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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강성은 시인

부흐고비 2021. 12. 1. 08:51

강성은 시인
1973년 경북 의성에서 태어났다.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숙명여대 불문과 4년 휴학.

2005년 <문학동네>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특유의 초현실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환상적인 시공간을 그려내는 시인이다. 시집으로 『Lo-fi』, 『단지 조금 이상한』,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 『별일 없습니다 이따금 눈이 내리고요』가 있다. '인스턴트' 동인. 동료들이 뽐은 올해의 시인상, 대산문학상 수상.

 




죄와 벌 / 강성은
좋은 사람들이 몰려왔다가/ 자꾸 나를 먼 곳에 옮겨 놓고 가버린다// 나는 바지에 묻은 흙을 툭툭 털고 일어나/ 좋은 사람들을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온다// 쌀을 씻고 두부를 썰다/ 식탁에 앉아 숟가락을 들고/ 불을 끄고 잠자리에 누워// 생각한다/ 생각한다// 생각한다//

섣달그믐 / 강성은
고양이가 책상 위에 잠들어 있다/ 고양이를 깨우고 싶지 않아/ 나는 따뜻한 음식을 만들기로 한다/ 손에 든 감자 자루를 놓치자/ 작은 감자알이 끝도 없이 굴러 나온다/ 쏟아지는 감자를/ 어찌할 수 없어 멍하니 바라보는데/ 갑자기 라디오가 저절로 켜지고/ 어제 들었던 노래가 흘러나와/ 밖에선 종말처럼 어두운 눈이 내리고 있고/ 나는 이제 잠에서 깨버릴 것 같은데/ 집이 점점 더 깊어지고 있다/ 고양이가 너무 오래 잔다//

밝은 미래 / 강성은
자정 너머 눈 쌓인 길을 걸어 집으로 가는 남자/ 인적 없는 밤길/ 둘에 하나는 고장 난 가로등/ 갸우뚱했지만 남자는/ 발이 푹푹 빠져 들어가는 눈길을 겨우 헤치고 나아간다/ 어디선가 살아 있는 것이 낑낑거리는 소릴 들었지/ 눈 속에 파묻힌 개를 끌어 올려 품에 안고/ 작은 개야, 오늘 밤은 나와 함께 가자/ 다시 컴컴한 어둠 속에서/ 길을 찾아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 장면을 보던 나는 알아버렸지/ 아, 나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구나// 저들은 아주 행복해 보였고/ 그것은 오래전의 먼 일이었으나// 가능하다면 미래이길/ 나는 그들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카프카의 잠 / 강성은
그는 야근을 하고 있었다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고/ 라고 쓰자 그는 잠이 쏟아졌다// 그가 책상 위에 쌓인 서류 더미를 뒤적이고 있을 때 누군가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똑똑 이 야심한 시각에 사무실을 방문한 사람이 누굴까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걸어가 문을 열어주려 했으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굳게 잠긴 문을 열어보려 애쓰다 이 문은 밖에서 열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곤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유심히 문을 바라보던 그는 조심스럽게 두드려보았다 똑똑//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시 똑똑/ 그는 갇힌 것이다/ 아무도 없는 밤에/ 눈 내리는 사무실에/ 어마어마한 눈이 쏟아지고 쌓이고 있는데/ 건물이 눈 속에 파묻힐 것 같은데// 그는 나가지도 못하고/ 그를 도와주러 올 이 하나 없는 것이다/ 저 눈을 멈추게도 할 수 없는 것이다// 흰 눈은 펑펑 쏟아지고/ 누구도 저 희고 무서운 것을 멈추게 할 수는 없어// 그가 잠에서 깨어나길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그가 삶을 포기하고 나면/ 죽음을 기다리고 있으면/ 모든 것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가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사랑의 방 / 강성은
새벽 두 시 현관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고 문을 열자 경찰관이었고 그는 내게 함께 가야 한다고 했다 이런 일은 원래 갑작스런 것이라고 환하게 불 켜진 파출소로 들어가자 긴 의자에 앉아 기다리라고 했다 그는 부산스럽게 왔다 갔다 하며 컴퓨터로 업무를 보고 몇 통의 전화를 받아 짧게 사무적인 말들을 했다 나는 그에게 언제까지 여기 앉아 있어야 하냐고 물었지만 곤란하다는 듯 좀더 기다려 보라 말했다 다른 사람은 없었다 그는 무척 피곤해 보였는데 구벅꾸벅 졸더니 그만 책상에 엎드렸다 나는 여기 계속 앉아 있어야 할까 고민했지만 그렇다고 딱히 도망치듯 나갈 수도 없었다 잠든 그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늙고 병들어 보였다 겉옷을 벗어 그에게 덮어주고 그의 책상에서 죽어있는 화초에 물을 주었다 중얼거리듯 그가 잃어버린 것이 있지 않습니까, 라고 내게 물었다 그리고 반드시, 반드시 찾을 겁니다, 라고 잠꼬대하듯 말하더니 다시 잠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다시 긴 의자로 돌아가 앉았다 잃어버린 것이 분명히 있는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런 질문과 이런 밤이 처음은 아닌 것 같았다 잃어버린 것이 있다//

