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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조팝꽃 / 김춘기

부흐고비 2021. 12. 1. 15:37

2021 매일 시니어문학상 수상작

강 둔치는 온통 꽃밭이다. 시민의 정서를 배려해 만든 화단에는 튤립과 수선화가 줄지어 앉았고 그 둘레를 따라 조팝꽃이 띠를 이루며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아름다움에 취한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셔터를 눌러댄다. 눈은 여유로운 분위기에 취해 있으면서 머리로는 조팝꽃에 대한 팍팍한 기억과 보호받지 못한 그분들 모습이 어른거린다. 어려운 시기에 태어나서 몹쓸 병마로 서러운 생을 살다간 그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리다.

여섯 살 어림의 봄이다. 진달래가 진 고향마을 산야는 조팝나무가 점령했다. 긴 가지에 자잘한 꽃송이가 닥지닥지 붙은 꽃나무가 밭둑이나 산기슭에 지천으로 깔렸다. 꽃 모양이 튀긴 좁쌀 같다 하여 좁쌀밥나무 즉 조팝나무라 부른다. 가까이에서 보면 좁쌀처럼 까슬까슬한 식감으로 다가온다. 입안에 넣으며 푸석해서 목구멍으로 쉬 넘어가지 않는 조밥이 된다.

봄날은 나른하고 입맛을 잃기 쉬운 계절이다. 윤기 흐르는 쌀밥이라면 모를까 보리에 좁쌀을 섞어 지은 조밥은 작은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잘 먹지 못해 볼에 마름 버짐이 피어오를 때 쯤 조팝꽃이 수두룩하게 피어오른다. 화려함이라곤 조금도 없는, 풀 섶에 시무룩하게 핀, 조밥 닮은 흔하디흔한 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맘때 산골 아이들은 꼴을 캤다. 아직 풀이 덜 자라 낫으로 베기는 이른 계절이라 호미로 캐는 것이다. 언니는 친구들과 함께 다래끼를 메고 꼴을 캐러 나섰다. 성가시다고 집에 있으라는 언니의 말을 귓가로 흘리고 따라 붙었다. 봄날에 집에 혼자 있는 것은 심심하기도 하지만 무서운 일을 겪을 수 있어서이다. 혼자 있을 때 상이용사들이나 나병환자들이 떼를 지어 들어와 동냥을 요구하면 감당하기 힘들다. 이미 겪은 일이다.

1950년대 말은 나병환자들이 수용소에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전국으로 떠돌이 생활을 하던 때이다. 천형이라 생각하는 무서운 병이기에 걸리게 되면 가족 곁에 머물 수가 없다. 발병 후 얼마동안은 골방에 숨어 지낼 수 있지만 멀지 않아 이웃에게 알려지면 그때부터 마을에서 쫓겨나 떠돌이 생활이 시작된다.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을 만나 집단을 이루고 양지바른 곳에서 추위를 피하다가 봄이 되어 날씨가 풀리면 사방으로 동냥을 하며 흘러 다닌다.

나병은 인육을 먹으면 낫는다고 아이를 잡아다 술밥에 쪄서 술을 만들어 먹는다는 낭설이 마을을 건너다녔다. 어느 동네 아이가 없어졌다거나 어떤 환자가 인육으로 담은 막걸리를 먹었더니 벌레가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는 등 검증도 되지 않은 소문이 그들보다 먼저 날아왔다.

우리는 강가에 이르렀다. 강 건너 풀이 많다고 언니들은 강을 건넜다. 비가 와서 강물이 불은 상태라 여섯 살짜리가 건너기에는 무리였다. 혼자 남겨진 나는 돌무더기를 쌓으며 시간을 보냈다. 한참을 놀다가 건너다보니 언니들이 보이지 않았다. 인적이 끊긴 주위는 정적이 감돌고 무서웠다. 언니를 불러대며 울고 있을 때 두런두런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나타났다.

길 가던 이들이 아이 울음소리를 듣고 다가오는 것이다. 마을 어른들이 늘 주의를 주던 말이 떠올랐다. "문둥이들이 어린 아이를 잡아가니 혼자 다니지 말라. 혹시라도 그들을 만났을 때 엿을 주겠다고 꼬이면 따라가서는 안 된다." 노상 듣던 말이다.

'이 사람들이 그 무서운 문둥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온 몸이 곤두서고 머릿속은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잡히면 술밥이 되겠다는 공포감에 강가를 거슬러 올랐다. 그들은 오라는 손짓을 하고 소리를 지르며 다가 왔다. 곧 잡힐 것 같아 강으로 뛰어 들었다. 물이 허리까지 차올랐다. 물살이 세어 쓰러질 듯했지만 기를 쓰고 강을 건넜다. 그들은 강가에서 노려보고 있었다. 나병은 피부가 짓무르는 병이라 환자들이 물을 싫어한다던 어른들의 말이 생각났다.

강폭이 넓지 않아 건너편 그들의 모습이 보였다. 네댓 명으로 보이는 사람들 중에 등에 망태기를 걸머지기도 하고 얼굴이 일그러진 사람도 있었다. 한 참을 노려보며 손짓을 하던 그들은 돌아섰다. 긴장했던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털썩 주저앉은 발아래에 조팝꽃이 즐비했다. 강둑은 온통 조팝꽃 천지였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린 공간에서 만난 꽃은 눈물로 된 한 덩이 슬픔이었다. 슬픔에 묻혀 아득해진 마음을 추스르는 사이 조팝꽃은 서러움의 표상처럼 각인되었다.

전쟁 직후의 나라는 가난하고 무질서했다. 나병환자만이 아니라 상이용사들도 나무로 의족을 하거나 쇠갈고리로 의수를 해서 무리지어 다녔다. 참전용사로 전쟁터에서 몸을 바친 그들에게 국가는 보상하지 못했다. 국민들도 따스한 시선을 보내지 않고 피했으니 달랠 길 없는 분노가 끓어올랐다. 허기지고 피폐해진 그들은 분노의 갈고리를 쳐들고 불만의 언어를 뱉어내던 시절이었다.

산야를 덮던 조팝꽃이 공원에서 환영받게 된 변화에 위로를 느낀다. 흡사 서럽던 그날 그들이 귀한 자리에 초대받은 느낌이다. 나라가 힘이 생기니 끼니를 구걸하는 절박함에서 벗어났다. 지천으로 피어나던 꽃을 공원으로 모셔 와 찬사를 보내는 달라진 세상이다. 이제는 조밥마저 별미가 된 세상이니 조팝꽃은 더 이상 서러움의 표상이 아니다. 한 많은 생을 살다간 그분들의 서러움과 분노도 이제는 풀렸으면 한다. 공원을 거니는 이들의 표정은 꽃보다 더 꽃 같다. 살만한 세상이 마냥 고맙다.


 

 

 

[2021 매일 시니어문학상 수상작] 논픽션 부문 '88올림픽과 나' - 김종석

김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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