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수필 읽기

귀명창 / 정연원

부흐고비 2021. 11. 30. 14:14

2021 매일 시니어문학상 수상작

판소리에는 귀명창이 있다. 귀명창에는 추임새가 날고 있다.

판소리 공연장에 갔다. 그곳에서 귀명창을 만났다. 부채를 쥔 소리꾼과 북과 북채를 쥔 고수(鼓手) 뿐인 단촐한 무대다. 고수가 엇! 기합 소리를 내며 북채로 타당 탁, 북을 치자, 소리꾼이 춘향가의 쑥대머리 대목을 시작한다. '그때 춘향이는 옥중에서 머리를 풀고~' 이야기를 풀어내는 사설인 아니리를 한다. 다시 고수가 엇! 타당 탁, 북을 치면 소리꾼은 '쑥대머리~' 하며 본격적인 창으로 들어간다. 고수는 시작이나 변화, 음절마다 박을 치며 '얼씨구' '잘한다.' '좋다' 등 추임세로 소리꾼의 목을 풀고 흥을 불러낸다. 소리꾼의 창과 고수의 추임새에 몸짓의 발림이 어우러지면 조용하던 관중석이 소란해진다. 판소리를 들을 줄 아는 관중이 고수와 같은 추임새를 터트리며 연주회장의 분위기를 띄운다.

추임새를 하며 어울리는 관중들이 귀명창이었다. 일반적인 음악예술의 공연장에서 관중인 청자(聽者)와는 다른 관중이다. 판소리의 관중은 전문 소리꾼과 고수의 연주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단출한 연주를 귀명창의 추임세가 흥을 불러내어 큰 마당을 이루게 하는 연주의 구성 요소가 된다. 이로서 판소리의 소리꾼을 명창이라 부르듯 청자를 넘어선 듣는 자를 '귀가 명창'이라는 뜻으로 귀명창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부르는 자와 같이 듣는 자의 중요성을 나타내는 작명은 탁월하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관중을 연주자 처럼 높여 부르는 곳은 우리의 판소리뿐이다.

판소리의 소리꾼은 득음(得音)을 한다. 고수는 박(拍)을 이루어야 하고 관중은 지음(知音) 즉 귀명창이 되어야 한다. 셋이 어울려 만드는 음악이 판소리다. 명창은 득음을 위해 깊은 산속이나 폭포수 아래에서 목을 다듬어 앞섶이 몇 번이나 붉게 물든다. 고수는 박은 물론 변화와 전체를 헤아리는 반주자와 지휘자 역할을 익힌다. 귀명창은 지음을 위해 구조며 역사를 막론하고 듣기의 달인이 되어야 한다.

중국 전국 시대 현금의 달인인 백아(伯牙)는 자기의 연주를 듣고 알아주던 종자기(鍾子期)가 죽자 크게 슬퍼하며 현금의 줄을 끊었다. '나의 연주를 알아주는 종자기도 없는데 연주는 해서 무엇 하랴.'라는 지음의 우정이 담긴 귀명창의 고사가 전한다. 이처럼 자기의 연주를 제대로 들어주는 귀명창은 연주자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후원자며 보호자이다. 무대 위의 예술인은 관중의 박수를 먹고 산다고 하지 않는가. 이처럼 관중은 나무를 키워내는 흙이나 물과 같은 존재다. 내 이야기를 잘 들어 주고 이해하는 종자기 같은 친구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잘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한때 터무니없는 헛소문에 휘둘려 화를 참고 있을 때다. 평소 아껴주던 선배가 자초지종을 듣고 싶다며 자기 집으로 초대였다. 술잔을 나눴다. 술잔이 비면 채워주고 안주를 만들어내었다. 내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가끔 '쯧쯧' '그래서' '괜찮아' 등의 동의를 하면서 들어주었다. 이런 동의와 격려가 나의 억울한 이야기를 쏟아내게 했다. 그때의 내가 소리꾼이라면 선배와 형수님은 고수며 귀명창이었다. 술병이 쌓이는 만큼 마음은 비워지고 가벼워졌다. 다행히 그 선배가 나서서 음해를 밝히고 오해가 풀린 일이었다. 처음 선배 집에 갈 때는 몸과 마음이 비틀거렸지만, 집에 들어설 때는 추임새의 날개짓과 취흥으로 비틀거렸다. 귀명창은 경청보다 적극적인 소통이고 나눔이었다.

판소리는 오페라와 비교된다. 오페라 반주를 맡은 관현악단과 지휘자가 고수라면 창은 아리아(Aria)이고 아니리는 이야기풍의 노래 레시타티보(recitativo)이다. 발림은 가수들의 무대 연기와 조명 춤사위를 나타낸다. 이에 비해 판소리는 소리꾼 한 명이 수많은 오페라 출연자의 역할을 하는 일인다역이다. 오페라의 다양한 무대장치와 화려한 의상에 비해 판소리는 돗자리 하나 바닥에 깔고 병풍 하나면 족하다. 선비차림에 쾌자(快子)를 걸치거나 한복차림의 명창 의상은 어디서나 어울릴 수 있는 우리만이 가지고 있는 음악 유산이다. 오페라의 관중은 대부분 귀족이나 부유층이었다. 초기에는 극 중의 유명한 아리아가 나오면 앙코르를 외치며 몇 번이고 같은 노래를 부르게 하여 피곤하고 시간을 지체시켰다. 판소리의 관중은 그 마을의 양반이나 부잣집 뜰에서 남녀노소 구분 없이 마을 사람 모두가 관중이 되어 아무 곳에나 자리를 잡는다. 소리가 시작되면 주인장은 물론 누구나 추임새로 소리꾼의 흥을 불러내어 즐기는 한마당을 이뤘다.