환상의 빛 / 강성은
집은 햇빛에 불타고/ 나는 깨끗한 물에서 잠들었다/ 입술이 파래질 때까지 여름 속에서 나오지 못했다//

비닐하우스 / 강성은
추워서 들어간 그곳이/ 말할 수 없이 포근해 놀랐습니다/ 검고 촉촉한 밭고랑 사이로/ 푸른 상추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밖은 겨울/ 이토록 얇은 비닐일 뿐인데// 겨드랑이에 땀이 났습니다// 안이 너무 넓고 투명해/ 출구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비닐 너머에/ 환하고 환한 빛들이 있는 것처럼// 상추는 믿을 수 없이/ 크고 싱싱한/ 날개를 펄럭이며// 이곳은 누구의 집인지/ 누구의 꿈속인지/ 묻지 않았고// 끝없는 겨울이라고/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계면界面 / 강성은
k는 죽은 후에도 가끔 산책을 한다/ p는 죽은 후에도 가끔 시를 쓰고 담배를 핀다/ r은 술을 마시고 꿈도 꾼다/ 어제는 오래전 죽은 친구를 만나 강에서 수영을 했는데/ 죽었다는 사실을 잊었다/ b는 살아 있는 사람인 척 온종일 카페에 앉아 있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옆 테이블에서 떠드는 사람들도/ 살아 있는 척하느라 그런 것 같았다/ 도시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누가 죽은 사람인지 산 사람인지 구별하기 어려웠다/ m은 아이를 낳고 나서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은 잊기로 했다/ 생각해봐야 좋을 것이 없었다/ h는 죽은 애인과, y는 산 애인과/ 결혼식을 올렸다 모두의 축복을 받으며/ 죽음이 그들을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하기로 맹세했다/ g는 죽었다가 일 년에 한 번씩 깨어나/ 자신의 개가 잘 지내는지 확인하고 다시 죽었다/ z는 매일 해산물 요리를 먹으며/ 죽어서도 이걸 먹을 수 있다면 죽음 따윈 문제될 게 없다고 확신했다/ w는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 오직 완전한 죽음을 바랐다/ 한밤중 불 켜진 사무실/ n은 매일 밤 야근을 했다/ 그러다 책상 위에 쓰러져 잠이 들었고/ 잠에서 깨면 다시 야근이 시작되었다/ 불 꺼진 시장에서 버려진 야채를 줍던 노인은/ 늘어선 천막과 전깃줄 위로 가득 내려앉은 검은 까마귀 떼를 보고/ 두려워하지도 도망가지도 않았다/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다면/ 죽음이 무슨 소용인가요/ 가수는 노래하고 입을 다물지 못하고/ 죽고 죽고 죽어도 다시 살아나 노래하고/ s는 어제 쓴 일기를 반복해 써 내려가고/ c는 읽을 수 없는 글자들을 매일 베껴 적는다/ 불행한 일들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고/ 불운한 날들이 빛처럼 쏟아져 내려도/ 도시가 잠기도록 비가 내려도//

말을 때리는 사람들 / 강성은
말을 탄 적 없는데/ 말을 본 적도 없는데// 언제부턴가 나는 말을 때리고 있다/ 이 매질을 멈출 수가 없다// 누가 명령했을까/ 더 세게 때려야 더 빨리/ 더 더 먼 곳으로 간다고// 말의 얼굴을 눈을 슬픔을 보지 않으려고/ 말의 뒤에서/ 나는 말을 때리는 사람이 되었지// 말을 때리는 소녀는 자라서/ 말을 때리는 노인이 되고/ 말을 때리는 이웃이 되고/ 말을 때리는 밤이 되고// 말을 때리라는 목소리가 되고/ 보이지 않는 말을 만들어내는 믿음이 되고// 말이 얼마나 큰지/ 말이 얼마나 오래 달리는지/ 말을 때리는 소녀는 아직 모른다//

개의 밤이 깊어지고 / 강성은
개가 코를 곤다 울면서 잠꼬대를 한다 사람의 꿈을 꾸고 있나 보다 개의 꿈속의 사람은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개가 되는 꿈을 꾸고 울면서 잠꼬대를 하는데 깨울 수가 없다// 어떤 별에서 나는 곰팡이로 살고 있었다 죽은 건 아니었지만 곰팡이로서 살아 있다는 것이 슬퍼서 엉엉 울었는데 아무도 깨울 수가 없었다// 개는 나를 바라보는데/ 깨울 수가 없었을 것이다//

부고訃告 / 강성은
그해 시월/ 공중에는 검댕이 마구 날아다녔다/ 사람들은 마스크를 쓰고 우산으로도 막아봤지만/ 피할 수 없었다/ 밤이 되면 씻고/ 낮이면 다시 더러워졌다// 십일월의 나뭇잎들은 나무에 매달려 지지 않았다/ 검고 불길한 생물처럼 보였다/ 바람이 불면 울면서 노래도 불렀다// 십이월이 오자/ 검은 것들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저것이 눈이라니 (저것이 눈인가, 저 검은 것이 눈이라니)/ 믿을 수 없다는 듯 탄식하는 사람들 사이로/ 신난 개들이 뛰어다녔다// 더러워진다고 죽는 건 아니다/ 잠들기 전 사람들은 눈을 감고 속으로 되뇌었다// 먼 곳에서 발생한 큰불이 꺼지지 않고 있다는 걸/ 곧 이곳을 휩쓸 거라는 걸// 그들은 몰랐다/ 그들만 몰랐다//

기일忌日 / 강성은
버려야 할 물건이 많다/ 집 앞은 이미 버려진 물건들로 가득하다// 죽은 사람의 물건을 버리고 나면 보낼 수 있다/ 죽지 않았으면 죽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나를 내다 버리고 오는 사람의 마음도 이해할 것만 같다// 한밤중 누군가 버리고 갔다/ 한밤중 누군가 다시 쓰레기 더미를 뒤지고 있다// 창밖 가로등 아래/ 밤새 부스럭거리는 소리//

Ghost / 강성은
새벽 두 시 유모차를 밀며 가는 젊은 여자/ 한없이 맑은 고층빌딩 유리창으로/ 날마다 날아가 부딪히는 여자/ 여름에도 겨울에도 맨발로 다니는 여자/ 혼자 동물원에 가는 여자/ 눈이 내릴 땐 죽고 싶은 여자/ 불가능과 불가해와 영원이라는 말을 늘 생각하는 여자/ 파도가 검은 빛으로 변하는 걸 지켜보는 여자/ 죽은 아이를 업고 다니면서도/ 왜 이리 무거운지 모르는 여자/ 달리는 자동차가 뒤집혀도/ 아파트 옥상에서 떨어져도/ 깊은 밤 거울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가라앉아도/ 다시 살아 기어 나오는 여자/ 아름다움을 슬픔으로/ 사랑을 고통으로 아는 여자/ 그날 이후 얼음이 된 여자/ 얼음을 도끼로 내리치는 여자/ 매일 밤 베틀 앞에서 자신의 수의를 짜는/ 죽지 않는 늙은 여자//

안티고네 / 강성은
좁고 어두운 방/ 창가에 기대서서/ 마지막 햇빛이 떠나가는 걸 본다// 오늘 죽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고/ 오늘 산 자는 영원히 살지 않고// 결코 다시 죽지 않으리// 마지막 햇빛이/ 사라지는 걸 본다//

0℃ / 강성은
라디오를 켜놓은 채 잠이 들었다/ 일어나 보니 눈이 내리고 있었다// 꿈속에는 과거의 사람들만 가득했다/ 알지 못하는 사람들마저도// 공동묘지와 아파트가 구분되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과 죽어 있다는 것이 구분되지 않는// 햇볕 속에서 곡소리가 들렸다// 제설차가 지나갔다// 죽은 사람이 아직도 노래를 부르고 있다/ 우리 집 지붕 위에서//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 강성은
도시에서 사람들은 영원히 젊어 보였다/ 죽음이라는 유산을 물려받았지만/ 누구도 거절하지 못했다/ 죽어야만 가장 먼 곳을 여행할 수 있다는 것을/ 달에 다녀온 사람도 알지 못했다/ 때로 깊은 밤/ 극장의 어둠 속에서만 눈물을 흘렸다/ 창밖으로 미끄러져가는 빙하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한여름에도 녹지 않는/ 지구만큼 오래된/ 한없이 깊은 잠// 그런 밤이면 연필을 깎고/ 나는 백지 속으로 들어갔다// 너무 오래 잠들어/ 꿈이 나를 떠났다//

