 다시 자신의 문을 들락거립니다. 달팽이가 집을 지고 다니는 것처럼 그는 문을 지니고 다닙니다. 그의 문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페문'이라 쓰인 거대한 닫힌 문 앞에 서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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