판소리 춘향가 완창 공연에 참석했다. 연주가 5시간이 넘었다. 명창이 여자 분이어서 장면마다 옷을 갈아입을 때가 쉬는 시간이고 중간에 잠시 시간이 주어졌다. 오래 쉬면 명창의 흐름이 끊어지기 때문이리라. 고수는 번갈아 가면서 함께한다. 소리꾼의 긴 시간을 견뎌내는 체력과 인내력이 대단했다. 하지만 끊임없이 추임새를 하면서 호응하는 귀명창이 없다면 완창을 하기 힘들 것 같았다. 귀명창은 명창과 고비마다 정을 나누며 함께하는 부부와 같은 관계였다. 귀명창이라는 이름도 아마 여기에서 연유한 것 같다.

이몽룡이 어사가 되어 전라도 땅에 들어서 들녘에 일하는 농부를 보고 농부가를 부른다. 판소리에서 관객이 창을 따라하지 않는다. 하지만 고비를 넘길 때마다 귀명창들이 자연스럽게 끼어든다. 농부가를 같이 부른다. 나도 한 자락 따라 했지만 울컥한다. 더구나 모인 귀명창들의 높은 수준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추임새는 칭찬의 몸짓이며 언어다. 판소리 나라에서 귀명창의 언어는 추임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그 칭찬이 추임새라 하겠다. 자라는 아이나 시름에 빠진 사람에게 격려의 추임새 한마디가 삶을 바꾸는 것과 같은 것이다. 판소리에는 칭찬을 아끼거나 쉬지 않는다. 나는 처음 만난 추임새가 어색하고 서툴렀다. 칭찬과 격려와는 너무 멀리 살아온 탓일 게다. 판소리 나라의 추임새를 일상생활의 언어로 옮겨본다.

사람은 누구나 연주자가 되기도 하고 관중이 되기도 한다. 스타를 만들어내는 것도 관중이고 퇴출시키는 이도 관중이다. 관중과 연주자는 서로 소통하며 하나가 된다. 연주자의 신명과 흥을 불러내어 자기의 능력을 최대로 펼치게 하는 것도 관중의 몫이었다. 나는 어떤 자리에서도 주위의 활력소가 되는 귀명창의 역할에 반해 버렸다.

보는 것이 사물과의 연결과 단절이라면 듣는 일은 관계의 연결과 단절이 된다. 듣는 것은 함께하는 일이고 귀명창은 마음과 흥을 함께 나누는 일이다. 보지 않고 듣지 않으면 관심도 줄어들고 멀어지게 된다. 판소리 열두 마당이 다섯 마당으로 줄어 들었다. 춘향가, 흥부가, 심청가, 적벽가, 수궁가등 우리의 질박한 정서가 담긴 다섯 마당이 남아있다. 격과 결이 다른 우리의 판소리가 유네스코 인류 무형문화재에 등록되었고 우리나라 무형문화제 제5호로 지정되어 보존하려고 힘쓰고 있다. 소리꾼을 명창이나 인간문화재로 아끼고 보호한다. 귀명창은 평소 판소리를 좋아하고 집중과 몰입으로 그와 공감하고 존중하는 습관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판소리와 흥을 함께하는 귀명창의 이름과 역할, 의미까지 우리의 무관심 속에서 보존될 수 있을까.

귀명창이 우뚝하다. 칭찬과 배려가 부족한 나와 마음이 매마른 이웃들에게 귀명창은 삶의 활력소다. 코로나 19도 그렇고 시절 정서도 그렇다. 개나리와 진달래, 단풍처럼 빠지지 않고 모두에게 귀명창의 추임새를 전하고 싶다. 나부터 생활의 마디마다 숨표나 쉼표마다 귀명창이 되어보련다.

엇! 타닥 탁……!

나도 모르게 '얼씨구 좋다. 그렇지, 잘한다.' 추임새가 한꺼번에 날아오른다.

 

 

 

[2021 매일 시니어문학상 수상작] 논픽션 부문 '꿈꾸는 숲' - 이승영

이승영...

news.imaeil.com

 

'수필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팝꽃 / 김춘기  (0) 2021.12.01
삼강나루 / 이일근  (0) 2021.12.01
존댓말의 세계 / 김소연  (0) 2021.11.30
백천계곡 단풍터널 / 이융재  (0) 2021.11.30
법화경(法華經), 연밭에서 읽다 / 이선옥  (0) 2021.11.29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