미아의 겨울 / 강성은
아침밥을 만들어놓고 한나절을 기다렸는데/ 개와 고양이와 토끼가 오지 않았다/ 미아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젯밤 숲에서 얼어 죽은 건 아닐까/ 밤사이 온도계의 유리는 깨져 있었다/ 미아의 낡은 집은 바람이 불 때다 덜컹거렸지/ 해마다 겨울이면 많은 이가 죽었다/ 늙어버린 미아의 친구들은 이제 다들 고아가 되었다고/ 울먹이며 말했지/ 고아가 아닌 적 없었던 미아는/ 막연히 슬프고 왜 우는지 모르면서 운다/ 오늘 밤엔 또 누가 고아가 될까/ 겨울밤엔 끝나지 않는 긴 소설을 읽어도/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고/ 눈 속에서 얼음이 된/ 춥고 배고픈 개와 고양이와 토끼를 생각하다가/ 캄캄한 밤 등불을 들고/ 어두운 처마들을 지나 백색 나무들을 지나/ 겨울 숲으로 들어간다/ 오늘 밤엔 또 누가 고아가 될까//

겨울밤 / 강성은
물레가 돌아간다 투명한 실들이 흘러나온다 구불구불 빛이 흘러나온다 끝을 모르는 실들이 둥글게 감기고 또 감긴다 물레는 돌아가고 소녀는 비명을 지른다 날카로운 바늘이 통과한 손끝에선 새빨간 핏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내 몸은 너무 오래 이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밤을 돌리고 달을 돌리고 죽음을 돌리고 나를 돌려도 창밖은 아직 검고 바람은 성난 개처럼 유리창을 부수네 투명하고 무거운 실들은 내 발목을 칭칭 감고 놓아주지 않네 물레는 돌아가고 소녀는 비명을 지르고 늙은 여인은 노래 부른다 그녀 몸속에는 녹슨 바늘이 수천 개 찢기고 너덜너덜해진 그녀 몸속을 바느질하네 저 무서운 실들은 모두 그녀의 백발이라네 물레는 돌아가고 소녀는 비명을 지르고 늙은 여인은 노래 부르고 창밖에는 눈이 내린다 하얀 머리 위에 또 하얀 머리칼 하얀 눈 위에 또 하얀 눈송이들 어떤 노래는 백년째 불리워지네 어떤 날개는 백년째 만들어도 완성되지 못하네 저 보이지 않는 무서운 실들 좀 봐 밤은 탄식하고 어떤 겨울은 백년째 계속되네//

12월 / 강성은
씹던 바람을 벽에 붙여놓고/ 돌아서자 겨울이다/ 이른 눈이 내리자/ 취한 구름이 엉덩이를 내놓고 다녔다/ 잠들 때마다 아홉 가지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날 버린 애인들을 하나씩 요리했다/ 그런 날이면 변기 위에서 오래 양치질을 했다/ 아침마다 가위로 잘라내도/ 상처 없이 머리카락은 바닥까지 자라나 있었다/ 휴일에는 검은 안경을 쓴 남자가 검은 우산을 쓰고 지나갔다/ 동네 영화관에서 잠들었다/ 지루한 눈물이 반성도 없이 자꾸만 태어났다/ 종종 지붕 위에서 길을 잃었다/ 텅 빈 테라스에서 달과 체스를 두었다/ 흑백이었다 무성영화였다/ 다시 눈이 내렸다/ 턴테이블 위에 걸어둔 무의식이 입안에 독을 품고/ 벽장에서 뛰쳐나온 앨범이 칼을 들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숨죽이고 있던 어둠이 미끄러져내렸다/ 어디선가 본 적 있는 음악이/ 남극의 해처럼 게으르게 얼음을 녹이려 애썼다/ 달력을 떼어 죽은 숫자들을 말아 피웠다/ 뿌연 햇빛이 자욱하게 피어올랐지만/ 아무것도 녹진 않았다//

성탄전야 / 강성은
자정 너머/ TV 속의 성탄절 합창제를 보고 있었다/ 흑인 남자의 구렁이 같은 입안에서/ 거룩한 밤이 흘러나왔다/ 거룩한 밤/ 아이가 피아노를 치고 있다/ 멜로디는 아이의 입속에서 굴러나온다/ 종이피아노는 한번도 소리낸 적이 없다/ 아이는 피아노 건반을 입속에 구겨넣는다/ 거룩한 밤/ 나는 TV 속으로 걸어가 남자의 입을 틀어막았다/ 내 입속에서 부러진 건반들이 쏟아져나왔다/ 거룩한 퍼포먼스에 사람들이 기립박수를 쳤다/ 옆집 아이들과 산타할아버지가 쏟아져나왔다/ 사람들이 허둥지둥 달아났다/ 거룩한 밤/ 거룩한 TV 속에 나 혼자 있었다/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건반들이 불협화음을 내며/ 거룩한 밤을 연주했다/ 사람들이 눈을 뭉쳐 TV 속으로 던졌다/ 나는 입속에 손가락을 넣어/ 검고 하얀 뼈들을 하나씩 뽑아냈다/ 내 비명이 리듬을 타고 울려퍼졌다/ TV 밖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이/ 거룩한 밤을 합창하기 시작했다//

동지冬至 / 강성은
누군가 내 얼굴 위에 글자를 쓰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은 채 그 글자들을 따라가고 있었다/ 내 얼굴은 얼마나 넓은지/ 글은 얼마나 긴지/ 나는 앞서간 글자를 잊고/ 밤새 그의 손길을 따라갔다/ 너무 멀리 가서/ 돌아오지 못할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사이 누군가 빗자루로 내 잠을 저만치 쓸어놓고/ 나를 먼 데로 옮겨다 놓고/ 나는 저만치 쓸려갔다 쓸려오고/ 그 위로 눈이 쌓였다/ 그의 밤은 얼마나 긴지/ 나의 밤은 얼마나 먼지// 끝없이 계속되었다//

소설小雪 / 강성은
꿈에서 배를 가르자/ 흰 솜뭉치가 끝없이 나왔다// 겨울이면 옷 속에 새를 넣어 다닌다는 사람을 생각했다/ 별일 없습니다 이따금 눈이 내리고요//

환상의 빛 / 강성은
등뒤에서 악령들이 내 긴 머리를 땋았다/ 희고 가녀린 손으로/ 입속에서 허연 김을 내뿜으며/ 나는 손가락을 뻗어/ 뿌연 유리창 위에 밤의 다른 이름들을 써내려갔다/ 겨울의 다른 이름들을 써내려갔다/ 나의 다른 이름들을 써내려갔다/ 창밖으로 몽유병의 신부와 들러리들이 맨발로 흰 드레스를 끌며 나타났다 사라졌다/ 어두운 거리는 밤새 골목을 만들었다가 숨겼다/ 어째서 머리칼은 계속해서 자라고 창밖의 폭풍은 멈추지 않는 걸까/ 등뒤에서 악령들이 내 긴 머리를 땋는다/ 희고 빛나는 물을 뚝뚝 흘리며/ 낮은 중얼거림으로/ 어째서 이 밤에는 저 오래된 거리에는/ 내 몸속에는 불빛 하나 켜지지 않는 걸까/ 예감으로 휩싸인 계절은 연속상영되고/ 새들은 지붕 위에서 오래 잠들어 있다/ 기약을 먹고 나는 다시 잠들겠지만/ 먼지는 밤사이 도시를 또 뒤덮을 것이고/ 내가 잠들면 시작되는/ 이 겨울밤의 자막은/ 내가 쓴 이름들과 기호들과/ 본 적 없는 빛의 알 수 업는 조합/ 나는 끝내 읽지 못한다//

고딕시대와 낭만주의자들 / 강성은
뾰족한 첨탑 위에 갇힌 누군가 구름에 편지를 써요/ 그럴 때 구름은 검은 빗방울을 뚝뚝 떨어뜨리지요/ 구름의 얼룩진 편지를 읽는 어떤 이들은/ 울음을 멈추고 검은 강물 속으로 몸을 던집니다/ 도시엔 무서운 전염병이 돌고/ 녹색의 박쥐떼가 공중을 날아다닙니다/ 창백한 입술을 잃은 자들은/ 곧 두 손과 머리털을 잃고 두 눈알과 심장을 잃었지요/ 점점 희미해져 우리는 우리를 잃었지요/ 신과 나의 비밀 이야기는 입속에서 입속으로/ 공기와 밤의 중얼거림을 통과하고/ 얼룩진 편지는 얼룩고양이가 물고 밤의 담장 너머로 사라집니다/ 우리는 내일의 날씨를 예측할 수 있지만/ 내일의 악몽을 점칠 수는 없었어요/ 빗방울은 때로 격렬하게 내립니다/ 한 방울 뒤에는 수천만 우주의 모든 물방울들이/ 뾰족하고 오래된 첨탑 위의 편지는/ 전해오는 이야기 속에서 날마다 더 아름다워져갑니다/ 우리는 첨탑 위로 답장을 보내는 법을 모르고/ 얼음이 어는 순간과 얼음이 녹는 순간 슬픔의 음역을/ 영원히 알 수 없겠지만//

어떤 나라 / 강성은
어떤 나라에서는/ 청바지를 입는 것이 금지되었고/ 청바지 밀수입업자가 교수형을 당했다/ 그러나 집집마다 옷장 속 깊숙이 청바지는 패물처럼 숨겨져 있고// 어떤 나라에서는/ 부모가 늙으면 산에 버리러 가야 하는데/ 빵 부스러기를 떨어뜨리며 아들은 새처럼 울었다/ 그러나 산에서 내려오는 순간 자신의 몸에 밴 늙은이 냄새// 어떤 나라에서는/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 금지되었는데/ 피아니스트는 타이피스트가/ 드러머는 대장장이가/ 가수는 약장수가 되었다/ 음악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어떤 나라에서는/ 어디가 영토의 시작인지 끝인지 몰라 지도를 그릴 수가 없었다/ 하루는 요람처럼 작아졌다가/ 하루는 관처럼 거대해졌다가/ 하루는 사라지기도 했다// 어떤 나라에서는/ 죽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꿈꾸는 것과/ 오래 잠을 자는 것은 허용되었다// 어떤 나라에서는/ 아무도 살지 않는데/ 날마다 조종이 울렸다//

살인은 연애처럼 연애는 살인처럼* / 강성은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야 누군가 길에 내놓은 의자는 목이 긴 여자처럼 혼자 서 있다 골목을 돌면 또다른 골목이 나타나고 나는 내 얼굴이 기억나지 않아 상점의 유리를 쳐다본다 투명하고 희마하게 우리는 닮아 있어 너는 잠든 내 얼굴을 쳐다보기도 하는 것일까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야 창백한 인형들이 줄지어 약국으로 들어간다 검은 새들이 유리문을 쪼아댄다 어둠이 이 거리를 우주 저 먼 시간으로 옮겨놓을 때까지// 너를 읽다가 너를 베고 누웠다 눈을 뜨고 감는 사이 어쩌면 이것은 우아한 카니발리즘의 세계 내가 너를 씹어먹고 네가 나를 흡수하고 서서히 가늘고 희미해져 가고 말라가고 뼈만 남는다 우리는 가장 가벼운 책이 되고 싶었지 바람이 불면 한 장씩 날아가 침묵에 이르는,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다 낮잠에서 문득 깨어나 팔을 깨물어본다 좀비가 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꿈의 어떤 장면에서는 비가 내리고 나는 우산도 없이 달린다 어떤 사람에게 나는 죽을 때까지 한 가지의 인상으로 존재할 것이다 나는 달린다 뼈들이 부딪혀 경쾌한 소리를 낸다 한밤중에 내리는 빗소리처럼//
* 트뤼포가 히치콕의 영화에 대해 한 말.

얼음나라 여자들 / 강성은
엄마는 죽은 할머니의 스웨터를 풀어 우리의 스웨터를 짰다 할머니는 이렇게 냄새나는 스웨터를 입고 다녔어 우리가 이 스웨터를 입지 않으려고 삼년 동안 가출한 걸 할머니는 알까 비닐옷만 입고 다닌 걸 할머니는 알까 우리는 삼년 동안 빈 칼집만 차고 다니거나 이 빠진 칼로 새를 토막내는 사람들을 보았다 공원에서 쥐들에게 빵을 나눠주고 쥐들이 남긴 것을 먹는 사람을 보았다 바람에 날아가는 헐렁한 모자를 쫓느라 우리는 맨발로 눈 쌓인 산을 일곱 개나 넘었다 우리는 추웠어 우리는 따뜻한 털가죽을 갖고 싶었다 엄마는 스웨터만 잔뜩 짜놓고 죽었다 우리는 비닐 위에 냄새나는 스웨터를 입었다 죽은 할머니의 스웨터를 입었지만 일년 내내 동상에 걸렸다 검은 발에서 시퍼런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우리는 죽은 엄마의 스웨터를 풀어 우리의 발을 짠다 엄마는 이렇게 냄새나는 스웨터를 입고 다녔어 엄마도 우리처럼 발이 시렸을까 엄마도 우리처럼 피를 흘리면서도 뜨개질을 멈추지 않았을까//

한낮의 몽유 / 강성은
정수리의 태양이 일순간 검게 변해 흘러내리는데/ 잠든 아이들의 눈꺼풀을 나뭇잎처럼 똑똑 따는데/ 나쁜 구름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데/ 잠옷 차림의 나는 운동화 끈을 씹으며 다리 위를 걸어간다/ 이곳은 마녀의 젖꼭지처럼 추워/ 잠옷 속으로 얼음 손가락들이 들어왔다 이내 녹아지고/ 다리 위로 계절들은 달려가고 애인들은 흩어지고/ 나는 열두살 때 입었던 잠옷을 입은 채로 다리 위를 걸어간다/ 가로등 아래 반짝이는 동전들/ 늙은 개가 투명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 작은 눈 안에서 나는 개와 입맞춘다/ 청소부의 커다란 빗자루가 내 맨발을 부지런히 쓸어내린다/ 강물 위로 물고기의 붉은 눈알이 떠오른다/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 자장가를 부르며 나는 다리 위를 걸어간다/ 바닥에 흘러내린 검은 태양이 자꾸만 내 뒤를 따라온다/ 다리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다시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검은 호주머니 속의 산책 / 강성은
손이 시려서 너의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눈이 펄펄 날리고 있어서/ 나의 한 손을 거기 넣었다/ 그 캄캄한 곳에 너의 손이 있어서/ 나의 한 손을 거기 넣었다/ 그날 우리는 걸어서 어디로 갔나// 두근거리는 손 때문에 우리는 걷고 또 걸었다/ 흰 눈이 내리는데 햇빛이 환한데/ 낯선 곳에서 길을 잃었는데/ 심장이 된 손에 이끌려/ 우리는 쉬지 않고 걸어서 어디로 갔나// 우리는 발걸음을 멈춘 적이 없는데/ 우리는 잡은 두 손을 놓은 적이 없는데/ 호주머니 속에서/ 불안은 지느러미를 흔들며 헤엄쳐다니고/ 그림자로 존재하는 식물들이 무서운 속도로 자라났다/ 우리 두 손은 검게 썩어들어갔다// 어째서 너의 손은 이토록 비릿하고 아름다운가/ 우리는 말하지 않았다/ 검은 피가 흘러나와 우리 발목을 적실 때에도/ 우리는 이토록 생생한 봄을 상상했다// 언젠가 우리는 각자 다른 계절을 따라 사라졌지만/ 호주머니 속에는 아직도 폐허의 공터에/ 날카로운 손톱으로 서로를 깊숙이 찌른 두 손이/ 펄펄 날리는 흰 눈을 맞고 서 있다//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 / 강성은
잠든 사이 붉은 가로등이 켜졌다/ 붉은 가로등이 켜지는 사이 달에 눈이 내렸다/ 달에 눈이 내리는 사이 까마귀가 울었다/ 까마귀가 우는 사이 내 몸의 가지들은 몸속으로만 뻗어갔다/ 몸속에 가지들이 자라는 사이 말[言]들은 썩어 버려졌다/ 말들이 썩어 버려지는 사이 나는 구두 위에 구두를 또 신었다/ 구두를 신는 사이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왔다/ 여름이 오는 사이 도시의 모든 지붕들이 날아갔다/ 길들이 사라지는 사이 지붕을 찾으러 떠났던 사람들은 집을 잃었다/ 그사이 빛나던 여름이 죽었다/ 여름이 죽는 사이 내 몸속에선 검은 꽃들이 피어났다/ 검은 꽃이 피는 사이 나는 흰 구름을 읽었다/ 흰 구름을 읽는 사이 투명한 얼음의 냄새가 번져갔다/ 얼음 냄새가 번지는 사이 나는 구두 위에 구두를 또 신었다/ 열두 켤레의 구두를 더 신는 사이 계절은 바뀌지 않았다/ 구두의 계절이 계속되는 사이/ 나는 구두의 수를 세지 않았다/ 구두 속에서 나오지도 않았다//

가방 이야기 / 강성은
이것은 가방에 관한 이야기 철없던 오빠가 돈과 옷과 장난감을 가득 채워 집을 나갔던 커다란 가방에 관한 이야기다 다시 돌아온 오빠를 아버지와 어머니는 흠씬 두들겨팼지만 가방은 수척해진 모습으로 한쪽 구석에 서 있었다 지퍼를 열자 가방 속은 텅 비어 있었다 가방은 마루에서 다락으로 다락에서 창고로 옮겨졌고 어느새 오빠는 쾌활함을 되찾았다 다시 창고에서 가방을 꺼내온 건 아버지였다 냄새나는 지폐 뭉치들을 신문지로 싸서 가방에 담은 아버지는 어두운 새벽 집을 나섰다 아버지는 일주일 후 강물 위로 떠올랐지만 가방은 돌아오지 않았다 우리들은 아버지의 따뜻함을 떠올리려 애썼고 가방 따윈 잊어버렸다 어머니는 시장에서 생선을 팔았다 비린내가 나는 어머니의 양쪽 가슴을 나누어 만지며 밤마다 오빠와 나는 어른이 되는 꿈을 꾸었다 어느날 가방은 다시 우리집으로 돌아왔다 엄마가 들고 온 가방을 보고 우리는 소리쳤다 오빠가 들고 나갔던 가방이야 아빠가 들고 나갔던 가방이야 그 가방이야 엄마는 아니라고 했지만 우리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엄마는 분명 저 가방을 들고 우릴 떠날 거야 우리는 한밤중에 살금살금 일어나 가방 속으로 들어갔다 가방 속은 넓고 어두웠지만 온 집 안을 삼켰던 비린내는 나지 않았다 아이들이 사라졌어요 아침이 오자 엄마는 울면서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아무도 가방을 열지 않았다 우리를 가방 속에서 꺼내주지 않았다 아이들이 사라졌어요 아이들이 사라졌어요 엄마는 우리를 찾느라 돌아오지 않았다 가방 속에서 우리는 자라났다 이야기를 먹고 자라났다 가방이 들려주는, 가방 속에 가득 차 있던 수많은 이야기들은 끝나지 않았다 잊혀진 이야기들이었다 그 이야기 속에는 우리도 있었다 누군가 지퍼를 열어준다면 이 밤이 끝날 텐데 하지만 아무도 우리를 기억해주지 않았다 서로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맞잡은 두 손은 언제부턴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우리가 이미 오래전에 죽었다고 느꼈을 때 누군가 지퍼를 열었다 엄마였다 우리는 울면서 엄마에게 매달렸다 엄마는 노망난 늙은이들이라며 경찰서에 신고전화를 했다 우리와 함께 집에서 쫓겨난 것은 가방이었다 우리는 눈 내리는 밤 골목에서 가방과 함께 서 있었다 눈에 보이지만 유령이 된 것 같았다 차가운 눈이 조금씩 우리 위로 쌓였다 우리는 다시 가방 속으로 들어갔다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여기가 가방 속이라니 이렇게 따뜻한데 말이야//

아홉 개의 달이 떠 있는 밤 / 강성은
검은 보자기를 풀었다 아홉 개의 달이 풍선처럼 떠올랐다 수많은 음들이 떠올랐다 음과 음 사이의 미세한 침묵이 뒤이어 떠올랐다 검은 새가 푸드득 날아올랐다 내가 일곱 살 때 잃어버린 꼬리 달린 언어들이 떠올랐다 아름다운 이름들이 떠올랐다 심장 없는 인형들이 떠올랐다 눈 내리지 않던 그해 겨울이 떠올랐다 네 귀가 펄럭이던 그 겨울의 방이 떠올랐다 가지를 친 푸른 골목들이 떠올랐다 빛나는 그림자들이 새겨진 기왓장들이 떠올랐다 내가 엎지른 물들이 떠올랐다 물에 빠져죽은 열한번째 어머니가 떠올랐다 내 뺨을 찰싹 때리고는 멀어져갔다 모두 달에게 끌려올라가고 있었다 뒤이어 검은 보자기가 떠올랐다 보자기를 손에 꼭 쥐고 있던 나도 떠올랐다 우리는 투명한 줄에 동여매진 채로 공중으로 한없이 더 깊숙이 떠올랐다//

죽은 태양이 뜬 날 / 강성은
아무도 타지 않은 자동차들이 쌩쌩 달려갔다/ 눈먼 사람들이 지팡이를 짚고 횡단보도를 건넜다/ 새들도 따라 날았다/ 달려오던 트럭에 그림자 하나가 치었다/ 습관적으로 신호등이 눈을 감았다/ 녹색 곰팡이들이 사방에서 쓸쓸히 피어났다/ 쇼윈도 안에선 폭 넓은 치마가 백 년째 불타고 있었다/ 불 속에서 늙은 배우들이 연극 연습을 했다/ 아무도 불을 끄지 않았다/ 누군가 공원 벤치에 앉아 죽은 태양이 떨어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때로 태양의 붉은 피가 반짝거리며 죽은 자들의 이마를 찔렀다/ 묘비명들이 희미하게 짖어댔다/ 잠든 아이들만이 거리를 기웃거리며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다/ 노랫소리에 사람들이 하나 둘 잠들었다/ 죽은 태양의 유령이 거리를 뒤덮었다/ 죽은 자들이 눈을 비비며 일어섰다/ 잠든 아이들의 눈꺼풀 속에서 검은 태양이 떠올랐다//

이상한 욕실 / 강성은
당신의 몸은 조금씩 사라져간다/ 거품도 나지 않는 얇은 비누토막처럼/ 당신의 몸을 감추어주던 외투는/ 당신의 몸보다 훨씬 견고하고 아름다워서/ 거울을 보며 당신은 외투만 생각했다/ 욕실에서 가끔 당신은/ 당신의 목소리와 마주쳤지만/ 욕실에선 도무지 아무것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거울 속에서 당신의 몸은/ 구멍 속으로 날마다 조금씩 흘러들어갔다/ 욕실 밖에서/ 당신의 아름다운 외투는 덜렁거리며 혼자 걸어다녔다/ 태양이 늘 머리 위에서 빛났다/ 지친 새들이 떨어져 길을 덮었다/ 호주머니 속에서 생긴 구멍이 점점 커져갔다/ 당신은 당신이 어디 있는지 몰라 잠도 오지 않았다/ 이제 뿌연 거울 속에도 당신은 보이지 않았다/ 어느날 누군가 욕실 문을 열었다/ 다 해진 외투가 거울을 보며 당신을 생각하고 있었다/ 당신의 비명은 그대로 돌아와/ 당신 뺨을 철썩철썩 때리고 있었다//

아름다운 계단 / 강성은
다리를 벌리고 앉은 여자 아래/ 졸고 있는 죽은 고양이 옆에/ 남자의 펄럭이는 신문 속에/ 펼쳐진 해변 위에/ 파란 태양 너머/ 일요일의 장례식에/ 진혼곡을 부르는 수녀의 구두 사이로/ 달려가는 쥐를 탄/ 우울한 구름의 손목에서 흐르는/ 핏방울이 떨어져내린/ 시인의 안경이 바라보는/ 불타오르는 문장들이 잠든/ 한줌 재가 뿌려진/ 창밖의 검은 밤 속/ 흘러가는 기차를 탄/ 사내의 담배연기를 따라/ 붉은 달이 떠 있는/ 검은 딸기밭 아래/ 곱게 화장한 미친 여자 뱃속에/ 숨겨진 계단 사이로/ 길을 잃은 아이가/ 계단을 펼쳤다 접으며 아코디언을 켜고/ 계단은 사람들의 귓속으로 밀려들어왔다 밀려나가고/ 사람들은 눈을 감은 채로 계단을 하나씩 오르고/ 계단은 점점 더 느려져/ 잠이 든 채 연주되고//

아름다운 계절 / 강성은
눈보라가 그치고 무지개가 떴다/ 죽은 개를 묻으러 무지개 너머로 갔다// 어젯밤 내 얼굴을 핥던 개/ 잠 속에서도 내 얼굴을 핥았다// 깊은 밤/ 내 혀는 한없이 길어져/ 낯선 얼굴을 핥았다// 침이 흥건했다//죽은 개를 묻으러 무지개 너머로 갔다/ 돌아오지 않았다//

봄 / 강성은
소풍, 나뭇잎 한 장으로 수만 개의 태양을 가리는 시간/ 어쩌면 수만 개의 너// 고통, 투명한 거미줄을 몸속 가득 치는 노래/ 이빨이 부러지는 줄도 모르고 씹어먹는 검은 돌// 악기, 자신의 이름도 모르고 죽은 선조들의 뼈/ 제 이름을 부르며 죽어가는 군대// 적막의 시간, 검은 재, 빛나는 재, 따스한 재들/ 어느날 소년들의 머리 위에 새하얀 집을 짓는//

누가 그레텔 부인을 죽였나 / 강성은
누가 그레텔 부인을 죽였나/ 자줏빛 스카프가/ 내가 아름다운 두팔로/ 그녀를 목 졸랐네, 라고 말했네// 누가 그녀가 죽는 것을 보았지?/ 마룻바닥이/ 내 커다란 눈으로/ 떨어지는 핏방울들을 보았네, 라고 말했네// 누가 그녀의 피를 가져갔지?/ 양탄자가/ 내 고운 실들이/ 그녀의 피를 먹었지, 라고 말했네// 누가 그녀를 운반하지?/ 쓰레기통이/ 그녀를 토막내준다면/ 내가 운반하지, 라고 말했네// 누가 그녀를 토막내지?/ 가위가/ 그녀가 종이처럼 얇게 마른다면/ 내가 자르지, 라고 말했네// 누가 그녀를 말리지?/ 먼지가/ 그녀가 기억마저 잃었다면/ 내가 그녀를 감싸안고 까맣게 말리지, 라고 말했네// 누가 그녀의 기억을 가져가지?/ 그림자가/ 그녀가 쓴 노트들을 태운다면/ 내가 모든 기억을 데리고 달의 뒤편으로 가지, 라고 말했네// 누가 그녀의 노트들을 태우지?/ 태양이/ 그녀의 눈알들을 준다면/ 내가 노트들을 불살라버리지, 라고 말했네// 누가 그녀의 감은 눈꺼풀을 열고 눈알을 뽑지?/ 음악이/ 그녀의 목소리를 준다면/ 내가 그녀를 눈뜨게 하지, 라고 말했네// 누가 그녀를 깨워 노래 부르게 하지?/ 고통이/ 그녀가 지금도 나를 기억한다면/ 내가 그녀를 일으켜세워 노래 부르게 하지, 라고 말했네// 그레텔 부인은 하루 온종일 노래 부르네// 누가 그레텔 부인을 죽였나/ 누가 그레텔 부인을 죽였나/ 누가 내 사랑스런 그녀를 죽였나//

스물 / 강성은
나는 벌거벗고도 단추 채우는 방법을 알아요/ 숫자는 몰라도 시계는 스무 개가 넘어요/ 일요일엔 챙 넓은 모자를 쓰고 자전거를 탔어요/ 이런, 풀밭에서 느릿느릿 사전이나 씹어먹을 작자 같으니/ 나는 자전거를 걷어찼고 자전거는 달렸어요/ 달리기는 자전거와 나의 슬픈 식사/ 우리는 삐뚤삐뚤 주위를 맴돌다/ 아무도 없는 그곳을 빠져나왔어요/ 나는 많은 사람들 속에서 투명인간이 되는 법을 알아요/ 비가 올 때마다 젖지만 우산은 스무 개가 넘어요/ 오늘밤 달은 제 몸을 반이나 먹어치웠어요/ 달을 너무 오래 보면 미쳐버린다고 말해준 엄마/ 검은 옷장 속에서 지나온 계절들을 다림질하고 있겠죠/ 내가 내 몸을 반쯤 먹어치울 동안/ 문 열면 봄인 어느 저녁이 올 때까지/ 나는 나를 찌르고도 피 흘리지 않는 법을 알아요/ 어제도 시간은 하수구로 흘렀는데/ 햇살 아래 떠다니는 파도는 스무 개가 넘어요//

누가 너희를 이곳에 넣었니 / 강성은
여름이 포도알처럼 많은 혹을 달고 빈 골목을 달려갔다// 일요일엔 길 잃은 개들이 잠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며 개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다시 잠이 들었다// 금요일엔 하늘 가득 모자들이 둥둥 떠다니다가/ 내 머리 위에 차곡차곡 쌓였다/ 길가의 나무들을 만날 때마다 모자를 하나씩 벗으며 인사했다/ 안녕, 날씨가 좋군요 이런 날엔 모자가 제격이죠// 수요일엔 누군가 나에게 계속해서 물뿌리개로 물을 주었는데/ 침대보에서 피어난 장미넝쿨의 가시만 더 크고 억세게 자라났다/ 나는 잠에서 깨어나지도 잠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빗소리만 들었다// 토요일엔 빨랫줄에 젖은 모자들을 널었다/ 햇빛에 잘 마른 모자들은 가볍게 하늘을 날아가고/ 나는 여전히 젖은 채로 빨랫줄에 걸려 있었다// 일요일 어항 속에 열대어는 없고 온통 헤엄치는 개들뿐이었다/ 누가 너희를 이곳에 넣었니//

오, 사랑 / 강성은
우리는 달려간다 중세의 검은 성벽으로 악어가 사고 있는 뜨거운 강물 속으로/ 연필로 그린 작은 얼룩말을 타고 죄수들의 호송열차를 얻어타고/ 우리는 달려간다 눈가를 검게 화장한 여배우처럼/ 글러브를 끼고 아스피린을 먹으면서/ 짧지도 길지도 않은 즉흥곡 사이를 우리는 달려간다/ 죽은 군대의 첫 전쟁터로 우리의 발자국이 잠든 사원으로/ 우리는 우리를 읽지 못해 장님이 되는 밤/ 어둠속에서 총으로 서로의 심장을 정확히 쏘는 마술/ 톱으로 잘라낸 피투성이 몸을 다시 이어붙이는 마술/ 오래전에 연주했던 악장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끝없이 반복되는 도돌이표를 우리 몸에 새겨넣고/ 우리는 달리면서 눈을 감는데/ 우리는 달려가는데/ 새들은 울면서 노래하고//

서커스 천막 안에서 / 강성은
내 남편은 마술사예요/ 내 머리털에 기름을 끼얹고 성냥을 그어요/ 나는 커다랗게 환하게 웃어요 내 머리는 불타요/ 내 남편은 마술사예요/ 불 속에서 싱싱한 장미꽃을 피워올리지요/ 사람들은 놀란 눈으로 소리질러요 환호해요/ 붉은 장미 한 송이씩 따서 어여쁜 소녀들에게 나눠주지요/ 내 남편은 마술사예요/ 줄기와 가시만 남은 내 머리 속에 신비한 향신료를 넣고 휘휘 저어요/ 나는 커다랗게 환하게 웃어요 내 머리는 부글부글 끓어넘쳐요/ 내 남편은 마술사예요/ 내 머리 속에 끓고 있는 수프를 국자로 떠먹어요/ 사람들은 냄새를 맡고 취해요 서로의 머리통을 쪼개요 개들이 달려와요/ 내 남편은 마술사예요/ 검은 재로 남은 나를 주워모아 손으로 비벼요 훅 불어요/ 나는 커다랗게 환하게 웃어요 어두운 천막 밖으로 날아가요/ 내 남편은 마술사예요/ 긴 모자 속에 숨겨둔 내 머리털 하나로 다시 나를 만들어요/ 나는 새로 태어나 당신이 가르쳐준 대로만 자라나요/ 안녕, 안녕, 안녕, 우리는 방긋 웃으며 주문을 외워요/ 천막 안으로 달이 거대한 몸을 밀고 들어와요/ 사람들은 출구를 찾지 못해 달에게 깔려 납작해져요/ 마술은 슬프고 우습고 달콤하고 거대하게 끝나가요/ 나는 태어났다 죽었다를 반복하며 천막 안에서만 살아있어요/ 내 남편은 마술사예요//

혼자 있는 교실 / 강성은
나의 노트 속에는 폴라로이드 같은 안개/ 안개 속에는 사라졌다 나타났다를 반복하는/ 밤나무 숲과 국도가 있어요/ 나는 펼쳐진 노트 속으로 들어가 국도를 따라 걸어갑니다/ 숲에선 사소한 불빛 하나 나타나지 않고/ 국도는 물속처럼 어둡고/ 가끔 죽은 고양이가 느낌표처럼 벌떡벌떡 일어서요/ 나는 흘러가는 노트 속의 산책자/ 내 기록들의 방관적 수취인/ 맨발로 일렁이는 국도 속을 걸어가지요/ 누군가 책장을 넘겨요/ 바람이겠죠/ 혼자 있는 교실엔 늘 바람이 불었어요/ 밤나무 숲이, 국도가, 내가 흔들려요/ 국도 저 끝에서 환한 전조등 성난 개들처럼 달려와요/ 수만의 바퀴들이 일제히 나를 밟아요/ 몸은 유리알처럼 부서져 느리게 어디론가 굴러가요/ 문득 가로등이 켜지고/ 지나온 길마다 붉은 융단이 깔려요/ 아이들이 깔깔깔 웃으며 박수를 쳐요/ 선생님이 휘파람을 불어요/ 바람이 나를 읽어요/ 바람이 나를 정신없이 넘겨요/ 아직 씌어지지 않은 페이지까지 읽어요/ 바람이 나를 지워요/ 나도 나를 자꾸만 지워요/ 너덜너덜해진 이 노트의 마지막 페이지는 어디 있는 걸까요/ 혼자 있는 교실엔 바람이 불고 가끔 비가 내렸어요/ 나는 말랐다 젖었다/ 써졌다 지워지며/ 아무 데도 닿지 않아요//

음악 / 강성은
어항 속에서 놀다가 그만 숨 쉬는 법을 잊어버렸습니다/ 목소리만 존재하는 그가/ 한 편의 유서를 읽으며/ 내 머리채를 잡고 물속에서 끌어냅니다//

사춘기 / 강성은
어머니의 접시들을 꺼내자/ 접시 속에서/ 장미꽃이 뛰쳐나오고/ 고양이가 뛰쳐나오고/ 죽은 어머니가 뛰쳐나왔어요// 장미꽃과 고양이와 어머니는/ 온 집 안을 뛰어다니며/ 나를 찌르고, 물고, 목 졸랐어요/ 날마다 나는 포크를 들고 그들을 쫓느라/ 그해 겨울의 태양이 실종되었다는 기사조차 읽지 못했죠// 그러는 사이 나는 거인처럼 자랐고/ 어느 날 집은 모래처럼 주저앉았어요/ 장미꽃과 고양이와 어머니를 붙잡아/ 접시에 담아 비벼먹고 포크와 접시까지 씹어먹자/ 일 년치 밀린 잠이 한꺼번에 몰려왔어요// 악몽일까요, 태양은 일 년이 지나도 나타나질 않고/ 모래바람은 심장 속까지 불어오고/ 내 키는 자꾸만 자라 하늘까지 닿았어요/ 태양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고/ 그렇게 또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자꾸만 지나가요//

외계로부터의 답신 / 강성은
어떤 날은 한밤중 세탁기에서도 멜로디가 흘러나오지/ 냉장고에서도 가방 속에서도/ 심지어 변기에서도// 어떤 날은 내가 읽은 페이지마다 독이 묻어있고/ 내 머리털 사이로 예쁜 독버섯이 자라기도 한다/ 그런데 이상하지 나는 죽지 않고// 어떤 날은 미치도록 사랑에 빠져든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여자가 되어/ 그런데 이상하지 나는 병들어 가고// 어떤 날에는 우주로 쏘아올린 시들이 내 잠 속으로 떨어졌다*// 어쩌면 이것은 외계로부터의 답신/ 당신들이 보낸 것에 대한 우리들의 입장입니다//
* 2004.11월 스웨덴에서 북유럽의 시인들이 모여 외계인을 상대로 시 낭송회를 열었다. 26광년 떨어진 항성 베가를 향해 무선방송으로 시를 쏘아 올렸는데 그곳의 독자들에게 도달하려면 2054년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올란도 / 강성은
내가 아는 사람들 모두가 죽었다/ 몇 세기에 걸쳐 꿈을 꾸었다/ 수많은 계절들의 반복과 변주/ 수많은 사람들의 반복과 변주/ 어제와 내일의 경계가 사라져도/ 이 꿈은 사라지지 않아/ 죽기 위해 절벽에서 몸을 던지면/ 다음 생이 시작된다/ 너는 누구지? 너는 누구야?/ 밤이 저 오랜 질문을 던지고/ 슬그머니 얼굴을 바꾸면/ 다음 날이 시작된다/ 너는 누구지? 너는 누구야?/ 몇 세기에 걸쳐 떨어져 내리는 낙엽들/ 나의 노래들이 켜켜이 쌓여간다/ 나의 얼굴들이 켜켜이 쌓여간다/ 이 오랜 꿈이 끝나고/ 나 자신이 희고 빛나는 밤이 될 때/ 이것이 어떤 잠이었는지 알게 되리//

채광 / 강성은
창문에 돌을 던졌는데/ 깨지지 않는다// 생각날 때마다 던져도/ 깨지지 않는다// 밤이면 더 아름다워지는 창문// 환한 창문에 돌을 던져도/ 깨지지 않는다// 어느 날엔 몸을 던졌는데/ 나만 피투성이가 되고/ 창문은 깨지지 않는다// 투명한 창문/ 사람들이 모두 그 안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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